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실험엔 까닭이 있다”
대체로 가외의 장치나 별도의 문법을 동원한 영화적 실험에는 나름의 이유가 동반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구태여 잉여의 촬영/편집기술과 비용, 그리고 고단위 노동을 투입할 필요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 불필요한 낭비를 자행하는 것 그 자체에 의의를 두지만 않는다면야 말이다. 그렇다면 <염력>의 실험적 호명을 눈여겨 볼 까닭 역시도 충분하다. 영화는 그 도입에서부터 곧장 티브이 프로그램이라는 다분히 '익숙한' 매체형식을 텍스트 지면 속으로 주저함 없이 불러들인다. 그리고 곧이어 이 친숙한 것의 예측하지 못한 개입이 도리어 어색함의 감각을 배가시키는데 충실히 복무한다. 별안간 왜, 도대체 어째서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매우 중요하다. 은연중 나타나 연속적인 사유의 흐름을 중단시키거나 탈구시키는 모종의 장면들이야말로, 텍스트 면면에 걸쳐 제 흔적을 은밀히 이입하고, 나아가 영화 고유의 의미와 가치에 독특한 질감을 덧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의도적으로 선택된 장면들인 셈이다.
본 영화의 경우라면 아마도 두어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테다. 우선 표면적으론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가 우리네 실제현실과 그리 동떨어져있지 않음을 간단히 일러두기 위한 방편으로써 봉사하리란 점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그와 더불어 갑작스레 (영화의 서두에 난데없이 등장한다는 점만으로도) 낯선 느낌으로 호소해오는 본래 친근한 것이, 필시 관람객의 감각을 사로잡는 어떤 기묘한 정서를 촉발시킬 것 역시도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친숙한 낯섦이 과연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을까? 먼저 정서의 혈관 속을 흐르는 내용을 좀 더 분명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소위 '정보통' 류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의 골자는 청년 신루미[심은경 분] 양의 화려한 성공담을 다룬다. 허나 사실 그녀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플래시와 스포트라이트는 잠시잠간 번뜩이는 관심일 뿐이다. (그건 아마도 자본의 흐름이 요청하는) 필요에 의해 드리워졌고, 또 용무를 다한 후엔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릴 찰나의 시선에 불과하달까. 제 주인이 맡긴 소임을 다한 카메라 조명이 마침내 반짝이던 눈을 모르쇠로 감아버린 이후, 얕게나마 머물던 온기가 빠져나가 한층 더 싸늘하게 식어버린 냉담한 상황은 '현실의 참혹한 무게감'을 점층적으로 배가시킬 따름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염력>은 부정적인 지금-여기의 사회적 현주소를 그저 영상의 문법을 빌려 고발하기 위한 정치적인 영화에 해당하는가?
“예술과 사회, 그리고 정치적인 것”
지금으로선 ‘그렇다고’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무어라고 성급하게 예단하기에 하기에 앞서, 실제 영화의 지면 속으로 한 발 더 깊숙이 들어서는 수고를 무릅써야만 할 테다. 영화는 철학책이 아니다. 결코 직접화법의 기술방식에 기대지 않는다. 만일 텍스트의 탱탱하고 윤기 나는 살점들에게서 피어난 논리가 아니라면 결국엔 먹을 것 하나 없는 뼈다귀로 전락하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부득불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조금 더 일반적인 이야기로부터 운을 뗄 필요가 있겠다. 분명 예술은 현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어떤 진공의 상태에서 홀연히 출현한 메시아적인 예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예외란 건 없다. 프로이트가 작고한지 어언 80년이 된 지금의 시점에서 설마하니 창작자만의 배타적이고 순수한 자기-동일성을 주장하는 일이라든지, 더 나아가선 바로 그것을 예술-자율성의 근본동력으로 성급하게 등치시키는 작업이란 사실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돼버리고야 말 테다. 확실히 창작자는 개별자이지만, 그렇다고 단독자는 아니다. 그는 나-공동의 존재로서 사회적 개체다. 특수는 특수이되 보편 속 특수일 따름이다. (2)
이처럼 작자와 사회가 묶여있다면 마땅히 그 작자의 손에서 피어난 예술 역시도 사회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 해서 예술이 사회의 단순한 반영물이 (심지어는 부산물이) 된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결코 아니다. 확실히 예술은 (발생론적인 맥락에서) 사회의 손을 거절할 순 없지만, 한편으론 전적으로 사회에 압도되지도 않는다. 이에 관해서는 예술이 '다르게' 읽기/보기를 스스로의 생명력을 구성하는 동력이자 기본적인 테크놀로지로 삼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수 있을 테다. 말하자면 기존에 틀지어진 경계선을 넘어서고 초과하려는 충동과 에너지를 늘 머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단 뜻이다. 예술은 자신을 꽉 눌러 담아두려는 사회를 늘 횡단하고 돌파하려 시도한다. 이처럼 예술과 사회 사이에선 방향과 결을 달리 하는 두어 가지 힘이 항시 길항하고 있다.
