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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
맥도나의 <이니셰린의 밴시>
  • 정문영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2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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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 뷰티의 탄생

지난 3월, 마틴 맥도나의 4번째 장편영화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 2022)가 개봉됐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8개 부문 9개에 걸쳐 유력후보에 올랐으나,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한 아쉬운 결과가 발표된 직후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베니스국제영화제, 골든 글로브, 영국 아카데미를 비롯해 유명한 국제 시상식과 영화제에서 120여 개 부문을 수상하고 330여 개 부문에서 후보로 지명됐다.

맥도나의 최신작인 이 영화는 『이니시어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er)를 각색한 작품으로 보인다. 극작가로서 그의 데뷔작인 코네마라 삼부작에 연이어 발표한 두 번째 삼부작, 아란 삼부작 중 그가 후일 다시 쓰겠다며 출판을 보류했던 작품이다. 물론, 원전이 미출판인 관계로 이 영화와의 상호텍스트성을 확인할 수는 없다. 영화의 배경도 실제 섬 이니시어가 아니라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섬이다. 그러나,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가 미출간 희곡 『이니시어의 밴시』를 각색한 작품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근거는 제목의 유사성과 연극성 외에도 영화 속에 산재해있다. 

단기간에 연극계에 성공적으로 입문한 맥도나는 자신의 극작 동기가 연극계보다 영화계 진출을 위한 것임을 주저 없이 밝혔다. 사실 그의 데뷔작들은 존 밀링턴 싱의 연극에서 따온 파편들을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의 포스트모던 스타일로 재구성한 것이라는 간결하면서도 폄하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에 “싱과 타란티노 사이의 혼종”(1) 극작가라는 레벨이 붙은 맥도나의 극작은 어쨌든 시작부터 영화와의 긴밀한 연관성, 즉 연극과 영화의 상호매체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20여 년 전 쓴 아란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의 각색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초기의 그의 연극과 영화의 상호매체성과 아일랜드 서부, 골웨이에서 찾고자 한 아일랜드성(Irishness)에 대한 다시 보기를 영화를 통해 시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아일랜드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나 그곳을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맥도나의 연극과 영화에서 재현된 아일랜드는 사실성이 결여된 상상의 아일랜드라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입지, 아일랜드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주변인’의 입지는 오히려 안에서 또는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아일랜드 사회의 다양한 경험들과 복합적인 문제들을 볼 수 있고 드러낼 수 있는 동인을 생성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이니셰린은 가상의 섬으로 구축된 연극적이고 인위적인 스펙터클이다. 이런 연극성에 기반을 둔 아일랜드 영화는 그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실제적인 상황과 이슈를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관심사는 아일랜드가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현실의 문제들 자체가 아니다. 이 영화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 문제들을 야기하고 대응하는 주류 사회적, 습관적 인식들로는 간파할 수 없는 인위적인 스펙터클의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폭력과 야만의 본질적 세계이며,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아일랜드성, ‘아이리시 뷰티’인 것이다. 

 

예이츠 “순수한 아일랜드성의 마지막 보루”

이 영화는 맥도나의 기존 영화들과는 달리 시대적 배경을 아일랜드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1923년으로 특정화하고 있다. 그러나 내전은 그야말로 이 영화의 먼 배경이 될 뿐이다. 수시로 들리는 대포 소리는 등장인물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동요를 드러내는 청각 이미지로 사용되고, 어느 쪽이 우세인지 전세가 어떤지는 이곳 이니셰린 주민들의 관심 밖 뉴스일 뿐이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건은 내란이라는 큰 전쟁이 아니라 이니셰린의 두 남자, 파우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단 글리슨) 사이의 작은 전쟁이다. 이 영화 또한 맥도나의 다른 영화들처럼 연극성을 기반으로 비극의 삼일치를 따르고 있다. 이니셰린이라는 한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 2023년 4월 1일부터 ‘며칠’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두 남자 사이의 전쟁이라는 단일 사건을 다룬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개입과 관객의 역할을 하는, 그리고 연주와 합창을 하는 선술집 손님들과 섬 주민들의 코러스 기능까지 갖춤으로써 비극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 영화는 맥도나의 기존 영화들처럼 블랙 코미디, 희비극(Tragic comedy) 장르로 분류된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 콜름과 ‘다정한 사람’ 파우릭, 파우릭의 똑똑하고 다정한 여동생 시오반 그리고 파우릭보다 더 바보 취급을 당하는, 셰익스피어의 바보광대(Fool)를 연상시키는 도미닉을 연기한 배우들의 열연이 담긴 이 영화(“도합 60개 이상 연기상을 휩쓴 미친 앙상블”)는 비극적 연극성이 부각된 영화다. 이렇게 두 남자 사이의 코믹하지만 진지한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테리빌리타(Terribilità, 공포감마저 드는 극한의 아름다움)’의 아일랜드성을 추구한다. 

 

“무서운 아름다움”, 1916년 부활절 봉기

이런 작은 사건 속 비극을 통해 “슬픈 아일랜드”의 “비극적 운명”(2)이 탄생시킨 아이리시 뷰티를, “광활한 자연 본래 그대로”로 담아낸 “가장 아름다운 아일랜드 영화”라는 과찬의 평가를 받을 만하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싱과 같은 1세대 극작가들에게 고립되고 근대화되지 않은 농촌 아일랜드 서부는 영국의 식민 통치로 오염되지 않은, 즉 영국화 되지 않은 순수한 아일랜드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애비 극장을 중심으로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을 이끈 시인 예이츠는 특히 골웨이의 아란 제도를 “순수한 아일랜드성의 마지막 보루”(3)가 되는 신화적인 장소로 여겼다. 

