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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맘대로 용서하는가?
누구 맘대로 용서하는가?
  • 한성안 l 경제학자
  • 승인 2023.03.3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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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매우 철학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경제학은 이런 철학적 질문, 곧 존재론과 윤리론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철학적 질문에 대한 경제학파별 답은 서로 다른데, 이른바 ‘비주류경제학파’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며 ‘공익과 공동선’을 위해 산다고 대답하는 반면, ‘주류경제학파’는 인간은 ‘개인적 존재’며 ‘사익과 개인의 성공’을 위해 산다고 대답한다.

 

호모사피엔스는 사회적 존재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견해는 우리에게 대단히 익숙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된 이 비주류경제학의 존재론은 최근 진화심리학과 뇌과학의 연구성과로 속속 입증되고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인간이 대단히 강하고 자립적인 존재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갓 태어난 인간은 다른 동물 종(種)에 비해 결코 유능하지 않다. 말은 태어난 직후 혼자 걸을 수 있으며, 어류도 알에서 부화한 즉시 스스로 헤엄쳐 다닐 수 있다. 반면, 갓 태어난 인간 아기는 자기 팔다리도 제어하지 못한다. 일 년을 넘어야 비로소 걸을 수 있다. 그것도 ‘걸음마’ 수준이다!

정신도 육체와 다르지 않다. 여러 종의 동물들이 자기 몸을 제어할 뇌기능을 갖춘 상태로 알이나 자궁에서 나오지만, 인간은 자기 몸 하나 제어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 다른 동물들에 비하면 인간의 뇌는 그야말로 허접한 준비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취약한 신체와 뇌만 보면, 인간은 본래 진화에 성공할 수 없는 종이다. 

하지만 호모사피엔스, 즉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진화한 종으로 불린다. 왜 그럴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인간 종은 ‘사회적 존재’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한국인을 강제징용했음을 증명해 주는 문서인 ‘징용령서’(왼쪽)와 ‘징용고지서’ / '강제동원위원회' 발간 책자 「조각난 그날의 기억」발췌>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와 주위로부터 장기간 신체적 도움을 받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상 거의 20년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육체적으로 성장하는 셈이다. 부모는 영양과 안전을 마련해 주고, 집단은 다양한 차원의 ‘제도’를 제공한다. 아기 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려면 사회적 세계가 필요하다. 물리적 입력 자극과 생물학적 영양공급을 넘어, 아기들에게 주의를 끌고 말과 노래를 들려주며,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안아주는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사회적 입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사회적 도움 없이 온전히 발전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사회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다!

이런 사회적 입력과 사회적 관계가 이어지는 과정에 타인과의 강력한 유대관계와 공감능력, 그리고 친밀감이 형성된다. 이런 감정은 신뢰와 협력의 원동력이 된다. 네안데르탈인과 같이 강하고 똑똑한 인류가 번성하지 못할 때 약하고 허접한 호모사피엔스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신뢰와 협력에 출중했기 때문이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사회적 존재가 취할 윤리론은 이제 분명해진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회적 존재인 호모사피엔스에게 ‘공동선’과 ‘공익’ 말곤 다른 답이 있을 수 없다. 호모사피엔스는 사회와 함께 살아간다!

 

주류경제학의 사생아, 기회주의자

주류경제학자들은 이 과학적 명제를 부정한다. 이들은 인간을 ‘개인적 존재’라고 답한다. 이들에게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존재이기도 하다. 개인적 존재에게 사회가 존재하지 않듯, 이기적 존재에게 공동선과 공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이기적 욕망이 최고선인 것이다.

그런데 사회를 발견하는 순간, 이기적 존재의 태도는 달라진다. 이기주의가 ‘기회주의’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기주의와 기회주의는 다르다.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기주의는 타인의 존재를 반드시 전제하지 않지만, 기회주의는 그렇지 않다. 타인, 나아가 ‘사회’를 전제하지 않고 기회주의는 관철될 수 없다. 기회주의는 모두가 사회적 존재일 때, 그리고 사회 안에서만 효과가 발휘되는 행동방식이다. 기회주의자의 구체적 행동전략은 ‘기만’과 ‘배신’이 되는데, 그것은 기만하고 배신할 대상인 타인과 사회 없이 구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기주의자와 달리 기회주의자는 사회를 외면하거나 떠날 수 없다. 사회 안에서만 배신과 기만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 이런 ‘평범한’ 기회주의자들은 어디서나 존재한다. 기회주의자는 주류경제학의 필연적 사생아며, 주류경제학도 포용해 줄 수 없을 정도로 유별난 호모사피엔스다!

기회주의자가 사회를 악용하는 방식이 기만과 배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수준을 좀 넘어서는’ 기회주의자가 취하는 방식인데, 바로 용서와 관용이다. 기회주의자의 용서와 관용은 쉽게 어울리기 힘든 조합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기회주의자들 사이에 그런 조화는 드물지 않다.

