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흐와 텍스트의 오르가슴과 심도 기법
고흐의 그림을 표지와 날개로, 본문의 배경으로, 그리고 권말에 수록까지 한 이 책의 제목은 『세계문학 오디세이아: 광인의 복화술과 텍스트의 오르가슴』(안치용 지음, 2023)이다. 앞뒤 표지와 날개를 장식한 4개의 그림은 ‘죽음의 무도’ 회화 속 해골을 연상시키는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1885), 장마철 장대비가 퍼붓는 아를의 밀밭을 그린 <빗속의 밀밭>(1889), 묵묵히 씨를 뿌리는 아를의 농부를 그린 <씨 뿌리는 사람>(1889), 그리고 고호의 “적극적인 멜랑콜리”를 연상시키는 알브레이트 뒤러의 <멜랑콜리아>(1514)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강한 눈빛의 날개달린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절망적인 멜랑콜리”를 상징하는 볼품없는 여인의 벗은 웅크린 몸을 그린 <슬픔>(1882)이다.
“우울의 광휘”를 열망한 고호의 그림을 독서의 전희와 배경 뿐 아니라 후희로 여운을 남기는 편집은 고흐의 영혼을 동반자로 한 세계문학 오디세이아가 연출한 “텍스트의 오르가슴” 기법 뿐 아니라 독자의 사유를 심화시키는 텍스트의 심도 기법으로도 매우 성공한 전략이다. 긴 장맛비로 이미 수족관 속 “가라앉은 물고기” 신세가 된 독자를 “침어 중의 침어” 고흐 그림이 발산하는 멜랑콜리의 매력을 이용하여 심도 깊은 “텍스트의 바닥으로 가라앉혀 의미와 감성, 나아가 모종의 통찰에 침윤하게 만드는”(10) 데 매우 효과적인 편집 방식이다.
2. “댄더링”(dandering) 오디세우스
이 책은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설, 연극, 영화, 철학, 신학, 과학, 비평과 이론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스위스, 벨기에, 노르웨이, 체코, 루마니아, 튀르키예, 러시아, 벨라루스, 중국, 일본, 호주, 알제리,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콜롬비아, 페루 등 20여 개국 작가들의 작품들 중 “누구나 동의하는 세계문학 고전”을 100편 가까이 선정하여 “종횡무진 휘저어 탐색”(10)하는 ‘세계문학 오디세이아’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저자는 자신의 선정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전제로 한 것임을 확신한다.
이에 대한 검토와 이의 제기에 앞서, 일단 선장 오디세우스가 승선에 앞서 승객에게 동감과 교감, 그리고 긴 항해를 함께 할 수 있는 동료애를 요구하며 내민, 16개의 목차들과 세부 항목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여정 안내(Itinerary)는 단박에 동승을 결정하게 할 만큼 도발적이다.
이 책처럼 모더니즘의 도래를 선언한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1922) 또한 장르는 다르지만 서양문학의 고전 중의 고전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BC 8세기경)의 틀을 빌려와 쓴 소설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를 향한 10년간의 ‘방랑(Wandering)’을 다뤘다면,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이 1일간 펼치는 더블린 ‘산책(Dandering)’을 다뤘다. ‘Dandering’은 조이스가 Dance(춤, 춤의 패턴과 리듬)에 블룸의 ‘Wandering’을 결합한 조어다.
이 책의 저자 오디세우스 또한 세계문학의 대해를 “종횡무진 휘저어 탐색”한 것이 아니라 “사랑, 근대, 구원”이라는 주요 모티프 사이를 오가며 추는 춤의 리듬과 스텝의 동력으로 16개의 반복과 변주로 구성된 오디세이아를 만들어낸 것이다. 앞표지 그림, 고흐가 “장난삼아 그린 그림(Joke)”의 불붙은 담배를 깨물고 있는 해골이 상징하듯 이 책은 죽음의 무도, 그 근대 버전을 추고 있다.
