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다는 것 가르친다는 것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부모님께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공부하라고 하신 적이 있냐고 말이다. 아이들은 쓰러지도록 웃었다. 그런 말 하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대부분 ‘너 잘 되라고’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부의 목적이 무엇일까? 배움의 목적은 무엇일까? 논어 학이(學而)편에서 공자는 배움이 삶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얼마 전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제천 간디학교 교가이다. 교가는 이어진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사랑하며 꿈꾸며 사는 것은 없는 길, 낯선 길이 맞는 것 같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이냐 물어본다. 아이들은 대답한다. 대통령, 의사, 연예인... 요새는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바뀌었다고 한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유퀴즈온더블럭’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떤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출연자는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
사회자: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어린이: 요즘은 어렸을 때부터 꿈 이야기 하시잖아요.
근데 전 꿈을 정하지도 않았거든요.
갑자기 꿈 얘기 물어보면 되게 황당하고, ‘꿈 빨리 정해’ 그런 게 제일 힘들어요.
꿈을 빨리 정하라는 게 힘들다는 어린이. 바로 전 ‘나에게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베이킹이 꿈이라 했던 어린이였다. 어쩐지 그녀의 베이킹에 관한 얘기는 재미있었지만 어설펐다. 지금은 낯선 길이 된 꿈을 꾸는 삶. 그렇다면 120년 전 우리 여성들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始通文)
1898년 이소사와 김소사의 이름으로 발표된 여학교 설시통문(여권통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독립신문, 독립신문 영자판에 실린 여권통문의 발기인 이소사, 김소사, 소사(召史)는 양민의 아내나 과부를 이르는 말로 이름이 아니었다. 이름도 없는 이들은 여권통문에서 여성이 교육받을 권리, 직업을 가질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했다. 여권통문은 최초의 한국여성권리선언문이다.
“‧‧‧‧‧‧‧어찌하여 사지육체가 사나이와 같거늘 이 같은 억압을 받아 세상 형편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모양이 되리오.
..이왕에 우리보다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들을 보면 남녀가 동등권이 있는지라. 어려서부터 학교에 다니며 각종 학문을 다 배워 이목을 넓혀... 그 학문과 지식이 사나이와 못지 아니 한 고로 권리도 일반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이제는 옛 풍규를 전폐하고 개명 진보하여 우리나라도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설립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어 각항 재주를 배워 일후에 여중군자들이 되게 하올 차로 방장 여학교를 창설하오니.. 구월 일일 통문 발기인 리소사, 김소사 ”
“여학교설시통문”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소사, 김소사는 특히 선진국(우리보다 문명개화한 나라들)이 남녀가 동등하게 교육받는다는 것에 주목하고, 우리도 여학교를 설립하여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주장했다.
이소사, 김소사, 그리고 또다른 이름 없는 소사(召史)들은 꿈을 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성교육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찬양회라는 여성단체를 만들고, 100 여명의 부인들이 관립여학교를 만들어 달라고 궐문밖에서 엎드려 상소하였다. 이어서 고종의 약속을 믿고 학교 설립을 실행에 옮긴다. 여학생 50 여명을 모집하여 1899년 2월 순성여학교를 개교하였다. 교장은 찬양회 부회장이었던 김양현당이었다. 하지만 정부에서 재정 부족을 이유로 들어 도와주지 않았다. 학교는 계속 되었지만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를 이끌었던 김양현당이 1902년 2월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자순당이 맡았다는 기록이 있은 후 순성여학교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들의 꿈은 실패한 것인가?
1886년 5월 30일 단 한 명의 학생으로 이화학당이 시작된 지 불과 십 여년 만에 발표된 “여학교설시통문”. ‘세계여성의 날’의 효시가 된 1908년 미국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참정권 요구 시위보다 십 년 앞서는 여성권리선언인 여권통문. 이소사, 김소사들은 지독한 성리학적 가치관 속에 살고 있었고, 여전히 이름은 없었으나 여학교 설시 통문을 발표하고, 여성들의 힘으로 학교를 세웠고,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삼 년여의 기간 동안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힘이 곧바로 이어지는 일제 강점기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역사의 주체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성독립운동가길
여성독립운동가길의 법정 도로명은 율곡로 3길 1~율곡로 3길 88이다.공예박물관부터 정독도서관까지 440m 구간이다. 이 길은 감고당길이기도 하다. 2020년 ‘여성독립운동가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이 부여되면서 감고당길과 병기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여성독립운동가길의 주인공은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1879~1955)인데 조선여자교육회와 근우회의 공적으로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일천만 여자에게 새 생명을 주노라
차미리사(1879~1955)는 17세였던 1895년에 결혼하였으나 1897년 남편이 사망하였다. 그녀는 상동교회를 나가게 되면서 ‘나는 시란돈 대부인 (스크랜튼 Mary F. Scranton)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여자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생각의 전환을 겪게 된다. 이후 1901년 중국을 거쳐 미국 유학후 1912년 귀국하여 배화학당의 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높아진 교육열에 비해 여성교육시설은 너무도 부족하였고, 더욱이 가정부인(기혼자)이나 학령기가 지난 경우 배울만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여성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배화학당 교사를 그만두었다.
차미리사는 3‧1운동 직후 종다리 예배당(종교교회)을 빌려 야학을 열었고,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가정부인들을 대상으로 부인야학강습소를 시작했다. 1921년에는 전조선 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전국의 가정부인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순회강연단은 7월 9일부터 9월29일까지 84일간 전국 67개 고을 1만여 리를 돌며 강연회와 토론회를 하였다. 순회강연단의 성공으로 1923년 부인야학강습소는 자체 건물과 ‘근화학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1925년에는 정규학교인 근화여학교로 인가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부인야학강습소에서 출발한 근화여학교는 조선 여성이 여성의 힘으로 여성을 위해 세운 최초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차미리사는 전체 여성의 약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구식 가정부인들을 대상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김미리사(차미리사)한테로 오너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 과부가 된 여성, 남편에게 압제받는 여성, 천한 데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여성, 뜨고도 못 보는 무식한 여성들은 다 오면 어두운 눈 광명하게 보여주고 이혼한 남편 다시 돌아오게 해주마. 그저 고통받는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여성, 1938년 7월호)
이런 순서로 걸어보세요.
안국역-서울공예박물관 (옛 풍문여고) – 여성독립운동가길 – 감고당터 표지석 (덕성여고 앞)- 서울교육박물관 - 헌법재판소 (재동 백송, 창덕여고 터, 박규수 집터)–경기여고터 – 안국역
글·김정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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