두 힘의 상반된 작용으로 인해 결국 사회와 예술은 서로 '느슨하게' 손을 맞잡은 형국이 된다. 물론 매번 (매번의 예술적 실천마다) 포개진 손의 온도와 악력은 항상 다르다. 그렇기에 마주잡은 손아귀의 성긴 틈바귀에서부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 꿈틀대며 흘러나올 수 있게 된다. 만일 좀 더 정교한 언어로 번역한다면, 예술은 세계를 '나름의 방식으로 형상화한다'고 말해 볼 수도 있을 테다. 그러니 단순하게 예술이 (얼마나) 정치적인지를 물어보는 일은 그다지 효용이 없다. 연역적인 원리나 절대적 척도를 한 결 같이 뒤집어씌우는 것도 무효하다. 그 대신 각각의 예술작품들이 독특하게 형상화해놓은 세계의 결을 감각적 인식을 통해 경험하고 감식해봄으로써, 비로소 원하는 대답을 잠정적으로나마 얻어낼 수 있을 따름이다. 영화 역시 (여기서 영화란 비단 장르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낱낱의 예술텍스트로서의 영화일반을 지시한다)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장치를 동원하여 세계의 모습을 나름대로 형상화해낸다.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고선, 다시금 영화 <염력>에 관한 논의 속으로 회귀해보도록 하겠다.
“초능력, 예술적 형상화 작업의 중추”
만일 어느 영화가 정치적인지 나아가 어떻게 그리고 과연 어디까지 정치적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마땅히 그 영화가 어떤 방법과 장치를 동원하여 세계를 형상화내고 있는지 감식해보아야만 할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살피건대, 본 영화 <염력>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 형상화 요소이자, 한 발 더 나아가선 차라리 그 예술적 형상화 자체의 구심점이라고 지목해봄직한 것이 곧 '초능력'이라는 사실 만큼은 아무래도 부인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반복 강조하자면 초능력이 영화적 세계를 끈덕지게 견인하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능력이 발생한 최초의 기원적 시점, 시전자의 (마치 성장서사를 연상케 하듯) 좌충우돌 끝에 그 능력이 제 역할과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 이후로 목적에 합당하게 충실히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 또한 초월적 이능을 위협하는 현실적 위기요소의 틈입, 마침내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이며 그 결말까지. 텍스트의 종착역에 가닿기까지의 노정에서 마주하는 낱낱의 굵직한 정박점들이 온전히 초능력과 함께 어우러져 묶여 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초능력이 곧 영화의 이정표라는 말도 그리 틀리지만 않을 테다. 또, 그렇게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면 초능력이란 다분히 상상적인 장치의 개입이 텍스트 속에서 과연 어떤 구체적인 효과들을 촉발시키고 있는지 그 면면을 세심하게 따져 볼 필요 역시 충분하다. 소위 영화의 정치성이라는 게 그 작업의 결과로 자연히 감지될 수 있는 소여로서의 산물을 지시함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금도 어렵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가령, 항공기에 자동차의 엔진을 장착할 순 없다. 항공기용 엔진을 탑재했기에 비로소 항공기가 항공기로 기능할 수가 있다. 항공기의 기능은 창공을 가르고 초고도의 공간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바로 그 항공기 엔진과 동력 공급 시스템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염력>의 세계를 지탱하는 것이 정말로 초능력이고, 초능력에 의해서 영화 텍스트가 어떤 독특한 정치적 성격을 머금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나아가 사실이라면) 초능력이 관계하는 생생한 현장들을 그리고 그것이 빚어내는 낱낱의 효과들을 살펴보는 작업일랑 당연히 요청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초능력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서 걷기”