3. 모더니스트 오디세우스의 근대의 주체 탐색
이 책의 주인공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신의 피조물에서 주체가 된 근대인이다. 신적인 존재로 격상된 것 같은 근대의 주체는 이성이 자신의 신성을 인증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 이성은 신성을 인증하기보다는 “인간의 원초적 고독과 존재론적 한계, 인식론적 분열”(70)을 일깨워주어 오히려 자신이 “한없이 허약한 주체”(28)임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이 책은 이런 “신성의 세계를 탈출한 근대의 주체”(22)가 겪는 실존의 위기, 그의 “이성적인 호소에 대한 불합리한 세계의 침묵”(110)이 초래하는 부조리, 자신의 실존을 위협하는 위험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 떠나온 본향으로의 귀향이 허락되지 않은 근대인의 구원의 희망을 모티프로 세계문학의 바다로 떠난 원정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만난 주체들 중 우리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이야기의 화자는 “미친 세상”에서 오히려 “가장 정상적인 인간”인 광인(157) 또는 부조리한 세상의 바닥으로 침잠과 부상을 반복하는 고흐,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같은 이들이다. 실존적 고립 속에서 ‘미분된’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 특히 광인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의식의 흐름에 따른 ‘복화술’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의식의 흐름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뛰어난 통역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근대 주체 탐구에 있어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불연속성,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거부를 분명하게 피력하고 모더니즘을 높게 평가하는 저자는 ‘모더니스트 오디세우스’의 입지를 선택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과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이 현상적으로 비슷해 보일지라도 확연하게 다르며, 각각 주체・자아 영역의 확장과 해체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주체 혹은 자아의 해체에 근간을 두지만, 모더니즘은 “근대성의 확장”을 주도했을 뿐 주체의 해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92). 이런 맥락에서 그는 모더니즘이 “아무리 비관적인 모더니즘이라 해도 기저에 진취성과 긍정이 깔려있으며 무엇보다 주체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라며, 주체 탐구를 하는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291).
모더니스트 관점에서 저자는 ‘거대 늑대’와 미친개들이 할거하는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의 『미스 블랜디시』(1938년)에서 독자가 “포스트모던”을 감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착시”일뿐이라고 진단한다. 사실 이 소설이 그런 착시를 유혹하지만, 그래도 “탈근대나 탈(脫)합리의 지경”으로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인간다움의 경계를 넘어 탈피한 것처럼 보이는 ‘거대 늑대’와 같은 유형의 근대인은 “근대인 중에서 도달 가능한 가장 진보한 개인”일 가능성이 있으며, 본질은 변하지 않은 근대인임을 강조한다(257). 사실 애초부터 근대의 기획 안에 이런 경계의 붕괴 혹은 탈피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이런 유형의 근대인에게 ‘포스트모던’이란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계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는 확정하기 힘든 것은 사실임을 저자는 인정하기도 한다. 예컨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1965년)의 지질한 주인공 루두비크의 “탈주체화하는 주체”(171),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3년)의 “부서져 내리는 주체”(175)와 같이 “온전할 수 없는 인간 주체”는 이제 “세계로부터 살해를 모면하기 위해 광인처럼 분열되거나 아예 스스로를 해소(또는 해체)하는 선택”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음을 지적한다(178).
나아가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설 『소피의 선택』(1979년)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소피와 그녀의 연인 네이션은 그들에게는 실존을 요구하는 것이 폭력이 될 지경에 이른 “소멸한 주체”로 등장한다(178). 홀로코스트라는 “모더니즘과 근대의 이성에 대한 일말의 미련마저 잃게 한 20세기 야만의 사건”이 주체의 결정적 몰락과 궤를 같이했다는 것이다(178). “숨은 신”, 신의 섭리에 대한 기대가 모두 사라지고, 신의 남루함이 증명되는 시점에서, 소피처럼 폭파되거나 소리 없는 아우성 자체가 된 주체에 대해, “이것은 주체인가?”라는 의문문으로 강한 의혹을 제기한다. 그래도 그는 “실존주의가 말하는 부조리”를 여전히 “모더니즘 현상”로 보며, “너무 무책임하거나 너무 퇴폐적인 바람이란 지탄을 받을까”라고 주저하지만, 여전히 주체는, 어떤 형태의 주체이든 계속 탐색돼야 한다고 단언한다(179). 이처럼 저자는 모더니즘의 한계를 여전히 모더니즘의 경계, 확장성 안에서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모더니스트 입지를 끝까지 견지하고 있다.
