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다룬 역사물이기도 하다. 영화가 맨해튼 프로젝트는 물론 이후 상황까지 미국의 핵폭탄 개발과 관련한 1940~50년대 역사를 다루지만, 핵심은 미국 원자폭탄의 아버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이다.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한 오펜하이머의 이야기가 개인사를 포함하여 전개된다. 핵폭탄 개발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요 축이지만,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휘말리게 되는 핵폭탄 개발 후일담을 비교적 상세하게 극화하였다. 전체적으로 오펜하이머 평전에 가깝다.
왜 오펜하이머인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며 “다양한 지점에서 오펜하이머의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 관객을 그의 감정적 여정 속으로 안내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이 영화의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닌 오펜하이머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원자폭탄 개발 성공 이후에도 이야기가 길게 이어진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건을 고증을 바탕으로 영화적으로 해석하여 보여주되, 그 사건에 휘말린 인간의 실존과 그 위기를 보여주는 게 아마 대충 상상할 수 있는 작법일 것이다.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가 “오펜하이머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도덕적 여정을 그려내는 것이 가장 까다로웠던 부분 중 하나였다”고 말한 게 그런 맥락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국내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란 제목으로 번역된 평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원제는 『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로, 영화 또한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영광과 고통을 그렸다. 원자폭탄 개발 이전과 이후가 각각 영광과 고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다루는 주요 시기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된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를 주요 무대로 한 1940년대, 1954년 오펜하이머 청문회. 오펜하이머와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1959년 청문회의 세 개다. 스트로스의 청문회는 흑백으로 그려진다. 컬러와 흑백을 번갈아 사용한 것만으로도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라는 인물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영화의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데에 비중이 높다는 사실을 관객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흑백 서사의 주인공 스트로스는 편협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권력욕이 강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컬러 서사와 전체 영화의 주인공 오펜하이머를 돋보이게 하는 핵심 장치이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은 놀란 감독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한 오펜하이머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연출로 이어졌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유롭고 열린 영혼의 과학자로, 국난의 시기에 조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한 애국자이지만, 기념비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매카시 광풍과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예컨대 스트로스 같은 사악한 인간들의 음모에 고통받은 오펜하이머. 그러나 그는 수모를 참고 견디며 원자폭탄 개발과 관련한 죄의식을 감당하려고 한다. 미래를 걱정하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렇게 형상화한 오펜하이머는 원작의 제목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일치한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세상을 구하고 자신은 고통받는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오펜하이머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이지 ‘인류의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어떤 영화나 문학이 보편적인 감동을 주는 요인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과 유사하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에서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듯이 보편적 감동을 주는 데 실패한 문학과 영화의 양상 또한 다양하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나쁘지 않은 영화이고,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흐름을 갖추었지만, 극장을 나서며 불쾌에 가까운 느낌이 남는 건 극중 오펜하이머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이기 때문이다.
놀란이 오펜하이머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한 것은, “미국 역사상”으로 수정하는 게 맞다. 놀란이 말한 “중요”엔 가치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공헌으로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이끄는 국가가 되었기에, 짧은 미국 역사에서 그를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는 인식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게 불가피했는지, 또 일본에 실제로 원폭을 투하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에 관한 역사적 가정은 다른 자리에서 할 일이다. 다만 원폭 투하로 미국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선 민간인을 포함해 수십 만명이 고향에서 숨진 것이 사실(史實)로 확인된다. 이후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대거 보유하게 되면서 인간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자멸할 수단을 갖게 됐다. 오펜하이머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고 미국 중심주의 시각에서 우길 수는 있겠지만, 세계 전체로는 그를 프로메테우스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놀란 감독은 관객이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대형 포맷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세상에 없는 65mm 흑백 IMAX 필름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CG 사용을 최소화하고 현실감 넘치는 비주얼을 추구한 놀란은 <오펜하이머>에서 ‘제로 CG’를 구현했다. 그는 “CG를 사용하지 않고 첫 번째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를 구현하는 것은 나에게도 거대한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놀란 팬 사이에서는 그가 <오펜하이머>를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실제로 핵폭탄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냐”는 농담이 돌곤 했다. 그만큼 놀란이 영화적으로 엄격하고, 장인정신으로 무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비교적 가까운 역사를, 그것도 대량살상무기와 관련하여 수십만 명이 사망한 사건을 극화할 때는 영화적 엄격성 못지않게 역사인식의 엄격성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놀란이 그린 오펜하이머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애국자이자, 놀라운 업적에도 부당하게 고통받은 영웅이며, 게다가 윤리적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의 고통을 기꺼이 수용한 양심적인 지식인이다.
평가와 별개로 누구나가 동의하는 사실은 오펜하이머가 미국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인류가 터뜨린 최초 원자폭탄의 개발 책임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트리니티 핵실험 성공후 케네스 베인브리지가 “이제 우린 다 개새끼야(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라고 적절히 성찰하였듯, 오펜하이머는 ‘개새끼’ 중에서 단연 최고의 ‘개새끼’이다.
오펜하이머를 영화 소재로 삼아 극화하는 데는 많은 방법론이 있었을 것이다.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내려면 그를 미화하거나 영웅화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의 감정과 도덕이 아닌 행위와 좌초를 냉정하게 그렸어야 했다. 영화를 만들 때 자국 중심주의나 조국애의 강조가 꼭 피해야 할 항목은 아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고, 때로 그런 영화가 세계인에게 보편적 감동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악한 역사의 한 장면을 단순하게 국가주의로 접근하는 것은 예술창작에서 피해야 한다. 세계적 거장으로 불리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놀란 같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100% 진실은 아니겠으나, 소설가가 아이디어가 고갈되면 역사소설에 눈을 돌린다는 얘기가 있다. 놀란은, 나의 개인적인 평가로 실패한 영화인 <테넷> 전후로 역사물을 찍었다. 그것만으로 놀란의 상상력이 고갈됐다고 예단할 수는 없다. 다만 역사를 영화로 만들 때는, 상상력에 의존할 때와 달리 역사의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기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
놀란과 무관할 텐데, <오펜하이머>의 한국 개봉일이 광복절인 것은 은근히 불편하다. 마케팅에도 기초적인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오펜하이머>를 항일영화로 보아서일까. 자력으로 해방되지 못한 우리 역사의 그늘을 은연중에 지적하는 통렬한 역사의식의 표출일까. 아무 생각이 없었으면 오히려 다행이다.
CG와 관련하여 한 마디 덧붙이자면 ‘트리니티’ 장면은 자료 화면을 활용하든지, CG를 쓰든지 하는 게 더 좋았다. 놀란이 선택한 화면은 극중 오펜하이머를 불의 신으로 만들 뿐이다. 또한 당연히 그렇지 않았겠지만, 세계인이 공유하는 악마적인 버섯구름을 일부러 회피했다는 오해를 자초하게 된다.
여담으로, 원자폭탄 실험 작전명이 트리니티였다는 사실이 상기되어 그 작명 감각에 다시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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