먼저는 초능력이라는 이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무엇’과의 힘 대결에서 패하게 되었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여기, 바로 이 지점에서 초능력은 대결의 대상이 가진 능력의 압도적인 크기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써 봉사하게 된다. (대기업으로 표상되고 있는) 이 대상은 사실 혼자 작용하는 게 아니다. 굉장히 촘촘한 권력관계의 네트워크에 '이미' 연루돼 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이러한 권력의 망상구조 그 자체가 폐제라는 수식어가 매우 어울린다고 할 만큼이나, (자기-바깥 외부의 간섭을 불허하는) 견고하고 치밀한 짜임새와 구성을 '벌써' 취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3)
가령 그 조직의 말단부엔 철거대상으로 선정된 상가의 주민들과 경합하는 소위 삼류 인력소가 놓여 있다. 이들은 동일하게 하층민에 속하는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동류를 해하는 마리오네트 인형임을 자처한다. 허나 사실 그들 스스로도 다른 이의 목적달성을 위해 더 큰 힘의 손아귀에 들려진, 매우 편리하고 때로는 처리마저 손쉬운 도구로써 철저하게 이용될 따름이다. 한편 그물망의 중간 즈음은 초인간적인 이능을 국가적 공동체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적대요소로 아무렇지 않게 탈바꿈하는 언론이 웅크린 자리다. 나아가, 이 네트워크의 최심층부에선 군경의 힘을 스스럼없이 동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결탁과 공모가 은밀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전반에 걸쳐 빈 곳 없이 거미줄을 쳐두고서 인물들을 위협하는 서슬 퍼런 권력의지와의 대결 앞에선, 설령 초능력의 소유자라 해도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진 못한다. 그 역시 현실 사회 속의 존재임을 부정할 순 없는 까닭이다. 보편에 속한 허다한 특수들 중에서 ‘조금은 특이한’ 존재로서 간주될 따름이지, 특별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다. "한국형 히어로"라는 비아냥거림, 그리고 "노예면 노예답게 기라는" 협박이 그런 점을 여과 없이 잘 보여준다. 이처럼 가뿐히 초능력의 역량을 능가하는 광범하고 입체적인 권력 또 그것으로부터 자행되는 폭력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여과 없이 현시해주는 점에서부터, 이제는 영화가 들끓는 정치적인 욕망을 상당량 머금고 있노라고 큰 무리 없이 추론해 볼 수도 있을 테다.
“초능력의 자기살해, 왜 하필 영화를 깨물까?”
더불어 초능력으로 인해 유발된 텍스트지형의 파열과 뒤틀림에도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쉽게 번역하자면 이는 "어째서 초능력이 사라지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라고 집약할 수 있겠다. 분명, 초능력의 기원은 나름대로 선명하다. 기원이 분명하단 건 동시에 그 목적이 확실하다는 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초능력이 아버지[류승룡 분]에게 깃든 건, 결과적으로 인력소의 용역들에 의해 루미의 어머니[김영선 분]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정확히 그 시점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병원 침상 곁에 놓인 심전계의 그래프가 수평선을 자아내는 바로 그 순간, 외계로부터 유입된 물질이 약숫물에 흘러들어 습합되고, 이른 아침 그 약수를 마신 신씨가 자연스레 이능을 얻게 되었다는 설정이다. 이에 관련된 첨언은 작중에서도 이루어진다. 어떻게 능력을 얻게 되었냐는 변호사 김정현[박정민 분]의 의문에 대해, 아버지는 아마도 '루미 엄마가 보냈다'는 어조로 무심결에 뇌까린다.