인간의 경계를 벗어난 비인간이 주체로 등장할 경우에도 저자는 굳건하게 모더니스트적 관점을 유지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2021년)의 주인공 클라라와 같은 비인간(인조인간)이 주체로 등장할 경우를 상상하면서, 그때는 “곤혹을 운위할 단계를 넘어 모더니즘 문명의 완전한 종말을 걱정할” 때지, “그것을 한가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러도 좋을까”(286)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논의를 끝낸다. 질문이 아니라 강한 확신을 시사하는 이런 어법은 모더니스트로서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무효성과 강한 거부를 부각시킨다.
4. 타자화하는 탈주체로서의 근대 여성, 근대 여성문학과 작가 평가에 대한 딴지 걸기
저자는 도발적인 제목 「“미인이 아닌” 스칼렛이 타라가 아닌 러시아로 떠나다」를 붙인 3장에서 2018년 공론의 장을 달궜던 페미니스트 커뮤니티 워마드의 낙태 사진 사건(조작된 사진으로 밝혀졌음)에 대한 논란을 서두로 근대 여성 주체(아니 탈주체?) 탐색을 시작한다. 그는 이 사건의 맥락을 “탈(脫)역사성-탈(脫)주체의 여성이 역사성을 자각한 주체로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최근 들어 확연해진 어떤 흐름에서”(50)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견 이 주장은 페미니스트 관점을 대변하는 것으로 들린다. 서구 페미니즘의 성서, 시몬 드 보부와르의 『제2의 성』(1949)의 논지를 전유해 그의 주장을 피력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들리는 것 같다.
근대 이후의 여성이 타자라는 보부아르의 분석에 십분 동의하지만, ‘타자’라는 용어보다는 ‘탈(脫)주체’가 더 적합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52), 실제로 그런지 여부를 떠나 명목이라도 근대의 인간은 평등한 인간으로, 즉 타자가 아닌 주체로 설정되지만, 여성은 제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이후 여성은 주체로서 배제된 채 주체인양 주체의 외양을 살았기 때문에, 타자로도 확고하게 정립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이후의 여성을 타자로 규정할 만큼 솔직하지 못했고, 오히려 탈주체로 묶어둘 만큼 교활했던 근대성의 여성 설계를 비판하면서, 이에 기대어 단호하게 “여성은 끊임없이 타자화하는 존재이지만 ‘타자에 이르지 못하는’ 탈주체로 성립한다는 판단”(52)을 내린다. 여기서 “타자화된 주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논의를 펼치면서 이에 대한 반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보다는, 용어와 말꼬리 잡는 방식으로로 딴지 걸기를 해보겠다. 보부아르의 “여성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라는 말을 저자는 일단 정확하게 “여성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만들어진다”고 풀어서 썼다. 이에 말꼬리를 이어 “여성은 인간이라는 주체로 태어났는데, 타의에 의해 여성이라는 타자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여성은 인간 주체로 태어났지만, 타의에 의해 타자화된다”로 또 다시 풀어 쓰기를 해보면, “타자화된 주체”라는 여성의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보부아르의 진단을 오역이나 전유 없이 확립한 이 개념과 함께 저자가 더 적합한 용어라고 사용한 “타자화하는 탈주체”가 저자의 해설을 적용하면, 여성이 타자도 되지 못한 탈주체라서 타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타자로 만든다는 의미가 내포된 용어임 지적함으로써 이의 제기를 대신한다.
