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이야기는 기독교인‧비기독교인을 불문하고 가장 널리 회자되는 성서 사건들 중 하나다. 요한복음 11장에서 12장에 걸쳐 제법 상세하게 기록된 이 사건은, 예수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능한다. 죽은 나사로의 살아남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더라”, 요한복음 11장 53절).
죽은 자를 살려낸 이 사건을 두고 크게 봐서, 애초에 나사로가 죽은 상태가 아니었다는 주장과 살려낸 것이 몸이 아니라 영이었다는 주장까지 성서의 기록에 반대하는 견해가 존재한다. 물론 이 이야기 자체가 꾸며낸 것이란 근본적인 회의가 존재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A.D 90년 무렵에 기록된 이 텍스트를 비(非)텍스트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라고 본다. 신앙을 떠나서 이 텍스트는 인류 정신의 공통 원천(源泉)이자 인문적 영감이기 때문이다.
이 영감이 어떻게 인류의 인문자산으로 구체화했는지는 대표적으로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년)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작품 <죄와 벌>에서 요한복음 나사로 사건을 문학적 내러티브로 성공적으로 또 감동적으로 재현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예수, (나사로를) 살린 예수를 죽인 나사로
“(나사로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란 성서 구절을 자구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비성서적 해석이지 싶다.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기 위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신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따라서 전혀 신적이지 않다. 여기서 말한 영광은, 결과적 영광이지만 현재로선 일종의 반어로 수난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수다한 측면에서 이중의 의미를 드러낸다. 예수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신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사랑한 사람(나사로)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인간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론 예수의 영광이지만 곧바로 십자가의 수난으로 반전된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 또한,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결정적 사건으로 번복된다. 기독교 교리상으로는 번복이 아니라 완성된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나사로의 부활이 예수의 부활로 중첩되는 가운데 예수가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하늘로 들어 올려진 반면 살아난 나사로는 기록에는 없지만 죽어서 땅에 묻힌다. 나사로의 부활은 영생으로 이어지는 부활이 아니라 죽음의 유예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죽음의 유예는 적잖은 의미를 지닌다.
이 사건은 (도스토옙스키에게 그러했듯) 여러모로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는데, 당장 살아난 나사로의 심경과, 이어 예수가 사랑한 그가 예수의 죽음을, 그것도 자신의 살아남이 계기가 돼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광경을 목도해야 한 숙명의 무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살려낸 신적 존재인 예수의 죽음 앞에서 나사로가 느낀 인간적인 비탄, 또한 신앙의 절망을 상상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그 노력이 그다지 성공적일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은 일상적으로 죽음을 목격하지만,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인간이 죽음을 목격하는 일은, 그중에서도 자신을 살려낸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드문 예에 속한다.
다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사로에게 밀어닥친 충격파가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리라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신 때문에 예수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죄책감이 당연히 있었겠지만 그것이 충격의 핵심은 아니다. 자신을 살려냄으로써 신(神)임을 증명한 예수가, 인간이 만든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죽어갔다는 황망함이 나사로를 충격에 빠뜨린 본질이다. 그러므로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만 있다면, 또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라도, 그런 나사로에게 예수의 부활은 필연이 된다. 최종적으로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예수의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획득한다.
이렇듯 나사로 이야기의 곳곳에서 반어와 중의(重義)가 돌출한다. 예수의 삶과 특히 죽음을 다룬 영화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악역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도 이런 현상은 동일하다. 가야바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와 함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두 주역으로 거론된다. 바야흐로 사태가 정점으로 치닫는 시점에서 나사로 사건을 보고받은 가야바는, 로마 식민지배하의 이스라엘 전 지배층이 “만일 그(예수)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고민하는 가운데 대제사장이란 자리에 걸맞게 단호하고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 즉 예수 살해를 제안한다.
성서에서 곧바로 설명되듯, 한데 이것이야말로 예수가 태어난 이유이자 계획하고 의도한 바였으니, 예수의 적대자가 예수의 길을 닦은 역설이 이루어진다. 그는 그의 일을 했으나 결과는 의도와 반대였다. 가야바는 당시 이스라엘 지배층 가운데서도 가장 세속적인 분파인 ‘사두개’파에 속했는데,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부활신앙을 거부하는 사두개인 가야바로 하여금 예수의 죽음을 주도하게 해서 부활의 디딤돌이 되도록 한 설정 또한 기묘하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나사로는 라스콜리니코프다
나사로 사건과 『죄와 벌』은 ‘평행’ 혹은 대응 관계다. 주로 자기 시대의 암울한 사회현실에 관심을 기울인 작품활동 초기와 달리, 후기의 도스토옙스키는 신성과 신비주의에 주목한다.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자신의 토양(土壤)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한 ‘토양주의’ 혹은 대지주의는 후기 도스토옙스키 사상의 일단을 표현한다. 여기서 토양은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원리를 말하며, 이런 ‘농민이상화’ 경향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민중주의 운동 브나로드와 궤를 같이한다.
