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전기차 제조업체’라고 광고하는 A 기업의 미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투자했다고 하자. 그런데 사실 알고 보니 전기차의 ‘시동 버튼’ 부품 하나만 만드는 기업이었다면? 이처럼 ESG 경영을 지향한다고 말하는데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보다 과장해 포장하는 사기적인 마케팅 수법을 ‘ESG 워싱’이라 한다. 흔히 알려진 ‘그린 워싱’에서 파생된 용어로, 국내 산업 및 금융시장에서 ESG와 관련해 ‘그린 워싱’과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20일 서울 여의도 생활ESG행동 사무실에서 안치용 ESG연구소장의 사회로 진행된 생활ESG행동 라운드테이블에는 양춘승 ‘ESG Watch’ 준비위원장(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이 나와 ‘ESG 워싱(washing)’과 ‘그린 워싱(Greenwashing)’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ESG Watch’ 준비위원회에 참여 중인 문은숙 소비자정책연구소 대표가 자리를 함께했다.
축적된 에너지가 ESG로 수렴하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양춘승 준비위원장에게 최근 ESG 열풍을 어떻게 진단하는지를 물었다. ‘ESG’라는 용어는 2004년 UNEP FI(유엔환경계획 금융이니셔티브)의 보고서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환경, 사회구조, 거버넌스의 줄임말인 ‘ESG’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고, 2006년에 UNEP FI와 UNGC(유엔글로벌콤팩트)가 공동으로 UN PRI(책임투자원칙)를 제정했다. PRI는 UN이 지원하는 국제투자자 네트워크로, 6개 책임원칙을 이행하기 위해 협력한다. 원칙은 크게 투자의사 결정시 ESG 이슈 반영, 투자대상기업의 ESG 이슈 정보공개 요구, PRI의 충실한 이행으로 구분할 수 있다.
PRI에 가입한 금융기관은 2021년 1월 기준 3,615곳에 달한다. PRI에 가입한다는 것은 PRI가 제시하는 책임투자 원칙에 동의하고 이행을 약속한다는 의미다. PRI의 총자산 규모는 전체 서명 기관들의 운용자산을 합한 값으로, 2006년 6조5000억 달러에서 지난해 103조4000억 달러로 약 16배 증가했다.
최근 기업들은 스스로 ESG 원칙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자산운용사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는 2020년 연례 서한에서 “지속가능성이 반영된 대표 모델 포트폴리오를 제공하기 시작할 것”이며 “환경, 사회, 지배구조(ESG)에 최적화한 지수를 기반으로 투자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SGㆍ지속가능성을 대표적인 투자 모델 선정 기준으로 삼겠다는 선언이다.
ESG 이전에 주로 사용된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그 정의가 학자, 단체마다 달라 공통으로 사용되는 정의가 부재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힘들었다. 양 위원장은 “다소 애매한 개념인 CSR과 달리 ESG가 얼핏 그 내용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결 수월해 보이지만, 오히려 속을 파고들면 더 골치 아픈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 연탄을 제공하고 ‘사회적 책임’이라 이름 붙이는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이제 손쉽게 ‘책임’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불가능하다. 기업은 경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ESG 이슈를 제대로 알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목표를 세우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ESG가 표방하는 넓은 의미의 ‘지속가능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CSR뿐만 아니라 DBL, ISO26000, SDGs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됐다. “ESG 바람이 센 것은 단순히 그 개념 때문만이 아니라 세계시민적인, 인류의 노력이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됐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는 안 소장의 지적에 양 위원장은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결국 사람이 살 만하고 다른 생명체가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자는 ‘지속가능성’이 궁극적 목적이며, 그동안 이와 관련해 진행된 담론이 응축된 것이 ESG”라고 동의했다.
궁극적 목표는 ‘수익 극대화’… 변화는 없다
이렇게 수렴된 ESG 에너지를 바탕으로 투자자와 기업이 ESG 경영을 위해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양 위원장은 기업과 투자자가 ESG 경영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수익 창출이라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돈을 더 벌자는 원칙을 지키는 한 ESG를 표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ESG 워싱을 우려했다.
기업뿐 아니라 투자자도 투자수익 극대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재무제표를 확인해 투자 대상을 선정하던 때에는 단기적 수익 극대화가 목표였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주가 폭락을 예측하거나 대비하는 데 어려움이 있자 투자자들은 재무적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비재무적 요소에 주목했다. 당장은 재무제표에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미래의 유용성으로 이어질 ESG를 투자 기준으로 삼게 됐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장기적 투자수익 극대화일 뿐 큰 변화는 없다. 양 위원장은 “어떤 기업이나 투자자도 돈을 벌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돈을 벌지 못하면 존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인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수익 극대화의 유혹에 제동을 걸고 이를 이겨내도록 강제할 수 있는 건 시민뿐이다”라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ESG 이슈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런 만큼 ESG 워싱 사례가 많이 존재한다. ESG 워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반대하는 운동 사례 또한 상당하며, 국민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오레곤대학과 엔바이로미디어(EnviroMedia)가 함께 운영하는 그린 워싱 가이드, 테라초이스(TerraChoice)가 매년 발표하는 ‘그린 워싱 7가지 죄악(the sins of green-washing)’ 등은 모두 대중이 기업의 그린 워싱을 알아차리고 그런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지 않도록 직접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사례다.
한국에서 ESG 바람이 거센 만큼 이제 ESG 워싱을 적발하고 방지하는 시민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양 위원장은 강조했다. 양 위원장은 몇 달 전 ESG 전문가들과 함께 ‘ESG Watch’ 준비모임을 결성하여 매주 회의를 하며 하나씩 태세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독립성 보장’
‘ESG Watch’ 운영의 핵심은 독립성이다. 당연히 운영의 독립은 재정적 자립과 연관되어야 한다. 양 위원장은 “일반 국민의 도움이 필수적이지만, 가능하다면 독립성이 보장되면서도 공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받는 형태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ESG Watch’에 대한 법적, 제도적 지원이 국가경영에도 기여할 것이라 전망하며 “지금은 민간 영역에서 준비되고 있지만, 차기 정권이 공적 자본을 투입해 국가적 프로젝트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기업과 공기업의 ESG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민간기업의 ESG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불필요하다. 기업마다 놓인 상황과 중요한 ESG 이슈가 다르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획일적 기준을 정하는 것은 효율적이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양 위원장은 “정부 예산이나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거나 지원을 받는 공기업이나 공공단체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기준을 정하지는 않되, ‘ESG Watch’같은 독립적 기구를 통해 ESG 집행의 적정성을 감시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린 워싱, ESG 워싱 사태를 방지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감시 단체의 독립성 보장과 함께 기업의 투명한 정보공개와 합당한 감시체계 수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양 위원장은 “해외의 파트너들로부터 ‘한국에서 갑자기 ESG 열풍이 부는데, 진짜냐?’, ‘워싱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ESG 열풍에 가담한 이들 모두가 워싱이 아닌 것도 모두 워싱인 것도 아니지만, 외국의 인식이 부정적이어서 난감했다”고 말했다. ‘ESG Watch’가 본궤도에 오르면 난감함이 가실까. 양 위원장은 그런 기대를 품고 있다. ‘ESG Watch’가 한국의 ESG 열풍을 바람직한 형태로 안착시키는 데 바람직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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