이런 “타자화한 탈주체”라는 개념으로 근대 이후 여성을 탐색하는 작업에서 저자는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년)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와 멜라니에게서 타자화하는 탈주체의 전형을 발견한다.
이들은 주체는 아니나 주체적 여성이라고는 할 수 있다는 평가를 했지만, 그렇다면 이들은 타자화하는 탈주체의 전형은 아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타자화하는 탈주체는 주체적인 여성이 아니라 스스로를 타자로 만드는 “순응적인 타자화를 걷는 여성”(55)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근대 이후 여성들의 탐색에서 “여전한 ‘스칼렛’을 목격”한다며, 근대 이후 여성의 타자화한 탈주체의 전형성을 강조한다. 이쯤에서 “모더니스트 오디세우스”로 호명한 저자에게 모더니스트에게 가해지는 여성혐오주의 혐의를 가혹하게 씌우고 싶지는 않지만, “근대 남성 주체 중심적인” 모더니스트라는 수식어를 붙여본다.
저자의 또 다른 강력한 문제적 주장은 근대 이후의 “인간의 역사가 표명과 달리 남성의 역사였기에 그동안 여성의 역사는 백지로 남았고, 여성의 역사는 좋게 보면 요즘에서야 서장이 열리는 참이다”라는 여성의 탈역사성에 대한 것이다(강조는 서평자. 56). 여성은 주체였던 적이 없는 탈주체라서 결코 자신의 역사를 쓸 수 없었는데, 요즘에서야 서장이 (열린 것도 아니고) 열리는 참이라는 것이다. 탈주체에 대한 논지와 맥락을 같이하는 탈역사성에 대한 이런 주장은 저자의 근대 여성작가와 여성문학에 대한 과소평가와 직결된다.
저자는 여성작가의 글쓰기와 역사성 사이의 긴밀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번에는 현대의 페미니즘 도서 목록 상단에 이름을 올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1929)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라는 문장을 전유한다.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을 “여성이 역사성을 인식하는 주체로서 스스로를 설정하고자 한다면”으로 저자는 “크게 오독”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을 했지만, 살짝 오독한 것은 사실이다(61). 이런 전유에 이어 그는 울프가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를 거론하면서 그들이 “자기만의 방”도 없고 글을 쓸 시간도 제대로 낼 수 없는 상황에서 글을 썼을 것이라고 전한 말을 인용한다. 물론 이 두 여성작가들이 역사의식이 부족했다는 지적은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자기만의 방과 경제적 안정도 없이 쪼가리 시간에 소설을 쓴 여성작가들, 그들의 여성 주인공들 또한 역사의식이 결여돼 있음을 은근히 시사하는 흐름의 논의를 이어간다.
저자처럼 자신의 선별이 “누구나” 동의하는 객관성을 확보한 것으로 확신했던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비평가 리비스(F. R. Leavis)는 제인 오스틴을 시작점으로 영국여성작가소설이 아니라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분간해서 확립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리비스의 선별은 ‘분별 있는 차별’ 또는 ‘차별 있는 분별’(Discrimination)이 작동하는 기준에 따른 것으로, 저자의 선별과 평가의 기준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리비스의 선별과 평가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역사성이 결여된 여성작가가 “위대한 전통”에 들어갈 확률은 지극히 낮을 것이며, 만약에 그렇다면, 여성작가의 역사성과 소설 쓰기의 긴밀성은 그 논의 자체를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딴지 걸기로 이의 제기를 대신한다.