논의의 본격적 전개에 앞서, ‘평행’ 혹은 대응과 관련해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신약성서의 나사로를 직접적으로 (물론 소설의 형식을 동원해) 재현했다는 나의 주장을 다시 확인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성서의 사건에서 나사로가 그의 이야기의 첫 장면에 살아있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자. 나사로는 죽지 않고 병이 들어 있다. 곧 죽음에 이를 병.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예수가)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있다고 예수에게 전갈을 보낸다. 성서 본문에는 없지만 병을 고쳐달라는 내용이 포함됐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신약의 예수는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역할 중에는 치유가 포함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리아의 마을 베다니를 향해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하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했겠나이다”며 안타까워한다. 이 안타까움에는 분명 일말의 원망이 섞여 있다. 저변에 깔린 나사로 두 누이의 원망은 자연스럽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이 큰 만큼 원망 또한 컸을 법하다. 성서에도 예수가 지체하는 동안, 나사로가 숨을 거둔 것으로 돼 있다. 여기서 사건의 흐름이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서 갈린다.
(예수) 불신자들에게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의 지체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들에게는 죽을병에 걸린 자가 죽는 게 당연하다. 예수가 늦게 왔다고 원망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은 예수시대 예수의 신자들에게 예수의 지체와 나사로의 죽음 사이의 관련은 확연하다. 불신자들의 사태파악과 달리 신자들은, 비록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지만 그가 숨지기 전에 예수가 도착한다면 예수로부터 기적의 치유를 받아 죽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따라서 늦게 온 예수가 야속하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의 확고한 증거다. 그러나 이 믿음은, 예수가 언급했듯 한층 고양돼야 한다. 치유의 기적 너머로 향해야 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 또한 병들었다. 그 병은 나사로와 달리 육신의 병이라기보다는 마음의 병이다. 몸이 죽을병에 걸린 게 아니어서, 성서와 달리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죽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병이 든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죽지 않고 대신 남을 죽인다. 성서시대 나사로 자신의 병사는 근대 라스콜리니코프에게서 타인살해로 바뀐다. 이 전복은 당연히 작가의 부주의로 일어나지 않았고,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역사인식과 시대 통찰이 반영됐다.
성서시대 유대인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었다. 질병 또한 그 병에 걸린 자의 죄와 관련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따라서 죄의 삯을 치르고 사망한 나사로를 예수가 살린 것은 종교적으로는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예수가 병자를 치유하며,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한 기록이 존재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죄의 삯으로 죽은 나사로는 죄의 용서로 살아났지만 다시 죽어야 하는 운명이다. 두 번째 죽음은 ‘편안한’ 병사가 아닐 수도 있다. 예수의 적대자들이 나사로를 살린 일로 예수를 죽이고자 하면서 동시에 나사로를 죽여 ‘증거인멸’을 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두 번 죽어야 하는 사람이 됐고, 실제로 두 번 죽은 나사로에게, 그렇다면 두 번째 살아남이 가능할까. 나사로에게 두 번째 살아남, 즉 최종적인 구원이 실현되려면 그가 인간 예수의 십자가 고난, 죄지은 인간처럼 혹은 죄지은 인간을 대신해 예수가 죽어감, 그리고 신으로서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특히 도스토옙스키가 산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서도 기독교의 가르침이 동일했겠지만 아마도 도스토옙스키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죄의 삯은 차라리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희망 없이 의미 없는 삶을 이어가는 동시대인과, 신이 숨어버린 그 고통의 시대에 대한 동정으로 라스콜리니코프는 병들었다. 따라서 사망을 구원이라고까지 말할 것은 없었겠으나 죄의 삯이라고 쉽사리 수긍할 수는 없었으리라. 라스콜리니코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삶은 죽음만큼이나 죄스러운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전통적인 문학비평에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지목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전당포 노파 살해는 현재 우리의 논의에서는 살짝 중심에서 비껴나 있다. 삶은 죽음만큼이나 죄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만, 어떤 관점에서도 그가 한 행위를 죄 많은 세상으로부터 (노파를) 해방하기 위함이라고 미화할 수는 없다. 정의와 구원이 얽혀든 이 장면에서 근대 러시아의 나사로인 라스콜리니코프는 동기가 불분명한 살인을 저지르는데, 이 노파살해가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의 살해와 등치돼야만 우리가 불러들이려고 하는 구원의 문법이 작동한다.
