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액션영화 감독인 박훈정이 글로벌 OTT 디즈니+를 통해 신작 <폭군>을 선보인다. 공개일은 광복절 전날. 업력이 100년인 미국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한국 감독에게 맡겨 광복절에 맞춰 공개하는 상황이 재미있다.
한미 합작의 광복절 특집 반미영화?
제목 <폭군>은 극중 대한민국 정보기관 내에서 극비리에 추진된 ‘폭군 프로그램’에서 나왔다. 극비사항은 누구에게도 비밀이겠지만, 영화에서는 특히 미국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려고 한다. ‘폭군 프로그램’은 초인군인 양성 계획으로 얼핏 바이러스 같은 인체 주입물을 활용하는 듯하다. 영화에서 이 물질이 아닌, 물질을 둘러싼 공방에 초점을 맞추기에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폭군 프로그램’이 미국 정보기관에 발각되며 프로그램이 중단되고 개발한 물질이 전부 폐기된다. 마지막 남은 샘플이 운송 중 사라지고 샘플을 찾기 위해 한국과 미국 정보기관 사이에 무자비한 난타전이 펼쳐진다는 게 줄거리.
중간에 전문 킬러와 전직 현장 요원이 등장하며 양상이 복잡하게 흐르지만, 기본적으론 한미 정보기관 사이의, 크게 한국과 미국 국가 간의 다툼이다. 한데 주요 배역 중에 외국인은 없다. 미국 정보기관 소속 ‘폴’(김강우)은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사용하는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이다. 폴은 대놓고 검은 머리 아메리칸이지만 한국 정보기관 내에서 암약하는 검은 머리 아메리칸도 나온다.
“한국 실력으로는 감당 못 해, 이거”
폴은 국정원의 엘리트 국장이자 ‘폭군 프로그램’을 진행한 비밀 그룹의 수장인 최국장(김선호)에게 능글거리며 공갈한다. 최국장은 핵도 안 되고 ICBM도 안 되고 이것도 안 되니 “우리가 만만하냐”고 대거리한다. 그렇다고 최국장이 이죽거리는 폴에게 흥분하며 대응하는 건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을 잃지 않고 냉정한 모습을 유지한다.
강대국 미국과 2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해서 미국의 그늘에서 활로를 모색해야 했던 한국 간의 대조적 현실 상황이 두 인물의 캐릭터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출된다. 최국장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은 현재 한미관계의 실상과 동떨어져 있지만, 일종의 복속 관계를 시원하게 깨부수는 영화적 설정만으로 관객은 후련함을 느끼지 싶다.
재미있는 지점은 한미 합작 영화를 통해 한미갈등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흥행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잊지 말아야 할 게 <폭군>은 상업영화이다. 따라서 <파묘>를 보고 어처구니없이 좌파 영화라고 매도한 이상야릇한 관객들이 다시금 <폭군>을 반미이자 좌파 영화라고 공격할 까닭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오락성을 극대화한 상업영화다.
오락영화
이 영화에서 이념의 흔적을 느끼긴 힘들다. 이런 유의 극에 꼭 필요한 대립 구도가 있어야 할 뿐이고 그것이 우연히 한미 정보기관으로 설정됐을 뿐이다. 샘플의 배달 사고 후 긴박하게 펼쳐진 추격전은 작품에 몰입하게 만들기에 한가하게 한미관계를 떠올릴 관객은 별로 없을 듯하다.
포스터에 드러나듯 주요 등장인물은 네 명이다. ‘폭군 프로그램’을 미국에 넘기지 않고 사수하려는 프로그램 설계자 ‘최국장‘과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 샘플을 뺏으려는 추격자 ‘폴’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두 축이고, 전직 현장 요원인 청소부 ‘임상’(차승원)과 기술자 ‘자경’(조윤수)이 가세한다. 신예 조윤수가 열연한 무지막지한 킬러 자경은 영화 첫 부분에서 마지막 샘플의 탈취를 의뢰받고는 대미의 치고받는 아수라장까지 시종을 꿰뚫는 역할을 한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박훈정 감독은 자경에게서 영화를 종결짓는 스토리라인을 선택했다. 많은 영화와 문학이 그렇듯 수미상관이다. 쿠키영상에 자경을 등장시킨 것 또한 수미상관이자 세대를 이어가는 연속성의 표현이며 많이 과장하면 ‘국뽕’적인 성격을 누출한다. 반미와 ‘국뽕’이 만나 당황할 사람들이 있을 법하나, 그저 재미로 감상하면 족한 영화이니 너무 머리 돌릴 필요까진 없다.
캐릭터
극장 대신 OTT를 선택함에 따라 4부작으로 구성됐는데, 시리즈 형식의 강점을 십분 활용했다. 네 개 에피소드로 만들어 게임 스테이지처럼 펼쳐지게 하면서 스토리를 점층하며 전개했다. 적기에 알맞은 장소에 각기 전형적인 캐릭터를 등장시켜 캐릭터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대단원으로 향한다.
임상은 익숙한 느낌의 편안한 차승원 표 킬러이다. 현역 시절 명성을 떨친 전설의 요원이고 은퇴 후 퇴직금으로 운행을 멈춘 기차를 사들였다. 기차 내부 인테리어 비용을 장만하기 위해 퇴직했지만 알바 비슷하게 의뢰받은 목표를 제거하는 ‘청소부’ 일을 한다.
공손한 말투와 단정한 머리모양으로 평범한 공무원의 외양을 취한 늙어가는 킬러이다. “일상적이면서 비일상적이고, 수줍음이 있고 소극적이지만 다분히 폭력적이고, 노쇠한데 민첩한, ‘임상’의 극단적인 양면성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차승원은 전한다.
김선호가 연기한 최국장은 대한민국 정보기관에서 최연소 국장 자리에 오른 엘리트 요원으로 어떤 위기 상황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실력자다. 극비리에 운영한 ‘폭군 프로그램’을, 폐기 명령에도 불구하고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애국자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한다는 대사는 그의 진심이다.
김강우가 배역을 맡은 폴은 ‘폭군 프로그램’의 마지막 샘플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된 미국 정보기관 소속 비밀 요원. 검은 머리 아메리칸으로 미국 몰래 일을 벌이는 한국을 못마땅해하는 철두철미한 미국인이다. 모두가 폭력적인 이 영화에서 빌런 캐릭터를 맡았다.
신인에 가까운 조윤수가 연기한 자경은 이름난 청부업자 아버지 ‘채선생’ 밑에서 실력 있는 ‘기술자’로 자랐다. 특수 금고도 3분이면 열어젖히는 귀신같은 솜씨와 과묵하고 냉정한 성격인데다 뛰어난 싸움 실력을 갖췄다. 상업성이 강한 오락영화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메시지를 찾자면 아마 자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최국장이 던진 메시지가 자경에서 구현된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쿠키영상을 보면 자경은 거두어진 머리 검은 짐승이다. 속담과 달리 자경은 극중에서 거둘 만한 ‘짐승’으로 판명난다. 검은 머리 아메리칸과 이런 식의 대비를 박 감독이 염두에 두었을까.
글 안치용, 사진 디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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