두 장면을 전체 영화의 흐름 속에서 아울러본다면, 적어도 아버지의 초능력이 딸 루미가 처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녀를 구원하라는 명목으로 주어진 능력이란 점은 거의 확실해진다. 실제로도 초능력은 오롯이 루미와 루미의 주변인들을 구출하고 보호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런데 그들 대신 주모자를 자처하여 만 4년의 형기를 채우고 나온 아버지에게, 여전히 초능력이 남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란 건 과연 뭘까. 그 자신의 말을 빌려올진대 어찌하여 초능력은 "녹슬지" 않았어야만 하는 걸까. 루미가 이미 성공적인 자립을 일구었고, 머잖아 정현과의 결혼까지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상당부분 개연성을 잃게 된다. 더 나아가 루미의 가게 이름이 "초능력 치킨"이라는 점에까지 가닿는다면 텍스트의 서사지형 자체가 완전히 일그러지는 지변이 발생하게 되고야 된다. 설마 (딸이 닭을 튀기고 아버지가 이능을 부려 한갓 맥주잔을 나르는) 초능력 치킨이라니. 결국엔 정치성을 망실하고 유머가 가미된 휴머니즘으로 경도하겠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그렇게 보긴 좀 어렵다. 성급한 판단을 가급적 유보하고, 한 발 거리를 두고서 살펴보는 편이 오히려 적절할 듯싶다. 먼저 간단히 일러두자면 필자는 감독이 일부러 텍스트 지형을 뒤틀어놓은 것이라고, 충분히 고의적인 선택이었노라는 주장을 내세우고픈 것이다. 영화는 예술이지 사회학이나 정치학 논문이 아니다. 영화가 겨누는 정치성은 허망한 관념적 논쟁의 자리에 놓여있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생생하게 약동하는 일상적 삶의 무대 속으로 호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전제해 두고서 살펴 볼 필요가 있으리라. 일견 비상식적인 것처럼 다가오는 서사지형의 일그러짐은 영화에 대한 관객의 막연한 '동일시를 지연시키는' 효력을 발생시킨다. 물론, 그 외에도 텍스트 중에서 여러 번 등장하고 있는 희극적 요소들이 봉사하고 있는 측면 역시도 그 효과 면에선 마찬가지의 특성을 취한다.
순간순간 영화와의 동일시가 지연될 때마다 관객들이 회귀하게 되는 자리는, 자신들이 발 딛고 선 지금-여기의 실제현실이다. 물론 곧바로 영화적 경험의 현장 속으로 다시금 스스로를 기투하려고 시도하겠지만, 여하간 매번 단절과 재-매개 사이의 틈새공간에 기입되는 게 삶의 무대라는 지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환언하자면 동일시의 해제는 관객들로 하여금 단순히 수동적으로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무대를 그 위에 겹쳐 읽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사실 그 뿐만은 아니다. 특히 <염력> 속에선 망상의 구조체로 작용하며 존재자들을 짓눌러오는 거대한 폭력의 무시무시한 무게가, 코믹하거나 어이(개연성) 없는 요소들에 의해 일정부분 감쇄됨으로써, 도리어 정치적인 것을 일상적 영역 속으로 큰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사유할 수 있는 가능조건 역시도 제공해준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혹, 폭력의 경량화를 통한 정치의 일상화 가능성이랄까.
지연된 영화적 동일시와 폭력의 경량화가 아울러 만들어내는 협주곡은 아마도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세계에 대한 보다 생생한 이해를 확보하도록 돕는 것과 더불어, 좀 더 예민하게 벼려진 정치적 감각 및 공적인 삶에 대한 선명한 인식을 갖도록 능히 견인해줄 터이다. 영화와의 조우가 제공하는 강력한 추체험의 동력에 의해, 영화관을 들고 난 이후의 존재가 조금은 다른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술회한다면, 어쩜 과도한 해석을 부여하는 셈일까? 하지만 충분히 그럴 여지도 있으리라고 본다.
“실패한 재현이 영화의 살을 곪게 하다”
영화가 모든 면에서 '완전할' 순 없다. 아니, 완전하단 언어 자체가 애초부터 허구이며 가상일 테다. 완전 또는 완벽이라는 개념규정은 도대체 언제 어디의 누구로부터 근거한 것인가? 특별히 예술엔 이러한 잣대를 가져다 댈 수가 없다. 아니, 애당초 원리적인 측면에서부터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편이 좀 더 옳은 대답일 테다. 이미 상술한 바와도 같이 예술은 목전에 당면한 틀거지를 깨부수고 돌파하려는 잠재적인 추동력을 자신의 근본적인 동력원으로 취하는 까닭이다. 눈앞을 막아선 틀이 일면 긍정적인 성격을 지향하는 것이라 해도, 심지어는 '정치적인 올바름'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해도, 오롯이 절대적인 율법임을 자처하며 예술에 대해 사형을 언도할 자격까진 거머쥐지 못한다. 그렇담, 예술은 완전함보다는 차라리 다양성의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특정 관점에 입각해 영화를 읽는 일이야 얼마든 가능하겠으나 (그리고 해석의 다양성은 가급적이면 어떤 의미에서든 존중되어야 하겠으나) 한편으론 이 '가능성'이란 어휘가 '규범성'의 이름으로 전화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여야만 할 터이다. 끊임없는 경계가 필요하다. 나의 자유가 혹 누군가가 펼친 사유의 길목을 막아서지 않도록 말이다. 허나 그럼에도 필자는 즈음해서 사유의 날개를 잠시잠간이나마 접어둘 것을 요청하는 바다. <염력>에 대해 한 가지 다소 아쉬운 점을 논해야만 할 당위에 직면한 까닭이다. 이는 다른 누군가의 해석에 제약을 걸겠다는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필자의 눈에 비친 영화 자신의 주장과 관련된다. 영화가 내세우는 내적 입장을 스스로가 약화시키고 있다는 모종의 혐의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텍스트가 지향하는 전체적인 방향으로부터 진행의 궤도를 탈선케 하고, 나아가 특유의 진취적인 기상과 걸음을 퇴보시키는 요소를 찾아 끄집어내어 엄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자갈들을 한 데 가지런히 치우고 보면, 본래의 길의 모습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것은 분명하다.