먼저 기회주의자는 ‘자신’을 잘 용서하고 자신에 대해 무척 너그럽다. 철저한 기회주의자는 그런 용서와 관용을 별다른 심리적 부담 없이 스스로 잘 해낸다. 그러나 그게 잘되지 않는 기회주의자도 있는데, 이 경우 그는 외부주체의 힘을 빌린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기억해 보자. 아들을 유괴한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면회까지 간 신애(전도연)는 신 앞에 이미 회개해 용서까지 받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살인자의 평화로운 얼굴과 마주한 후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만다. 아이를 잃은 어미 대신 신이 용서의 주체일 수 없으며, 용서의 주체는 오직 신애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개의 달인’으로 불릴만한 이런 기회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 사이에 특히 많다.

더 기괴한 방식으로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기회주의자도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용서와 관용은 통상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이뤄지는 행위다. 더 구체적으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피해자가 이 과정을 주도한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용서와 관용의 기본 철학이다. 따라서 가해자가 용서와 관용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피해자의 동의 없이 ‘제3자’가 나서 이 과정을 주도할 수도 없다. 그건 주제넘는 일이다.

더욱이 ‘가해자의 가해행위로부터 직간접적 이익을 얻은’ 제3자가 이 과정을 주도한다면 뻔뻔스러울 것이다. 하물며, 그런 제3자가 ‘피해자의 동의도 없이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를 용서하고 관용한다면 기괴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입이 딱 벌어지고 실로 억장이 무너지는 광경이리라. 주제넘고, 뻔뻔할 뿐 아니라 기괴한 기회주의자며 실로 ‘슈퍼 소시오패스’다!

 

무자격자 윤석열의 ‘용서’

 

<소녀상과 나란히 선 강제징용 노동자상 / 출처=뉴스1>

요즘 국민의힘과 윤석열이 딱 그런 격이다. 주류경제학의 사생아인 기회주의는 사회를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사회적 관계를 악용한다. 기회주의자에게 배신과 기만은 일상이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배신과 기만은 그들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배신과 기만의 경제사학이다. 친일파와 매국노들은 이를 신봉하는 ‘평범한’ 기회주의자들이다.

국민의힘이 매국적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적지 않은 그 당의 정치인들이 친일파의 후손들이다. 예컨대, “썩어 문드러졌기 때문에 나라 망했다”라는 정진석의 조부모 정인각은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부터 1928년까지 계룡면 서기, 1929년부터 1942년까지 충남 공주군 계룡면장을 지내며 친일행위를 했던 인물이다. 

<뉴스파고>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정인각은 재직 시 군용물자 조달 및 공출 업무, 군사원호 업무, 여론 환기 및 국방사상보급 선전업무, 국방헌금 및 애국기 헌납자금 모집업무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支那事變功勞者功績調書)에 이름이 올랐던 인물이다. 그의 아들 정석모는 천황폐하께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집권 시절 1961년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장으로 시작해, 내무부 차관, 충남도지사, 10~15대 국회의원과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일가는 자손만대 호의호식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정진석은 국민의힘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부여잡고 조선이 썩어 문드러져 망했다고 변명하지 않으면,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알고 보면 윤석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1967년 일본문부성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히토쓰바시대학교에서 유학했다. 통상 한국의 유학생들은 자신이 공부한 나라에 대해 강한 친밀감을 느낀다. 유학하는 나라의 국가기관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정도면, 그 나라의 문화는 물론 역사관도 공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욕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사람 없고,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욕할 사람도 없다. 그가 일본을 찬양하며 존경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뉴라이트연합이 개최한 ‘한반도평화를 위한 시국선언’에 윤기중이 서명자로 참여한 건 우연이 아니다. 뉴라이트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주자다. 

윤석열은 이런 일본의 은혜를 입은 가문에서 교육받고 자랐다. 그에게 식민지 근대화론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진리다. 식민지근대화론은 기회주의의 경제사학이자 경제학이다. 그런 경제사관과 경제학에서 배신은 자연스럽고 권장할 만한 덕목이기도 하다. 기회주의자에게 사회만큼 중요한 공간은 없다. 사회 속에서 비로소 기회주의가 효력을 발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기회주의는 사회 속에서 배신을 일상화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런 기회주의자들의 정신적 안식처다. 

하지만 기회주의는 용서와 관용을 동원하는 수준으로 진화한다. 게다가 더 기괴한 기회주의자는 피해자 동의 없이 가해자 대신 관용을 베풀고 용서를 구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보존한다. 사실상 이 기회주의자는 ‘가해자의 공범’이다. 앞에서, 우리는 이런 기회주의자를 ‘슈퍼 소시오패스’라고 불렀다.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의 어떤 동의도 없이, 이들을 대신해 가해자를 용서하는 윤석열의 행동은 주제넘고, 뻔뻔하며, 실로 기괴하기까지 하다. 주류경제학은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으로도 설명이 안 된다. 그를 훈육한 일본 문부성 장학생 아버지 윤기중보다 더한 처사다. 

누구 맘대로, 무슨 자격으로 가해자를 용서하는가? 사회를 악용하지 않고 ‘사회와 함께 발전하는 비주류경제학의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글·한성안
경제학자. 문화평론가.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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