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거장 장 피에르 주네와 마르크 카로가 공동 연출한 <델리카트슨 사람들>. 이 작품은 1991년 4월 프랑스에서 개봉한 후 약 1년 뒤인 1992년 5월에 한국에서 개봉했다. 당시는 한국의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씨의 정권 말기로, 이는 10.26 사태, 12.12 군사반란, 5.17 내란, 5.18 탄압, 4.13. 호헌조치의 핵심 인물 전두환 씨가 군부정권을 물려준 직후이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바로 직전인 시기였다. 공교롭게도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의 내용은 그 시기에 딱 맞아떨어진다. 언제 봐도 공포스럽고도 통쾌한 그 이야기는 가상의 디스토피아적 공간에서 펼쳐진다.
델리카트슨은 폐허가 된 세상, 식량이 부족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식인 풍습이 자연스러워진 기괴한 시대의 어느 낡은 건물에 있는 푸줏간이다. 온갖 성격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건물에 어느 날 전직 서커스 광대 출신의 뤼종(도미크 피뇽)이 푸줏간 주인 클라펫(장 클로드 드레이퍼스)의 광고를 보고 방문한다. 거기서 우연히 클라펫의 딸 줄리(마리로어 더그나크)를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 가까워 진다. 한편, 클라펫은 지속적으로 뤼종을 죽일 음모를 꾸미지만 그는 매번 위기를 모면한하고, 이 상황을 감지한 줄리는 지하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 사이 푸줏간 델리카트슨 건물의 세입자들은 굶주림에 지쳐 클라펫과 루이종을 죽이려 방을 나서는데......
이 작품에서 델리카트슨은 고기를 파는 푸줏간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델리카트슨의 주인 클라펫은 그 공동체를 이끄는 수장 즉, 리더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클라펫이 델리카트슨 건물 세입자들의 민심을 얻는 방법은 단순하다.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 즉, 사람들이 원하는 육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델리카트슨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세상은 어둡고 눅눅한 절망이 도사리는 디스토피아로, 그 어디에서도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고기를 어디서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육식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환경에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육식을 포기하거나 동족포식 외에는 없다.
이럴 때 과연 '인간'이라면 무엇을 일반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또 '보통의 사람'이라면 무엇을 정상적인 것이라 여길까? 사실 동족포식은 동물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것을 누구도 정상적이라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델리카트슨 사람들> 속 푸줏간 주인 클라펫과 세입자들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즉, 클라펫은 고기를 선택하고 세입자들을 선동해 뤼종을 죽이려고 계략을 꾸미는 것이다. 영화를 이를 통해 잘못된 리더십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거나 거기에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의 왜곡된 충성심을 비꼰다. 리더라는 자가 약자를 의도적으로 유인해 도륙하는데도 주변 사람들이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만 바라보고 있다면 먼훗날 역사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의 결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33년 전 먼 나라 프랑스에서 구축한 이 영화적 상상력은 44년(혹은 45년) 만에 계엄령이 선포된 지금의 한국에서 현실화되었다. 국민이 대표권을 부여한 바로 그 한 사람의 오판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충격에 빠진 것이다. 12.3 비상계엄은 계엄령을 선포한 당사자의 말과 달리 사실상 명분도 없고 다분히 불법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법학자들로 구성된 (사)대한법학교수회(회장 백원기 인천대 법학부 교수)의 성명에도 잘 드러난다. 해당 성명에서 이 단체 소속 교수들은 12.3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당사자에 대해서 "비상계엄의 요건을 구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선포를 자행한 행위는 대한민국 헌법과 헌정질서를 파괴함으로써 고의적으로 내란을 일으키고 그 직권을 중대하게 남용한 행위"라고 규정하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12.3 비상계엄령 사태를 둘러싸고 하나둘 드러나고 있는 진실을 마주하면서 국민들은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과 그 이후에 밝혀지고 있는 여러 정황을 종합할 때, 이번 12.3 비상계엄 사태는 지금, 이 순간에서의 평가로만 끝나지 않고, 역사 속에 남아 길이길이 평가될 수밖에 없다. 진심 어린 사과와 냉정하고도 단호한 결단만이 살 길이다.
글·윤필립
영화평론가, 응용언어학자. 한국어교육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담화분석과 대중문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교육원을 수료했으며, 무궁화 스토리텔링 공모전 동화 입선,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기독교 영화 비평 대상 수상,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 등을 했다.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심사위원 및 영평상 집행부 등을 역임했으며, 반석산 시네마 콘서트 등에서 진행과 영화 큐레이션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정회원으로, 르몽드 코리아, 영화의 전당, 경기일보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세종사이버대학교 초빙교수 및 한국어교육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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