요지부터 간단히 일러두자면 이는 '인물들을 재현하는' 문제와 관계된다. <염력>의 경우 몇몇 인물들이 재현되고 있는 양상이, 의심의 여지없이 영화의 정치성을 갉아먹고 후퇴시키는 부적인 작인으로 기여하고 있단 뜻이다. 특별히 태산그룹의 홍상무[정유미 분]와 아버지 신석헌을 같은 위상공간에 놓고 대비해보는 작업은 문제의 결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데 무척이나 유의미할 것이라고 본다.
홍상무는 힘의 '대리자'다. 권력 네트워크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태산그룹의 힘-의지를 대신 '표상해주는' 존재로 현상된다. 그녀가 석헌에게 "우리는 노예일 뿐이"라고 그리고 "국가 그 자체가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며 뇌까리는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듯, 홍상무 스스로도 자신을 단지 집행자 내지는 대리자의 위치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녀를 굳이 '전형적인 악녀'의 모습으로 재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는 괜한 딴지가 아니다.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태산그룹이 갖는 광범하고 강력한 역량을 묘사하는 데엔 전연 부족함이 없었을 테다. 실제로 그녀의 무례하고 오만방자한 행동이 환기시키는 분노는 (적어도 일차적으론) 그녀가 대리하는 거대한 권력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녀의 목젖을 겨냥하며, 단지 "X년"이라는 모독적인 언사를 내뱉고 싶은 욕동만을 강하게 자극할 따름이다. 위의 미지항에 '미친, 썅' 등속의 저급한 언어들이 무리 없이 어우러질 수 있을 것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분노를 촉발시킨다는 것까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허나 변태적인 재현방식으로 인해 '분노의 적절한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게' 돼버린단 점이 문제가 된다. 자신의 감정의 길이 뻗어나가는 길을 가늠할 수 없는 존재는 꽤나 수동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관객의 정치적 주체성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복무하게 된다는 힐난은 괜한 시비가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본질적으로 배역의 배역다움을 강조하는 것과도 별반 무관하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가 없다. 요컨대 단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대역으로 내세운 애처로운 희생양으로 전락하게 될 따름이다.
보다 중요한 지점은 홍상무의 표상이 아버지의 표상과 같은 위상공간 속에서 아울러 엮어지게 될 때 선연하게 드러난다. 이른바 '극단적인 명암대비'가 아주 비정치적이고 케케묵은 서사도식을 자연스레 소환하는 장치로써 기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아버지 신석헌이 탁월한 존재는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미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타인들과의 관계맺음에서도 실수가 꽤나 잦고, 또한 초능력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고스란히 쏟아내어 보여주기도 하는 조금 나사 빠진(naive) 존재다. 그러나 소위 마블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그런 화려한 영웅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초능력을 등에 업고서 구원자를 자처하는 존재는, 그리고 일정 부분이나마 그 위업의 성과를 거두어내는 이는, 확실히 아버지인 그다. 설령 딸 루미가 그보다 훨씬 강한 성품과 의지를 가졌다고 한들 끝내 석헌의 시혜 없이는 결코 생존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터이다.
악녀와 구원자. 두 존재를 대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도드라지게 되는 것은 오래된 이데올로기 도식이다. 낡아빠진 전통의 서사 체계가 의구심 없이 환기된단 뜻이다. 물론 고의적이라고 말할 순 없을 테다. 집단적 무의식에 각인된 공동기억의 파편을 적절한 비판적 고찰 없이 있는 그대로 호출하여 불러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묵과하고 넘어갈 순 없다. 단지 거울 앞에 욕하기 정도로 간주하기엔, 영화가 애써 예리하게 벼려낸 정치적 감각의 날을 무디게 만드는 발목잡기의 요소가 될 것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까닭이다.
