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는 어떤 영화인가. 제목이 뜻하듯 간단히 무덤을 파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천만 관객 돌파 영화’가 아마 가장 납득할 만한 분류이고, 통상 미스터리 영화로 보지만 여러 요소가 섞여서 장르 구분에 큰 의미가 없다. 가장 확실한 설명은 ‘천만’이란 숫자가 웅변하듯 상업영화이다.
일각에서 매도하는, 일종의 사회적 장르로 좌파 영화에 해당할까. 전혀 아니다. 좌우 구분에 기본 상식이 있다면 이 영화를 좌파라고 부르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 알 것이다. 물론 남북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의 한국 정치지형이 좌우 구분을 혼란스럽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통치 흔적과 친일파의 행적을 소재로 삼은 영화에서 좌파라는 단어를 연상하긴 힘들다. 과거 해방공간에서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하며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독립운동 진영을 좌파라고 매도하거나 공산당이라고 공격한 전철을 이 영화에서 밟아야 할 까닭이 있을까.
해방정국에서 친일파가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자신들에 해가 되면 모두 빨갱이라고 공격한 역사적 기억에 의지하면, 반일영화라고 할 이 영화를 좌파 영화라고 말하는 건 스스로 친일파, 혹은 아직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의 유산을 상속한 사람이라고 자인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정확히 말해 반일영화라기보다 반일 성격이 있는 <파묘>가 파헤친 기억에 불편할 이유는 친일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방하고 긴 세월이 흘러 아직 그게 불편할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꽤 많다.
좌파영화?
상업영화에 불과한, 즉 팩트로 정색하고 지적한 게 아니라 팩트의 언저리에서 재미를 찾아내 오락물로 제공한 <파묘>에 개봉 후 좌파 영화라는 말이 나온 건 제 발이 저린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반일이 불편한 세력이 있다는 건 의외다. 여기서 ‘반일’은 좁은 의미의 반일이다. 즉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는 어떠한 단서를 허용하지 않고 잘못된 사건이기에 그 사건에 국한한 반일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떠나서라면 일본은 좋은 우방이어야 하지만, 과거사와 관련해선 비타협적 반일이어야 한다. 그 반일은 일본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내부로도 향한다. 잘못은 잘못이다. 잘못을 넘어가 줄 수는 있지만,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고 우길 수는 없다.
당연한 전제를 다시 확인해야 하는 건 이 영화의 평가와 관련해서도 이 당연한 전제가 무너지는 사태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형식을 취하든 그 영화는 비판을 받아야 하고 개봉을 계획한다면 개봉이 취소돼야 한다. 반면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드는 건 언제나 얼마든지 가능하다. 평가는 오직 관객이 할 뿐이다.
<파묘>는 관객의 평가에서 살아남았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일제 치하 조선인의 친일을 묘지라는 공통분모로 묶어서 공포영화로 만들었을 뿐 사실 대놓고 반일영화라고 할 수도 없다. 소재는 소재이다.
이 영화는 연결된 듯, 연결되지 않은 듯, 두 개 파묘를 다루며 두 파묘를 하나로 꿴다. <파묘>의 핵심 단어는 ‘첩장’이다. 한 곳에 두 개 묘지가 존재하는 상황이다. 조선 시대에 일부 권문세가에서 왕릉에 조상의 묘를 몰래 만드는 식의 첩장이 있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를 믿는 사람들이 현대에도 드물게 그런 일을 행하는 모양이다.
영화의 첩장은 극중에서 나오듯 악지 중의 악지에서 이루어져 이례적이다. 이례적인 일의 의미를 찾아서 받아들일 만하게 또 재미있게 해결하는 게 감독이 해야 하는 일이다.
두 개 파묘가 결합됐지만 친일파의 파묘를 다루는 1부와 ‘오니’라는 정령이 나오는 2부로 나눌 수 있다. 1부는 공포물에 가깝다. 원혼은 현실세계에 작용하지만 물리적 실체로 그려지지 않았다. 2부는 떼어놓고 보면, 전형적인 분위기가 아니긴 하나, 액션어드벤처 인상을 준다. 오니 또한 물리적 형상을 갖춰서 나온다.
1부와 2부의 이러한 차이에 근거해, 두 파묘를 불연속성으로 파악하거나 전과 후가 다른 괴상한 영화라고 박한 평가를 내린 평론가들이 있다. 두 개 파묘는 각기 다른 맥락과 문법을 갖기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게 맞다. 연속성 또한 불연속적 연속성이어야 한다.
강화 양상을 뚜렷이 했다. 관의 크기가 다르고, 관이 놓인 자세가 다르다. 친일파의 묘는 평범하게 수평으로 놓였지만, 다이묘 정령인 오니의 묘는 더 크고 더 무시무시한 데다 수직으로 땅에 박혔다. 마치 못을 박듯 관을 세워서 묻은 데는 “여우가 호랑이 허리를 끊었다”는 풍수적인 고려가 있었다는 게 영화의 설명이다. 수직은 역사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수평은 우리 내부의 문제이며 아직 현재의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다.
