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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마>의 탁월한 복합성에 관하여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마>의 탁월한 복합성에 관하여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2.08.0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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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이해하기 힘들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자마>는 중심인물의 욕망과 서사를 중심으로 단순하게 요약해본다면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마>의 주인공인 치안판사 디에고 드 자마(다니엘 히메네즈 카초)의 소원은 단 하나이다. 이 남미의 오지를 떠나 가족들이 있는 곳과 가까운 레르마로 전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스페인 왕의 칙명으로 또는 총독의 권력에 의해 혹은 불가항력의 장력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전근을 원하면 원할수록 레르마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 칠수록 더욱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인물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극적이지 않을 뿐 수많은 영화에서 변주됐던 이야기 구조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강렬한 욕망을 지닌 인물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감정과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자마>를 감상하는 것에 무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른 한편으로 불투명하고 기이한 감흥으로 이끄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있음은 명확하다.

 

비현실의 사운드

<자마>가 불투명하게 느껴지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첫째 극적 효과를 배제하고 느릿하게 진행되는 리듬과 이야기의 파열을 일으키듯 끼어드는 기묘한 사운드의 몽환적 장면들에 있다. 둘째 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의도를 품고 있지만 단순하게 문명과 야만이나 식민지의 정체성, 죄의식에 대한 알레고리로 도식화하거나 온전히 수렴하지 않는 복합성에 있다. 이는 자마의 팔을 잘랐을 때처럼,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의 선명하고 선홍빛의 감각이 아니라, 죽지 못하고 늘어진 그의 육신에서 떼어내지도 완전히 붙어있지도 않는 검은색과 붉은빛 사이의 눅진한 피의 감각처럼 서사에 들러붙어 우리를 혼란케 한다.

이 불투명함과 혼란함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아래로 침잠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음울한 사운드트랙이 활용되는 장면들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이것은 영화의 초반부 상인 오리엔탈의 아들과 함께 처음 등장한다. 아이를 바라보는 자마의 오버 더 숄더 쇼트에서 기이한 사운드가 흐르는 가운데 아이는 자마에 관해 중얼거린다. 그가 선장에게 들었던 디에고 데 자마는 “늙어서 태어나 죽지 못하는 신이고 지독하게 외로워하지, 원주민의 집행자이자 검을 빼지 않고 정의를 집행하며 의무 뒤에 숨지 않는 정의로운 마음을 지닌 겁이 없는 자“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 장면의 의미는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다만 자마의 몸에 있었던 칼이 어느 순간 아이에게로 마법처럼 넘어가 있으며 아이의 말이 끝나고 넓은 쇼트로 바뀌었을 때 아이가 있던 자리에는 늙은 오리엔탈 밖에 보이지 않는 비현실적인 장면의 감각만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 장면 속 말의 의미는 곧이어 자마가 판사로서 행하는 행위들을 통해 쉽게 드러난다. 자마는 오리엔탈의 아이가 중얼거렸던 것처럼 칼이 아닌 정의와 공정함으로 판결하는 관료가 아니다. 그는 한 재판에서 권리증서와 같은 서류도 없이 가문 이름만으로 원주민의 자유를 뺏으려 하고 그것의 불공정함에 항의하는 보조 판사에게 원주민을 쓰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하냐고 윽박지르며 폭력을 행사한다. 또는 청탁을 위해 재무장관의 부인에게 접근하기도 한다. 즉 몽환적 사운드와 오리엔탈의 아이가 중얼거리는 장면은 일종의 자마의 바람이거나 혹은 현실에 없는 것을 정반대로 비추어 나타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무장관의 부인과의 첫 대화 장면에서도, 그녀가 자마가 곧 전근을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하는 자마의 시점 쇼트에서 디제시스 내부의 사운드는 줄어들고 벌레 소리와 기묘한 사운드가 확장되어 들린다. 또한, 도박을 하고 있는 총독에게 자마가 서신을 부탁하는 장면에서도 그의 시점으로 총독의 목에 걸린 비쿠냐 포르토의 귀를 만지는 비서의 모습을 비춘다. 음울하고 기묘한 사운드와 함께 역시 자마의 목소리가 아니라 타자인 비서의 보이스 오버로 중얼거린다. “비쿠냐 포르토는 죽었어” 전자에서 자마가 전근을 갈 것이라는 소식은 분명 자마의 바람이고 그것이 결국 실행되지 않을 것을 우리는 나중에 알게 되며, 후자에 비쿠냐가 죽었다는 보이스 오버 또한 결국 비쿠냐는 죽지 않았음으로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두 장면의 대사는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것이 발화한 것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자마가 앓아누웠을 때도 초현실적 분위기를 만드는 사운드와 필경사 페르난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밤이 되면 굉장한 소음이 들리면서 그것들이 나타나요. 그것은 둥근돌이에요 코코넛 같지만 돌로 되어 있고 그 안엔 귀한 돌멩이가 가득하고 아름다워요” 역시 앞에 나타났던 기이한 사운드의 장면들처럼 아무것도 아니며 가치가 없는 돌멩이가 귀하고 아름다운 무언가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없는 비현실에만 존재하는 무언가이다. 다만 앞선 장면들과 다른 점은 몽환적 사운드가 나오는 쇼트가 자마의 시점 쇼트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시점 쇼트 자체가 없다. 자마는 어둠 속에 묻혀 보일 듯 말 듯한 모습으로 흩날리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존재하면서 말이다.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의 변화는 대부분 실내장면으로 진행되는 전반부에서 자마가, 아무것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지만, 주체적으로 행동했던 모습과는 반대로 비쿠냐 원정대의 모습을 그리는 실외극의 후반부에서는 원정대, 원주민, 비쿠냐 무리에게 이끌려 다니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또한 실내극의 전반부에서 자마의 시점으로 보여진 몽환적인 사운드 디자인의 비현실적인 장면과 그 장면이 드러내는 그의 분열적 심리 묘사는 후반부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전반부의 배경이 된 장소란 유럽인의 공간도 원주민들의 공간도 아니면서 도시도 정글도 아닌 식민지의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정체성에 기반해 있는 반면 후반부의 정글은 오롯이 원주민들의 공간이자 유럽인들에게는 타자의 공간으로 명확한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마>에서의 기이한 사운드트랙과 동반된 말들은 도시와 정글 사이의 모호한 정체성의 공간에서만 나타나며 자마와 같은 유럽-백인-남성이 남아메리카 식민지에 투영하는 욕망을 최면적 연출로 투사하는 것이다.