한편, 싱은 아란 섬 주민들이 고양된 삶을 살면서 애비 극장이 고취시키고자 한 순수한 아일랜드성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지 않았다. 예이츠보다는 싱을 계승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3세대의 대표적 극작가 맥도나의 삼부작 작품들처럼 이 영화 또한 이니셰린 섬 주민들의 삶이 순수한 아일랜드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맥도나의 다른 삼부작 작품들이 배경으로 한 실제 아란 제도의 섬들과는 달리, 이 영화의 가상의 섬 이니셰린은 예이츠가 추구한 아일랜드의 극한의 아름다움(‘아이리시 뷰티’)을 탄생시킬 수 있는 신화적 장소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순수한 아일랜드성이 결코 회복될 수 없다는 싱의 비판적 입지를 반영했던 다른 삼부작들에서와는 상당히 달라진 맥도나의 아일랜드성에 대한 관점을 이 영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923년 잔인한 4월에 일어난 이니셰린의 두 남자의 우정과 절교가 일으킨 작은 비극적 사건이 탄생시킨 ‘테리빌리타’의 아일랜드성은 아일랜드 독립의 실제적인 동력이 된 1916년 4월 더블린의 부활절 봉기라는 커다란 사건이 탄생시킨 “무서운 아름다움”(A terrible beauty is born)으로 포착한 예이츠의 아일랜드성과는 그 격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더블린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쳤던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갑자기 변해서 성급하게 과격한 행동을 하고 결국 비극적인 희생을 치르게 만든 부활절 봉기가 “무서운 아름다움”을 탄생시켰다. 

마찬가지로 별일 없으면 오후 2시쯤 선술집에서 만나 맥주 한잔을 마시며 늘 함께 시간을 보내왔던 이니셰린의 평범한 두 남자의 내분 또한 부조리하기 짝이 없지만 테리빌리타의 아이리시 뷰티를 탄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간간이 본토에서 들리는 공허한 대포 소리를 내전의 현장에서 사정거리를 벗어나 있는 이니셰린 섬의 단절과 고립을 상기시키는 음향효과가 더해져 이 영화가 전경화한 두 남자의 비극적 전쟁은 이니셰린에서는 내전보다 더 중요한 의미와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콜름과 파우릭이 각자 다른 길로 가는 모습이다. 파우릭은 도미닉의 변태적인 아버지이자 경찰관인 피더에게 맞고 쓰러진다. 콜름은 쓰러진 파우릭을 마차에 태워주지만, 내내 오열하는 파우릭을 애써 외면한다. 콜름은 마리아상 앞에서 고삐를 파우릭의 손에 쥐어 주고 마차에서 내린다. 즉, 콜름과 파우릭은 식민 통치의 폭력적인 공권력(피더)에는 연대하지만, 결국 갈라서는(독립파와 현실타협파의 분열) 아일랜드의 비극적 운명을 보여준다. 

영화 중반부에 콜름이 파우릭에게 경고한 대로 자신의 왼손 손가락을 잘라 그에게 보내고 나서, 마치 고흐가 귀를 자르고 그림에 몰두했던 것처럼, “이니셰린의 밴시”라는 가제의 음악 작곡에 탄력을 가하며 몰입하는 “적극적 멜랑콜리”를 구가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파우릭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 멜랑콜리”(4)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을 전개하기 위해 편집한 일련의 몽타주들은 이니셰린을 신화적 장소로 만들어준다.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하늘, 환상적인 초록빛의 광활한 들판, 아름다운 일몰,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친 해변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의 중요한 캐릭터가 되는 자연 풍경의 몽타주들과 함께 이니셰린을 떠나는 시오반, 당나귀 제니의 죽음 등의 장면들의 교차 편집은 그로테스크를 넘어서 야만성이 불러일으키는 테리빌리타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순수 시각 이미지들을 생성한다. 

이 영화의 엔딩은, 죽음을 예고하는 밴시의 역할을 대신하는 맥코믹 부인(쉴라 플리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콜름과 파우릭이 바다 넘어 고요한 본토를 바라보며 내전에 관한 짧은 대화를 나눈 후, 파우릭이 떠나가면서 점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 가는 것으로 끝난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거리는 본토에서 일어난 내전이 가져온 아일랜드의 분열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엔딩의 의미는, 아일랜드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시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콜름이 흥얼거린 “이니셰린의 밴시”의 몇 소절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사라지듯이, 이니셰린을 현실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한 “순수한 아일랜드성”을 간직한 아이리시 뷰티를 탄생시킬 바다에 접한 신화적 장소로 남겨둔 채 끝을 맺는다.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연극과 영화 비평이론, 연극, 영화, 각색에 관한 논문과 평론을 쓰고 있다. 


(1) https://www.independent.co.uk/arts-entertainment/theatre-dance/reviews/the-beauty-queen-of-leenane-young-vic-london-2033155.html
(2) 박지향. 『슬픈 아일랜드』. 기파랑. 2008. 25쪽. 
(3) 아일랜드 드라마연구회. 『아일랜드로 가는 연극 여행: 아일랜드, 아일랜드』.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년.  
(4) 라이너 메츠거. 『빈센트 반 고흐』. 하지은·장주미 역. 마로니에북스.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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