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책들은 허들이 높은 편인 것 같다. 읽고 좋아서 주변 누군가에 추천하면, 책을 좋아하는 그들은 보통 책을 샀지만, 앞장 몇 장이 펼쳐지는 것도 잠시, 책장으로 직행하여 더는 꺼내지지 않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나의 지인들은 오이디푸스에 익숙했기 때문에 주로 『안티 오이디푸스』부터 사는데 보통 첫 장을 넘기는 데에도 실패하는 것 같다. 첫 문장부터 이렇다.
“그것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아주 발칙하고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그것이 뭔지도 알지 못하는데, 그것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라는 것이 어딘가에 고정된 무엇이 아님을, 부정 대명사적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글쓰기적 장치인 것 같다는 현재의 이해에 다다랐다. 그러나 글을 읽자고 들어온 독자가 처음 만나는 도입부의 첫 문장의 첫 단어부터 낯설고 놓아야 할 위치를 알 수 없다면, 토끼 구멍에 빠진 앨리스처럼 예상치 못한 혼돈의 미궁에 빠진 상황일 테니 누가 마냥 좋아라만 하겠는가.
사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 제목들만 해도(『안티 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분열증』, 『천의 고원』, 『차이와 반복』, 『기계적 무의식』, 『분자혁명』) 영 친숙하지 않고 거리감이 느껴진다. 철학적인 개념에 정신분석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개념이 함께하는 것도 모자라 직관적인 형상적인 표현도 섞여 있으니, 대체 이런 식으로 어찌 동맹군을 모은다고 하는 건지 한숨이 날 지경이다.
『대담』에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소양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정신분석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었어. (...) 반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 정신분석에 물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문제를 덜 느끼고, 별다른 고민 없이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내버려 둔다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15에서 20세 사이의 친구들을 위한 책이라고 말했던 거야. (p.24)”
하지만 정신분석에 물든 이들뿐 아니라 기존 언어의 문법에 익숙한 다수의 사람에게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기존의 책을 읽는 방식에 익숙한 이들의 당혹감은 실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이들에게는 이미 신물이 난 모양인지 줄곧 신랄한 표현을 쏟아부으며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들뢰즈에게 친절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1)
그는 책을 책이 아닌 방식으로 접하는 방법, 즉 책을 접한 뒤에 “이것이 작동하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p.25)”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이 방식은 나의 들뢰즈 읽기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길과 유사해 보이긴 한다. 어쩌다 마주한 그의 문장 하나가 가슴에 박혀 울린 김에 『차이와 반복』을 샀지만 바로 접힌 채로 읽히지 못한 채 꽂혀 있었다. 시선을 쉬이 뺏는 것들이 도처에 머무는 시대에 그러한 글이 길게 읽힐 리 만무했다. 그런데 어쩌다 시간이 남아돌 때 종종 페이지를 펼쳐 마주한 그의 문장들은 인상적이었다. 전부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만난 부분 부분이 일렁이고 반짝였다. 그들이 자주 쓰는 표현을 쓰자면, ‘분열적 읽기’ 혹은 ‘게릴라전’이었다. 순서도 맥락도 없는, 그저 어떤 상황이나 우연히 마주친 사건과도 같은 문장들. 시를 대하는 방법과도 비슷해 보인다. 모든 게 한 번에 닿지 않더라도, 테크놀로지 역사가이자 문화비평가였던 해러웨이가 말했듯 ‘소화불량인 상태’로 내게 맴도는 문장들.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지은 다양체들의 연결로 이루어진 미궁들은 그 모습을 한 번에 모두 드러내지 않는다. 시작과 끝이 없는 과정 도중이자 조각난 원환들의 집합 같은 것이기에 실은 어디로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고 아무거나 붙잡아 봐도 되겠지만, 그럼에도 주저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번에 나온 『대담』은 들뢰즈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데에 있어 나름의 부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에 대한 대담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목소리와 어조를 느낄 수 있고, 이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들뢰즈를 만날 수도 있다. 여기엔 들뢰즈가 잠시 머무른 시대와 자리, 그의 목소리의 톤이 주는 정보와 힌트가 있기에 그의 영화 이론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후에는 ‘철학’과 ‘푸코’ 그리고 ‘사회와 정치’에 대한 들뢰즈의 사유와 그때의 정황들도 접할 수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줄도 쳐가며 읽었지만 다시 펼쳐봐야 기억이 겨우 날까 말까 한 것으로 봐서 아직 이 부분에 대한 내부 작동은 미미한 수준인 듯하다.
내가 가진 이해력이 아직 이런 모양이기 때문에 뭔가 전체 맥락을 이해하여 제시하거나 무언가를 꿰뚫는 서평을 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들뢰즈가 흥미로워하고 관심을 가졌던 그 핑크빛의 ‘공명’이 느껴진 지점들, 잠시 멈추어 한동안 서성였던 문장들 몇 개를 놓아두고 이제 그만 뭍으로 나가보려 한다.
“투쟁이 아니라 교대였습니다. 빛이 그 자체로 운동일 뿐 아니라, 태양의 빛과 달빛이라는 교대하는 두 빛이 있었죠. 화가 들로네(Delaunay)와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p.97, 영화에 대한 대담 중)
“왜 합성된 형태가 여전히 인간이어야 할까요? 인간의 권리는? 그러나 에발드가 보여준 것처럼, 형태의 이러한 변화를 증언하는 것은 권리의 변화들 자체입니다.” (p.170, 푸코에 대한 대담 중)
글·이윤하
들뢰즈를 읽는, 심리상담사
(1)<정신분석 운동의 역사> 속 “그러나 나 혼자 정신분석학을 대표했던 시절 동안, 내가 세상의 견해에 대해 특별한 존경이나 지적인 양보에 대한 어떤 성향을 전개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던 프로이트가 자신의 처지를 표현하며 말한 고백과 겹쳐 보이며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담> 속에서 “철학사는 철학에 분명히 억압적인 기능을 행사하네. 그건 철학에 고유한 오이디푸스지. ‘네가 이것과 저것, 이것에 대한 저것, 그리고 저것에 대한 이것을 읽지 않은 한, 이것에 대한 저것을 감히 네 이름으로 말하려 하지 말아라.’ (p.21)”는 시대의 난관으로부터 빠져나오려 했던 그의 분투를 마주하게 되면 또 웃음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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