저자가 한 “여성의 역사는 좋게 보면 요즘에서야 서장이 열리는 참”이라는 지적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다큐멘터리 문학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1985년, 2002년)에 이르러서야 “여성의 역사를 작성한 선구적인 사례”(58)를 발견했다는 저자의 평가에 근거를 둔 것으로 추측된다. 이 평가는, 이전에는 여성의 역사가 기록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렉시예비치와 그녀가 인터뷰한 200명 참전 여성이 함께 만든 이 작품에 이르러 “여성의 역사는 회복된다”라는 그의 진단은 이제야 겨우 “여성이 역사성을 인식한 주체”가 됐기에 그 서장을 열게 됐다는 것으로 해석된다(60). 그렇다면 이전에 나온 모든 여성작가의 작품들은 탈역사성-탈주체의 여성의 글쓰기란 말인가?
5. 사랑 예찬: ‘사랑밖에 난 몰라’
이 책의 본문은 1장 「사랑, 그 공허한 충만과 아름다운 결핍에 대해」라는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다. 1장의 사랑의 주제는 2장과 7장에서 또 다른 변주로 반복 전개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1984)에서 소녀가 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한 남자와 서로 첫눈에 욕망이 솟아나 연인이 되는 사랑을 표현한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13)이 어떤 사랑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사랑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자는 이 에피소드에 근거해 강을 닮은 사랑의 유의어로 “경계의 소멸을 지향하는 경계례(Borderline case)”(14)라는 말을 만들어낸다. 이 개념에 따라 “많은 이어짐과 나눠짐의 연쇄를 축적해 형이상학적 성취와 실존의 남루함으로 삶의 고단을 충분히 겪은 뒤에” 또다시 인간은 누군가를 찾아 반대편 강기슭을 보며 호명을 하고, 나의 그 호명을 기다린 듯 네가 응답하는 이런 너무 평범하고 또 반복해서 일어나기에 더 기적적인 “평범한 기적”의 사랑(16)으로 기본적인 사랑의 패턴을 제시한다.
영화 장면처럼 전개되는 이런 사랑 이야기는 독자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계속 유지시켜준다.
이러한 사랑 패턴에 근거한 사랑의 구조는 강의 양안에 선 두 주체 사이의 반복된 호명과 응답을 통한 상호대상화와 서로가 서로에게 한없이 낮아짐에 응답하면서 서로를 바치는 상호공희(相互供犧)에 의해 양자는 전혀 “새로운 경지의 꿈 꾼 상호대상화”에 도달해 서로에게 사랑이 되며, 나아가 상호공희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신이 되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최고의 사랑은 서로를 신으로 만드는 사랑이다. 그러나 “신내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은 “신의 약속 없이 스스로 신병(神病)으로 뛰어 들어가는 무모한 확신”일 뿐이라고 한다. 또한 현실에선 모든 상호대상화가 상호공희의 신성한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신성한 상호대상화”보다 오히려 “상호 약탈적 대상화”가 훨씬 더 일반적이라는 진단도 내린다(20).
그러므로 근대의 “합리적인” 주체는 상호공희의 사랑에 무모하게 내기를 걸어 궁지에 몰리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 “사랑을 사랑하는 제3의 사랑”을 더 안전하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호공희의 사랑에서도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라는 언술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신이 아니고 우리가 사랑한 대상 또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주체의 사랑은 “너에게 강력하게/끊임없이 걸쳐지지만 동시에 단호하게 나를 지켜내는 작업”이 되며, “나를 사랑하는 형식”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28). 이런 근대 주체의 사랑은 “한없이 허약한 주체!”임을 탄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저자는 레프 톨스토이(1828~1910년) 소설 『안나 카레니나』(1877년)의 주인공 안나에게서 근대적 사랑의 주체를 발견한다. 안나의 존재에서 사랑만이 유일한 흠결일 정도로(129) 그녀는 ‘사랑밖에 난 몰라’라고 하는 사랑의 주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안나를 사랑의 주체로 단호하게 확립시키려는 저자의 시도에서 여성이 탈주체가 아니라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여자 안나가 물신화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녀의 ‘주체적’ 죄는 사랑이고,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안나에게 죽음은 획득된 것으로 ‘주체적’인 것으로 읽어낸다. 그녀의 죽음은 운명에 의한 좌초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 혹은 자발적 의지, 즉 주체적 행위이며, 근대적 정신으로 변주된 고전주의 비극의 반복으로 평가된다(129). 따라서 안나는 사랑의 운명은 믿지만, 삶의 운명은 거부함으로써 “완벽한 고전주의자가 되고 최고 낭만주의자”가 되었다는 칭송으로 이상적인 사랑의 주체,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등극한다(130).