소설 속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인간이 나폴레옹 아니면 이[蝨]라는 이분법을 표명한다.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죄의식은 노파 살해 자체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나폴레옹이 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나폴레옹이 되지 못해 결국 이로 살아가야 하는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의 삯을 없애거나 줄이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품었으나 반대로 죄의 삯을 온존시키거나 증대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죄의 삯은 두말할 필요 없이 사망이 아니라 삶이다. 이[蝨]와 다를 것이 없는 인간군상의 삶.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구원받아야만 하는 사람이 된 (그리하여 버림받는 사람이 된) 데서 비롯한 이 분열이 라스콜리니코프가 앓는 병의 원인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 살해에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견해로는 그 행위가 자기살해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알았던 노파가 알고 보니 같은 땅 바로 옆에서 같이 살아가는 더구나 동류였다는 공포스런 자각.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신과 노파는 등가가 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지평에서 펼쳐진 라스콜리니코프의 이 심화하는 분열에다 도스토옙스키는 새로운 분열의 단초를 설정한다. 살해 현장에 예정에 없던 전당포 노파의 동생 리자베타를 투입함으로써 분열은 중첩돼 자연스럽게 십자가 형태가 된다. 나의 관점에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지각된 죽음의 무게는 전당포 노파보다 그의 동생 리자베타의 것이 훨씬 더 무겁다.
전당포 노파가 전기 도스토옙스키를 상징한다면, 리자베타는 후기 도스토옙스키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소냐와 같은 눈빛의” 리자베타는 구원의 제단에 바쳐진 무구하고 힘없는, 전형적인 희생양이다. 자기살해의 대체물 격인 전당포 노파의 죽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제사를 지내면서 자기 몸을 제사에 바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유일한 예외는 십자가의 예수뿐이다.
만일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억지로 가정한다고 해도, 전당포 노파 같은 죄 많은 인생은 희생물의 자격을 충족하지 못한다. 구원의 제사에 바친 희생양은 흠 없는 존재여야 하지 않겠는가. 리자베타가 딱 그런 존재로 그려진다. 바람직한 순환논법으로 리자베타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동류가 아니다.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는 제대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다. 예수의 희생양은 자기가 죽어서 남을 살린다.
이제 라스콜리니코프의 인간관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정치적인 횡단면에 종교적인 종단면이 교차하는 구조다. 수평적 인식에만 의존하면 세상이 나폴레옹과 이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 수직적 인식이 부가되며 라스콜리니코프의 시야가 트인다. 나폴레옹이 아닌 사람이 모두 이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소냐의 십자가를 목에 건 라스콜리니코프
『죄와 벌』 후반부에 “변증법 대신 삶”이란 구절이 나온다. 앞서 설명한 민중주의나 토양주의를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어떤 번역본에는 “변증법적 활자의 나열 대신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삶”이라고 돼 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변증법에 속한 사람이라면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여인 소냐는 삶에 속한다. 둘 다 나폴레옹이 아니다. 그러나 둘이 같지는 않다. 단순화해, 라스콜리니코프와 노파가 이라고 한다면 소냐와 리자베타는 이가 아니다.
소냐는 창녀이지만, 성서에 종종 등장하는 그런 음녀는 아니다.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가족을 자신의 몸을 팔아 부양한다. 소냐의 희생이, 소설 속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이자 소냐의 아버지인 마르멜라도프의 죽음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듯, 소냐 가족의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바꿀 수 없는 삶의 상황에 우직하게 자신을 던져 넣어 희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중적인 새로운 전환의 가능성이다. 라스콜리니코프를 당황케 만들며 종국에는 구원으로 이끄는 민중적 가능성.
보기에 따라 『죄와 벌』의 소냐와 신약성서의 마리아가 등치된다고 할 수 있다.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은, 마찬가지로 우직한 마리아. 도스토옙스키가 소냐를 창녀로 설정한 이유는 신약성서의 마리아에 관한 오래된 오해를 수용했기 때문이었을까. 성서의 마리아에 대해 오해와 오독이 많으나 마리아가 소냐의 모델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은 없으리라.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로 대표되는 말하자면 ‘토양주의’ 세계를 애초에 불신했다고 할 수 있다. 지옥도와 같은 현실의 삶 앞에서, 변증법의 세계에 속한 라스콜리니코프 류의 지식인들은 미치거나 분열할 수밖에 없다. 나폴레옹이 돼 세상을 전면 뒤바꿀 수도 있겠지만, 우선 나폴레옹이 되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가정해 나폴레옹이 됐다고 해도 나폴레옹이 돼 만들 세계가 지금의 지옥도보다 나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미친 세상에서 광인이야말로 가장 정상적인 인간이며 ‘자기살해’ 또한 합당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통해 토양주의의 세례를 받으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출구 외에 종교적 구원이란 전혀 다른 차원의 출구를 발견하게 된다. 소냐는 안내자다. 소설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죽인 리자베타, 소냐, 다시 라스콜리니코프 사이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진다. 리자베타가 매고 있던 철 십자가 목걸이가 소냐의 목으로 옮겨지고, 소냐의 목에 있던 나무 십자가 목걸이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목으로 이전된다.