조금 더 무리수를 둔다면, 특별히 본 영화에만 국한시킬 문제만은 아니다. 차라리 사회 참여적인 영화 작업을 계속해서 구상하고 또 실행해 온 연상호 감독이, 부디 한 번 즈음은 스스로를 돌이켜볼 만한 지점이라고 조심스레 첨언하고픈 바다. 과거 흥행에 성공한 그의 영화 <부산행>에서도 근사한 재현의 문제가 보란 듯이 개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지나칠 수만은 없을 터이다.
아주 간단히만 밝히자면, 영화의 말미에서 성경[정유미 분]과 수안[김수안 분]은 터널을 경계로 하여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어렵사리 좀비들의 늪을 헤쳐 나왔음에도, 그들 눈앞에 놓인 터널 너머의 시공간은 실상 새로운 희망을 제공하는 세계라기보다는, 여전히 문제적 상황을 초래했던 (직접적이진 않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공조의 혐의를 피하기 어려운) 권력 시스템이 동일하게 상연되고 있는 장소이다. 여기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건, 터널 바깥에 서서 그녀들의 생사여탈권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있는 군경들로부터 두 사람이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할 수가 있다. 혹 수안이 '아버지'를 추억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기성 권력의 사살 명령에 의해 돌연히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 터이다. 이를테면 감독 연상호에게서 그녀들은 주체적인 단독자로 서기보다는, 타자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또 승인받아야만 할 존재들로 재현되고 있다. 반대로 군인/남성들은 구원을 베풀거나 허용하는 존재로서 표상된다. 이는 애당초 상화[마동석 분]와 석우[공유 분]가 두 여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존재로 현상됐음을 상기해본다면 혹 과도한 해석이란 비판을 충분히 피해갈 수 있을 테다. 정말로 문제 삼을 만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세 가지의 다른 상상력 중에서”
연상호에게 남겨진 과제는 오롯이 그가 끌어안을 화두로서 남겨두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염력>에 관한 논의로 회귀해본다면, 설령 미진한 점들이 어느 정도 내포돼 있다 할지라도,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가치가 아무렇지 않게 폄훼될 수 있는 건 아님을 반드시 기억하여야만 할 터이다. 필자도 처음엔 그랬듯이 혹자는 여전히 영화의 작품성에 대해 다분히 냉소적인 문제제기를 감행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텍스트에 등장하는 비개연적인 요소라든지 또는 휴머니즘과 코미디와 정치물을 이리저리 넘나드는 이종혼합적인 특성들에 대해서만큼은, 앞서 진술한 바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해명이 되었으리라고 확신한다. 혹 감독이 영화적 문법과 구성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는 (상식선에서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혐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야, 적어도 그것들은 충분히 의도에 입각한 것이라고, 그러니까 예술적 형상화를 효과적으로 도모하겠다는 지극히 자연스런 맥락에서 동원하게 된 적극적인 기법과 장치들이라고 간주해 볼 수 있겠다.
이젠 상상력에 대해 논함으로써 글을 맺고자 한다. 상상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노라고 필자는 믿는다. 첫째는, 각박하고 무거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탈주적 상상이다. 달리 말하면 도착증적인 나르시시즘으로의 피신이라든지 또는 현실과는 무관한 모종의 가상세계를 그려 놓고선 그 속으로 도피하려는 형세라고 말할 수가 있을 테다. 둘째는 기원상 일단 현실에 발 딛고 있기는 하되, 현실 그 자체를 단숨에 전복하고 갈음할 대체제로서의 새론 세계에 대한 공상을 여전히 꿈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알튀세르 이전 초창기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꿈꾸었던 공산주의적인 유토피아의 이상 정도를 그 사례로 제시해 볼 수가 있을 테다.
마지막으론 현실의 무대 속에 스며들어와 계속해서 꿈틀거림으로써, 세계가 운동하는 흐름과 방향이 정형화되고 정식화된 경로를 따라 물화하지 않도록 제동을 걸고 방해하는 종류의 상상력을 떠올릴 수 있겠다. 혹은 지금-여기의 세계지형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지속-변화시키는데 적극적으로 간여하는 어떤 (낯선) 이물감의 틈입이라고 번역해 볼 수도 있을 테다. 이런 이물감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받아들여지는 일체의 의미작용을 중단케 하고, 그것 속에 은폐된 숨은 메커니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나아가선 새롭고 더 나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도록 존재자들의 의식과 정서를 끊임없이 추동한다.