 

<자마>의 복합성

그렇다면 <자마>는 탈식민주의에 관한 알레고리의 영화인가? 이것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이 영화가 불가항력의 장력에 의해 끝없이 실패하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디에고 데 자마는 불공정하고 비윤리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식민지의 관료이지만 동시에 레르마로 떠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한 인간이기도 하다. 그는 유럽-백인-남성을 은유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이면서 관료이기 때문에 왕의 명령으로 남미의 오지를 벗어날 수 없는 지배자이면서 피지배자인 복합적인 인물이다. 자마는 왜 레르마로 가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왕이나 총독과 같은 권력과 시스템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명확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단지 자마가 그렇게 운명지어졌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 구조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는 정치적 시선에서는 전복과 냉소의 대상이면서, 이야기의 시선에서는 운명 안에서 발버둥 치는 고전적 주인공이기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했던 몽환적 사운드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자마의 주체적 시선에서 대상화된 존재로의 변화를 드러내는 것은 이야기가 지닌 고전성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시선에서 영화의 후반부 정글은 단순히 유럽-도시와 대립하는 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불가항력의 운명에 속한 인간을 바라보는 초월적 시선의 자연-우주처럼 존재하게 된다. 원주민을 관리하는 공정한 관료도, 죽지 않는 비쿠냐도, 귀한 보석으로 가득찬 둥근 돌도 모두 허상일 뿐이라는 이야기의 결말은, 유럽인들이 저지른 폭력의 죄를 대부분 비쿠냐에게 전가한 것과 같이 탈식민주의적 알레고리를 숨기고 있기도 하지만, 자마가 관료가 아니고 비쿠냐도 비쿠냐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마와 비쿠냐의 대화에서처럼 인간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적 의미망 뒤의 실재를 드러내는 장치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마가 손이 잘린 채 아름다운 풍광의 스크린 저편으로 사라지는 엔딩의 이미지는 식민주의 유럽-백인의 말로나 처벌의 교훈보다 초월적인 저편 너머로 사라지는 신화적 결말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자마>는 제임스 그레이의 <잃어버린 도시 Z>(2016)처럼 문명과 야만의 도식성을 활용해 비문명을 낭만화하거나,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2014)처럼 역사, 정치적 기호와 소재를 무(無)화의 최면적이고 고양된 감각으로 향하기 위한 의미없는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다. 대신 팔이 잘린 채 늘어진 자마의 육신에서 떼어내지도 완전히 붙어있지도 않는 검은색과 붉은빛 사이의 눅진한 피의 감각처럼, 완전히 정치적 의미에서 미끄러지지도 딱 달라붙지도 않음으로서 정치적 알레고리를 잃지 않으면서 그 의미를 넘어 넓게 확장된 시선과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의식의 경계에서나 경험할 법한 몽환적 감각으로 함께 이끈다. 쉽지 않은 일이고 탁월한 성취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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