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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0일, ‘대한민국의 봄’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2024년 4월 10일, ‘대한민국의 봄’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 김민정 | 중앙대 교수
  • 승인 2024.01.3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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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사극부터 정통 사극까지 2024년 대한민국은 사극 열풍으로 뜨겁다. 27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정통 사극 최초로 넷플릭스 국내 1위를 기록하며 역사드라마의 막강한 존재감을 발휘 중이다. 흥미롭게도 한국 역사드라마의 부흥기는 한반도의 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역사드라마의 ‘역사’는 ‘오늘’을 읽어내는 시대의 좌표이자 ‘미래’를 보여주는 시대의 나침판이다.

1996년에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은 방영 당시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시점에서 조선 건국의 피비린내 나는 ‘정치’를 이야기해 큰 화제를 모았다. 600년 전 오래된 과거의 역사를 ‘오늘’의 정치로 치환해 멀티버스 속 또 다른 버전의 현실 세계로 실감을 부여한 것이다. <용의 눈물>은 조선 건국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관한 이야기였다.

역사드라마의 역사는 과거완료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서 지금 여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게 파고든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일상의 감각으로 복원된 스크린 속의 ‘살아있는 역사’는 ‘삶으로서의 정치’의 유의어로 자리매김한다. 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019년, 정치드라마가 여러 편 방영됐다. <60일 지정생존자>, <위대한 쇼>, <보좌관>… 그리고 올해 4월,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2024년 대한민국의 봄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갑진년 푸른 용의 해. 2024년의 화룡점정을 미리 ‘찍는’ 마음으로 최근 방영되거나 방영 중인 역사드라마를 통해 우리 안의 미래를 깊게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크고 작은 용‘들’의 눈물 

<용의 눈물> 이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한 대한민국은 특수상황이었다. 세기가 바뀌고 경제적 환란(IMF)이 오고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비전과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조선 최초의 여자 어의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대장금>(2003), 현대그룹을 세운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영웅시대>(2004), 고구려 건국을 다룬 드라마 <주몽>(2006) 등 시대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은 인기를 끌었다. 낡은 시대를 돌파한 용감무쌍한 영웅담인 동시에 현실에 유용한 처세술을 배울 수 있는 ‘한국판 손자병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바야흐로 ‘국민 사극’의 시대였다.

최근 역사드라마는 비슷하면서 좀 다르다. ‘잘 살기 위한 처세’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처세’다. ‘삶’이 아닌 ‘생존’, ‘희망’이 아닌 ‘절망’을 준비하는 ‘각자도생’의 시대. 좀비 아포칼립스에 버금가는 암울한 시대 인식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아신전>(2021)의 주인공 아신은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으로 태생부터 최하위 계급이다. 당시 조선에 사는 여진족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핍박과 멸시를 받았다. 그중 아신은 부모가 없는 어린 고아 여자아이였기에 극심한 생존 위협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훗날 성인이 된 아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잃고 조선 땅과 여진 땅에 살아있는 모든 걸 죽여버리겠다고 복수를 결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복수심은 지옥과도 같은 극한의 삶에서 아신 혼자 살아남게 하는 강한 생존력으로 작동한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인간을 향한 불신이 그만의 생존 비법이 된 셈이다. 

각자도생의 생존 위협은 최상위 계급에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시대판 스카이캐슬’로 불린 드라마 <슈룹>(2022)은 중전과 후궁들의 흥미진진한 사교육 열풍을 전면에 내세워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금수저 계급 안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무한경쟁이 자리한다. 같은 ‘금수저’지만 어머니의 신분과 처지에 따라 왕자들의 등급이 또 나뉜다. 그리고 그 경쟁은 단순히 왕위가 아닌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은 죽음을 피하기 어렵기에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워야만 한다. 

극중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던 계성군은 역사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성소수자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런 설정은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드라마의 시의성과 현재성을 높이기 위한 서사 전략의 일환이다. 동시에 최상위 계층의 왕자에게 소수자성을 부여해 드라마 안의 생존 모티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계성군의 어머니인 중전은 아들이 성소수자인 것이 밝혀져 위험에 처하게 될까 봐 고군분투한다. ‘크고 작은 용’들의 목숨을 건 치열한 눈치 싸움이 바로 <슈룹>이다.