<염력>의 초능력은 과연 어떤 종류의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을까? 적어도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우라고 말하기란 조금 어려울 테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텍스트의 가치를 지나치게 편리하게 저울질하며 단정 지으려는 갖은 시도와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볼 만한' 영화라는 판단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글 읽기를 위한 참조]
(1) 친숙한 낯섦이란 말은 두려운 낯섦으로도 번역되곤 하는데 썩 적실한 번역은 아니다. 아마
영어단어인 uncanny를 옮긴 까닭인 듯싶다. 본디 프로이트가 사용한 용어에도 두려움이라는 정서가 묻어 있긴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다. 독어 unheimlich를 파자하면, ‘집 같지 않은’ 정도가 된다. 사실 두려움보다는 마치 집과 같이 친숙하고 익숙한 것에서 예기치 않은 낯섦의 감각을 지각하게 될 때,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이질감을 지시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여기서 무의식과 리비도에 대한 설명으로 구태여 진행할 필욘 없으리라고 본다)
(2) 자기-동일성은 자기-관계적인-동일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좀 쉬운 표현을 동원한다면 자기충족감과도 상당히 비슷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이를테면 자기존재가 어떤 균열 진 부분이나 이음매의 느슨함 없이 꽉 짜인 정형성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다. 혹은 특정한 상태 하에서의 내가 (진정한 또는 완전한) ‘나’라고 믿는, 그러니까 확실성을 가진 항상성의 주체상태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확신이라고도 번역해 볼 수 있겠다. 이는 이미 내가 기원적인 시점에서부터 타인들에게 연루된 존재란 사실을 인지하는 지점에서 깨어진다. (사실 사회라는 개념을 끌고 오면 ‘완전한 나’ 외에도 ‘정상적인 나’라는 허상이 포개어지지만, 꽤 복잡한 도식을 필요로 하기에 여기에선 별도로 언급하지 않겠다) 좀 더 일상적으로는, 병에 걸려 통증을 앓는 동안 자기동일성의 개념이 허구란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터이다. 아도르노를 위시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서부터 빈번하게 사용되던 자기동일성 개념은 오늘날 라깡 지젝 계열의 정신분석에서도 중요한 개념이며, 사회이론을 새롭게 쓰길 꾀하는 푸코의 후예들이라든지 발리바르를 위시한 일련의 정치철학자들, 네그리 이하의 자율주의자들, 또한 장-뤽 낭시와 같은 실존적 현상학자들 (필자는 문학적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칭함), 주디스 버틀러나 가야트리 스피박을 위시한 정체성 정치이론가들에게도 (용어의 부정적 어감은 논외로 하고) 그 사유의 출발지가 되는 대단히 주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다.
(3) 폐제라는 용어의 원어를 분석하면 fore와 close라는 두 어원으로 분할되며, 이를 축자적으로 풀 경우 ‘미리-닫혀’ 있다 내지는 ‘이미-닫혀’ 있다는 뜻이 된다. 비교문학의 광범한 학제들과 (페미니즘을 위시한 범-젠더이론 및 탈식민주의 등속의) 현대 문화이론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요즈음 인터넷에서까지도 왕왕 회자되는 대중적인 언어들을 통해서 설명하자면, 가령 ‘기울어진 땅’이라든지 ‘유리바닥’ 등의 표현들을 사례로 제시해볼 수가 있을 테다. 사전에 작용하고 있는 폭력과 금지의 메커니즘이 (감추어져 있다가) 우리의 활동영역 중에 비로소 개입해온다는 뜻이다. 물론 극복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용어는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 문화연구가 지향하는 종착역은 몇 겹이 켜켜이 엮어져 있어 처치 곤란한 폐제의 뭉텅이에 다가설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아내는 것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을 테다.
글·남유랑
평론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 및 201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다른 영역들과는 달리 '과연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감당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려고 늘 고민하는 중이다. 요컨대 비평의 비평다움 내지는 비평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문제의식이 삶의 중요한 화두다. 더불어 정치철학적 거대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연대적 구원과 대안적 혁명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예술’에 관해 치열히 사유하는 노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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