더 크고 더 강한 관을 수직으로 몰래 박아놓고 그 위에 수평으로 친일파의 관을 묻은 구조는 현존하는 친일의 유산까지 포함하여 흥미로운 영화적 도식이다.
독립운동가의 오마주?
등장인물과 설정에 일제강점기 및 그 시기 독립운동과 관련한 내용이 많다. 주인공 4인방의 이름은 모두 독립운동가였던 김상덕(최민식), 고영근(유해진), 이화림(김고은), 윤봉길(이도현)에서 따왔다. 화림의 동료 무당 두 명 또한 독립운동가 오광심(김선영), 박자혜(김지안)와 이름이 같다. 보국사를 창건한 주지 스님의 이름은 원봉으로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을 떠올리게 한다.
상덕과 영근이 운영하는 사무실 ‘의열 장의사’는 의열단을 염두에 두었을 터이다. 상덕의 차량 번호 ‘49파 0815’는 광복절, 화림의 차량 번호 ‘19무 0301’은 기미년(1919년) 3ㆍ1운동, 영근이 운전한 운구차 번호 ‘경기 40바 1945’는 해방된 1945년을 연상시킨다.
친일파 집안인 박지용 어머니의 이름은 일제강점기 여성 친일파 배정자와 같고, 아버지 박종순은 을사오적 박제순과 닮았다. 박지용 또한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지용과 같은 이름을 차용했다. 역사에 존재한 친일파 이름을 쓴 1부의 파묘가 마무리된 다음에 일제의 본령을 형상화한 오니가 나오고 독립운동가 이름을 쓰는 4인방이 한 사람도 죽지 않으며 오니를 없앰으로써 파묘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두 차례 파묘는 이런 구도하에 진행된다.
우리 안의 친일과 친일의 뿌리를 모두 걷어내고 끊어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두 개 파묘를 순차적으로 배치한 것은 적절했다. 영화가 꼭 특정한 장르의 문법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우리 안에 잠재한 역사성을 정교한 노력을 기울여 부각함으로써 또 해원함으로써 천만 영화의 반열에 올랐다는 게 내 평가이다. 친일파 가문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지만 후손인 아이는 살려둠으로써 속 시원함과 아량을 동시에 성취했다.
이 영화의 핵심 모티브 ‘쇠말뚝’은 널리 퍼진 설이다. 일제가 한반도의 민족정기를 끊으려고 백두대간 등에 쇠말뚝을 일부러 박았다는 설은 근거가 희박하고 실제 측량용으로 활용되었다는 반론이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 “99%는 가짜”라는 고영근의 대사를 넣어 반론을 반영했다. 동시에 “그럼 1%는”이라는 김상덕의 대꾸로 일말의 여지를 남긴다. 1%는 실제 1%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실이며 설은 영화나 소설의 상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설 자체가 없어도 예술에서는 가공의 설로 어떤 형상화를 가능케 할 수 있다. 관객 사이에 널리 인식된 설의 활용은 흥행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정치적 의도?
“파내야 할 건 친일파의 무덤이 아니라 우리 안의 일본 트라우마”라며 어느 일간지에서 <파묘>를 한심하다는 듯 깎아내렸다. 우리 안의 일본 트라우마의 본질이 친일파가 아닐까. 지금 대한민국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일본 제국주의 지배의 직접적 흔적보다 제국주의에 빌붙은 친일파의 온존과 그 트라우마이다.
쇠말뚝 음모론을 재탕해서 진부하다는 소재 측면의 비판은 부적절하다. 소재 자체는, 참신하든 진부하든 전혀 상관없다.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참신하게 만든 영화와 진부하게 만든 영화가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 특정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했는가. 당연히 그렇다. 그렇다면 특정한 정치적 의도가 들어간 영화는 나쁜 영화인가. 사악한 것이 아닌 한 의도는 마찬가지로 중요하지 않다. 정치적 의도에서 ‘정치적’은 언제든 소재가 될 수 있다. 의도를 담아서 만든, 애매한 분류로 정치영화라는 게 있다고 해도 잘 만들었으면 영화고, 못 만들었으면 선전물이다.
따라서 감독이나 제작진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다.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냈다면, 그 안에 태산만 한 의도를 욱여넣어도 무방하다. 단, 영화의 결과물이 명백히 역사나 현실을 왜곡했거나 특정한 혐오를 조장했다면 그땐 따져보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선 학문적인 검증과 공론장의 토론, 필요하다면 제도적 여과가 있어야겠지만, 관객의 판단을 받는 게 비교적 타당한 해법이지 싶다.
장재현 감독은 “이쪽에선 꼰대라고 하고 저쪽에선 발랑 까졌다고 하는 구세대와 신세대가 힘을 합쳐 우리 땅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개운하게 뽑아내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친일파의 잔당이 집요하게 역사전쟁을 들고나오는 마당에 올바르게 친일의 트라우마를 뽑아내는 노력은 환영받아야 한다.
글 안치용, 사진 (주)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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