리자베타의 죽음의 무게는 소냐에게로 가고, 소냐의 ‘대지의’ 삶이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이식된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죄의 고백을 들은 소냐는 제사장처럼 판결한다. “이 세상은 넓지만 지금의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지금 당장 네거리로 가서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 맞추세요. 그리고 큰 소리로 세상 사람 모두에게 들리도록 ‘나는 살인자올시다!’하고 외치세요.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구해 주실 거예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가 시키는 대로 광장에서 땅에다 입을 맞추고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아직 라스콜리니코프의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말하자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에 불과하다. 살아났지만 다시 죽을 운명인 나사로가 두 번 죽고도 구원과 영생에 도달하는 길은, 기독교 관점에 따르면 앞서 언급했듯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체화하는 것밖에는 없다.
종교적 각성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깨달았다, 만났다, 부르셨다 등과 같이 주관적이고 보어 없는 술어일 때가 많다. ‘너머’를 ‘이곳’의 용어로 표현하는 데서 오는 근본적인 한계다. 『죄와 벌』에서 마지막 구원의 장면 또한 그러하다. 노파 살해를 소설의 초반부에 일찍 배치한 후,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에 해당하는 장면을 길게 그려내고, 마지막에 아주 짧은 분량을 할애해 라스콜리니코프의 구원을 그린다. 그저 라스콜리니코프는 베개 밑 신약성서를 스스로 꺼내 읽는다.
물론 그 직전 단계로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의 소통과 합일을 보여준다. 그것은 상투적이지만 결정적이며, 최종적인 암시를 포함한다. “사랑이 두 사람을 소생시켰다.” 사랑!
나사로는 문학적으로는 라스콜리니코프이지만 도스토옙스키 자신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파란만장한 삶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는 실제로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이란 점에서 또 다른 나사로라 할 만하다. 1849년 봄에 그는 반체제 사건에 연루돼 다른 혁명가들과 함께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가 총살 직전에 황제의 특사를 받아 징역형으로 감형된 일화는 유명하다. 간발의 차이로 죽음을 모면한 뒤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때 사실상 한 번 죽었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을 지내고, 출옥 후 5년을 중앙아시아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10년 만인 1859년 말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귀환이 허락됐다.
20대 말에서 30대 말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시베리아에서 보내고 돌아온 ‘두 번 죽을 사람’, 도스토옙스키가 공상적 혁명가에서 슬라브적 신비주의자로 변모한 것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성서에서 예수가 나사로를 살린 시점은 죽은 지 나흘째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사자를 곧바로 장사지내는데, 사흘까지는 육신에서 영이 떠나지 않는다고 본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라는 말은 ‘완전히 죽었음’을 뜻한다. 예수가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가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치우라고 하자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됐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 또한 시베리아에서 완전히 죽어서 돌아왔다고 보아야 할 터이다. 누구라도 20대의 끝자락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30대의 태반을 시베리아에서 보내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40대 중반의 원숙한 도스토옙스키, 죽었다 살아난 그가 1866년에 쓴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성서의 나사로 이야기를 작가 자신의 경험과 버무려 형상화한 인물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죽음과 긴 소생과정,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을 대비하며 각성한 구원의 확신을 그려냈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분명 기독교 소설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구약성서 이사야 53장 5절)
『죄와 벌』은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 조건과 해방의 전망을 다루었다는 측면에서는 기독교 소설의 경계를 확실하게 벗어난다. 구원이든 해방이든, ‘너머’에 대한 추구 없는 삶을 존엄한 삶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이 명료하기에 이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확고하게 올라있지 싶다.
편집자주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는 “르몽드 북클럽 ‘금오문향’(금요일 오후, 문학의 향기에 빠지다)-안치용과 함께 하는 죽어서도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 100”의 매과정 결과물을 정리해 격월로 연재합니다.
100권의 세계문학 명저를 읽는 르몽드 독서스쿨 “금오문향”은 2달에 6권씩 모두 17개의 2개월짜리 과정으로 구성돼 34개월에 걸쳐 진행됩니다. 매주 한 권씩 미리 정한 책을 읽고 금요일 오후에 모여 토론회를 진행한 뒤 7번째 주에 특강을 듣는 ‘6+1’ 방식으로 각 과정이 이뤄집니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이 독서길잡이 겸 인문학 멘토로서 함께 합니다.
“금오문향”은 5~6월에 8과정 ‘붉은 농담’이 진행됩니다. 8과정은 ▲붉은 수수밭(모옌) ▲강철군화(잭 런던) ▲농담(밀란 쿤데라) ▲소피의 선택(윌리엄 스타이런) ▲바다에 사는 사람들(하야마 요시키) ▲버스정류장(가오싱젠) ▲특강(안치용)으로 진행됩니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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