 

‘그럼에도’ 살아남아야한다

‘절대적’ 갑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갑의 세계 안에서도 계급이 나뉜다. 갑도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언제든 을의 위치로 추락할 수 있다. 갑과 을로 이루어진 계급 피라미드의 정상만을 바라보던 우리의 신념과 의지는 허무하게 배신당했다.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의 불길은 사그라들고 다크 히어로가 일으킨 찰나의 불씨도 꺼져버렸다. 절대성의 몰락. K-세계관의 붕괴는 갑을 세계관의 폭력성과 배타성마저 낭만적인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을 만큼 체제 파괴적이다. 최소한의 방어벽조차 사라진 세계, 생존 지능이 디폴트값이 돼버린 비극적 시대 인식,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드라마 <연인>(2023)은 병자호란 이후로 조선이 직면한 ‘각자도생’의 처절한 생존기를 그린다. 왕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왕자를 청나라 볼모로 보내고, 왕자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백성을 청나라 포로로 남겨둔 채 귀환한다. 그렇게 왕과 왕자는 청나라로부터 목숨을 보전받기 위해 자기 자식을 버리고,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백성을 버린다. ‘갑’의 상황이 이럴진대 ‘을’의 상황은 더욱 처절하고 참혹하다. 백성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아들을 버리고, 아내를 버리고, 남편을 버리고, 나라를 버리고, 신념을 버리고, 목숨을 버린다. 모든 가치와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개인 단독자로서 생존 투쟁에 내몰리며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적은 내부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밖에도 있다. 더욱 막강한 적이 밖에 있었단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의 갑, 슈퍼 갑의 등장, 그리고 슈퍼 갑의 등장에 따라 새로운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진다. 더 배타적이고 더 폭력적인 세계로의 초대. 절대적 세계관의 붕괴가 아니라 상대적 세계관의 확장이다. K-세계관이 통째로 하부 체제로 흡수되는 글로벌 세계관의 재편성이 시작된 것이다. 백성, 왕자, 왕, 조선, 그리고 청나라. 그리고 거란족. 그리고 여진족. 그리고 몽골족. 그리고…

드라마 <고려거란전쟁>(2024)은 거란족에 의한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라는 방어막을 상실한 한민족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 벌어지던 11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거란족·여진족·몽골족과 같은 외세의 잦은 침략 앞에서 한반도의 모든 계급은 생존 서바이벌에 내몰린다. 생존을 위한 각개전투. 백성뿐 아니라 왕의 피를 물려받은 ‘용손’까지 맨몸 생존 서바이벌을 해야 할 정도로 극강의 공포사회가 펼쳐진다. 왕위 계승을 앞두고 19세의 대량원군은 끊임없이 살해 위협을 받는다.

왕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허수아비 왕 노릇을 강요받는 험난한 황실 적응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내부의 적에 이어 외부의 적 ‘거란’까지 전쟁을 선포하며 그를 압박해온다. 배타적인 절대성의 세계가 있던 자리에 불안과 공포의 불확실한 상대성의 세계가 세워진다. K-역사드라마는 세계사를 무대로 또다시 수치와 굴욕의 역사를 되새김하며 생존을 위해 반복 학습하는 중이다. 

 

‘살아있는 대항의 역사’ … 대한민국의 봄이 오고 있다

을에 의한, 을을 위한, 을의 대한민국이 오고 있다. 4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일을 고작 두 달 남겨둔 시점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다. 2024년을 향한 불안과 공포가 일상의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모든 가치와 질서가 무너진 순간, 사람들의 선택이 갈리고, 그 갈림길에 놓은 그들의 선택 기준은 하나다. 생존,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한다. 생존 의지와 생존 본능이 지금 여기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이자 최고의 능력으로 간주된다. 

미디어에서 재현된 현실 세계는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토대로 현실을 재구성한다. 드라마의 ‘생존’ 모티프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자 민심의 동향이다. 2024년 대한민국의 봄은 어떤 얼굴일까. 우리는 과연 어떤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아니, 우리는 어떤 봄을 맞이해야 하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2023)는 대한민국의 가장 어두웠던 시기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자신의 터전과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죽고 죽이는 싸움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세계열강의 이권 다툼으로 아수라장이 된 1920년대 격동의 간도에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중국 마적과도 싸우고 일본 경찰과도 싸우고 친일 조선인과도 싸운다. 일제 강점기는 이제 더 이상 굴욕과 수치로 얼룩진 패배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무수히 많은 목숨으로 얻어낸 투쟁의 역사다.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과는 무관한 그들의 삶을 드라마는 치열하게 기록한다. ‘생존’을 위한 모든 몸부림을 항일무장투쟁의 한 방식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듯이 말이다. 드라마 <연인>의 병자호란도,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고려거란전쟁도 동일하다. 시대의 어둠에 잠식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향한 거룩한 애도. 2024년 역사드라마의 생존자는 사적 생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생존은 ‘그럼에도 여기 사람이 있다’는 묵직한 고백이 되고, ‘살아있는’ 대항역사가 된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이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기록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지켜낸다. 

 2023년 최고의 화제작 영화 <서울의 봄>을 단순히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 한 명의 영웅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을 ‘한 사람’이 지켜내고자 했던 ‘1980년 대한민국의 봄’으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존재.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삶은 계속된다. 그렇게 봄은, 계속돼야 한다. 어제를 살아낸 오늘의 당신이 나는 참으로 자랑스럽다. 우리가 힘써 찾던 그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일 수 있다. 4월 10일, 대한민국의 봄이 오고 있다. 

 

 

글·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넘나들며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르몽드문화평론가상, 그리고 2022년 중앙대 교육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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