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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세이지의 글을 읽고 타르콥스키를 떠올리다
스코세이지의 글을 읽고 타르콥스키를 떠올리다
  • 김경욱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1.09.30 1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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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영화의 시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에 기고한 글, ‘펠리니와 함께 시네마의 마법이 사라지다’의 도입부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의 번화한 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장면을 길게 묘사하고 있다. 그 거리에 늘어선 예술극장에서는 존 카사베츠의 <그림자들>, 클로드 샤브롤의 <사촌들>,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 같은 영화를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예술영화가 끝없이 펼쳐진 ‘영화천국’이라고 할만하다.

그런 풍경이 한국에 존재했던 적은 없으나, 가능성은 있었다. 1993년, 비록 ‘3당 합당’이라는 야합이 있었지만,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문민정부 시대가 도래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억압이 완화되는 가운데, 영화 분야에도 새로운 바람이 나타났다. 그 중 하나가 ‘예술영화 붐’이다. 그 시기에 1980년대 프랑스 문화원과 독일문화원 그리고 대학가 동아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영화광·씨네필(Cinéphile; 영화애호가)들이 영화판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으며, 이전 시대에 텔레비전 드라마보다 못한 삼류 취급을 받던 영화가 문학만큼 중요한 창작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금은 586세대가 된) 386세대가 삭막한 1980년대를 지나는 동안 쌓여갔던 문화에 대한 갈증을 영화를 통해 해소하려는 경향까지 더한 결과가 ‘예술영화 붐’이었다.

1995년 2월 25일에 개봉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마지막 영화 <희생>(1986)의 서울 관객이 11만 명을 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흥행 성공은 예술영화 붐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1997년의 외환위기 사태로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리고 살벌한 경쟁의 수렁에 빠지면서, 예술영화 붐은 만개하지 못한 채 시들어버렸다. 만일 외환위기 사태가 없었다면, 동숭동에서 종로를 거쳐 광화문에 이르는 예술극장 거리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현재 예술영화를 둘러싼 척박한 환경이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 아마도 지금 <희생>같은 영화가 개봉한다면, 관객 5,000명도 어려울 것이다.

 

펠리니와 타르콥스키의 차이

위의 글에서 스코세이지는 “영화의 대명사이자 영화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한 예술가”로 페데리코 펠리니를 꼽는데, 나는 <희생>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떠올랐다. 스코세이지가 언급한 것처럼, ‘영화가 콘텐츠로 축소되고, 영화산업은 비즈니스일 뿐이며, 영화의 가치는 벌어들이는 돈의 액수로 환산되는 가운데, 예술로서의 영화의 가능성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영화는 예술, 감독은 예술가’라고 철두철미하게 믿었던 타르콥스키를 되돌아보게 됐다.

또 스코세이지가 펠리니의 <8과 1/2>(1963)을 길게 설명할 때, 나는 타르콥스키의 <잠입자>(1979)가 생각났다. 타르콥스키에게 그런 생각이 있던 건 전혀 아니었겠지만, 

<잠입자>는 <8과 1/2>과 대비되는 영화다(두 편을 모두 보면, 예술에 대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의 시각차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시간의 각인』에서 타르콥스키는 ‘서구의 자유가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이기주의에 찌들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자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먼저 자기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내주는 것을 배우는 데 있다. 자유란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하는 것”(1)이라고 주장한다. <8과 1/2>과 <잠입자> 모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실감 나게 하는 예술작품으로, 말이나 글로 아무리 설명해도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스코세이지는 <8과 1/2>에서, 주인공 귀도가 영화 창작의 고통과 삶의 평화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추기경에게 “불행하다”고 호소하는 장면을 언급한다. 이때 추기경은 “왜 행복해야 하나? 당신의 임무는 그게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누가 말했나?”라고 답한다. 만일 귀도의 호소를 타르콥스키가 들었다면, ‘예술가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진정한 예술적 구상은 예술가에게 언제나 고통스럽고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이런 구상의 실현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목숨을 건 행동밖에 없을 것이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언제나 그렇게 해왔다”(2)라고 답할 것이다.

 

영화 <잠입자(Stalker)> 포스터

타르콥스키의 <잠입자>와 『시간의 각인』

<잠입자>는 타르콥스키의 영화 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영화인데, 여기서는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구역’이라는 공간이다. 구역이 어떻게 생겼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는 가운데 풀과 나무가 무성한 그곳의 풍경은 핵전쟁 또는 극심한 환경파괴를 떠올리게 한다. 구역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으며, 구역의 의지대로 작동할 뿐이다. 그런데 그 기이한 공간 어딘가에 ‘가장 내밀한 소원을 들어주는 방’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가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문제는 내밀한 소원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소원이 진짜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전 안내자였던 호저(豪猪)는 죽은 동생을 되살리겠다는 소원을 이루려고 그 방에 갔으나, 동생은 살리지 못하고 그의 내밀한 소원인 ‘부자가 되는 것’이 이뤄지자 자살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잠입자’는 호저처럼 사람들을 구역으로 안내하는 인물이다. 구역은 접근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공간이기에 안내자 없이는 누구도 그곳에 갈 수 없다. ‘세상에서 인간이 가진 유일한 것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잠입자는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봉사한다는 소명감으로 매번 목숨을 걸고 안내에 나선다. 잠입자는 과학자와 작가를 구역으로 데려간다. 과학자는 구역을 폭파하기 위해, 작가는 잃어버린 창작의 에너지를 되살리기 위해, 구역에 가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구역에서 온갖 위험을 거치는 가운데 원래의 목표 대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내밀한 소원에 대한 확신은 점점 사라지고 오히려 불안감이 점점 커진다. 그들은 마침내 그 방 앞에 도착하지만 끝내 들어가지 못한다. 타르콥스키는 “구역은 삶과 같은 곳으로, 인간은 이곳을 헤쳐나가다가 파멸하든지 아니면 견뎌내든지 한다. 인간이 견뎌낼지 아닐지는 그의 자존감에 달려 있으며,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을 구별해낼 줄 아는 능력에 좌우된다”(3)라고 설명하는데, 과학자와 작가는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만다.

 

영화 <잠입자(Stalker)> 스틸컷

안내에 나설 때마다 잠입자가 가지는 소망은 단 하나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예수’처럼 타인을 향한 사랑과 희생을 내밀한 소원으로 간직한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예를 들어, 지금 내밀한 소원이 코로나 사태의 해결인 사람이 구역의 그 방에 간다면, 작금의 코로나 사태는 해결될 것이다). 잠입자는 계속 좌절하면서도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안내를 계속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잠입자가 데려가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희망의 단서는 이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짧게 등장하는 잠입자의 아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온갖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는 그녀를 통해서, 타르콥스키는 이타적인 사랑과 헌신만이 현대세계에 만연한 불신과 냉소주의, 정신적 타락(뿐만 아니라 코로나 사태와 기후 문제 같은 전대미문의 위기)에 맞설 수 있는 ‘마지막 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술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인간에게 선한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인간에게 희망과 믿음을 주는 예술을 지지한다.”(4) 예술가로서의 운명에 책임을 지고 그 소명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부숴가면서 실천해 나갔던 타르콥스키의 주옥같은 말들이 척박한 예술영화의 시대에 날이 갈수록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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