6.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의 본향을 향한 항해
안나를 사랑의 주체로 등극시킨 저자는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를 풍성하게 만들 것이고, 따라서 “어떤 상황이 빚어지든 사랑이 포기될 수 없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되지 않는다”(143)라는 고전주의적 그리고 낭만주의적 사랑 예찬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는 삶의 현장에서는 낭만주의, 고전주의, 사실주의, 초현실주의도 아니고 “매혹적이지만 맥 빠진 화해의 길”인 실존주의 말고 다른 길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240). 또한 전반부에서는 부각되지 않았던 “믿음이 없으면 실존이 없다”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실존이 우리의 숙명임을 자각할 계기를 바로 문학이 제공한다는 말을 꺼낸다(241). 이 말은 이 책의 결말을 유신론적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구원의 주제를 다루면서 맺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전반부에서 저자는 신성의 세계를 탈출한 근대의 주체는 이제 다시 그가 떠나온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해왔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1925) 안에 액자소설로 등장하는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처럼 근대인은 ‘문’밖의 존재로 귀향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본향을 잊게 되고, 죽기 전에야 그 문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듯, “근대인에게 허락된 최선의 은총은 귀향의 성취가 아니라 본향의 확인”뿐임을 저자는 주장한다(166). 사실 근대인은 ‘문’밖에서만 주체가 될 수 있고, 그 ‘문’을 인식함으로써 최고 주체로 고양될 수 있지만, ‘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금지된다. 신이 아니라 근대성에 의해 금지된다. ‘문’ 저편에서가 아니라 ‘문’ 이편에서 금지된다. 저편으로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의 주체는 소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6).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 저자가 “매혹적이지만 맥 빠진 화해의 길”을 선택해 탐색한 주체는 그 문을 향해, 즉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주체다. ‘이미(Schon)’ 예수가 구원의 약속을 선포했고 그러나 구원의 날은 ‘아직(Noch nicht)’ 오지 않은 “중첩과 긴장, 혼란과 분열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출범했다. 이미 도래한 희망과 아직 오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이미’ 온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은 ‘아직’ 도래하지 않는 미래를 현재로서 구현하고 사는 굳건한 믿음의 사람을 뜻한다(301). 즉 이런 믿음의 사람이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근대의 주체인 것이다.
이 책은 현대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응구기 와 티옹오(Ngugi Wa Thiongo)의 『피의 꽃잎들』(2015)과 오스틴 라이트의 토니와 수잔』(2016)에 대한 분석으로 결말에 이른다. 토니와 수잔』이 처음 시작한 공간인 뉴 일모로그에서 끝난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희망과 해방의 구조 대부분은 공간적 회귀의 모습”(313)을 띤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1963년 독립한 케냐를 배경으로 한 『피와 꽃잎들』도 보여주듯, “본향으로 설정된 특정 공간에서 이탈하거나 주인 된 자리를 빼앗긴 이들이 다시 그 공간으로 돌아와 자리를 되찾는 것”은 성서적 구원이자 해방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얼개임을 주장하면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 극심한 곳으로, 기독교 종말론을 제외하고, 문학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결어로 세계문학 오디세이아를 끝냄으로써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의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귀향해 아내 페넬로페를 만나듯, 『율리시스』의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 역시 아내 몰리의 침대로 돌아오는 것으로 ‘댄더링(Dandering)’을 마친다. “어디? •” 로 끝맺는 17장 「이타카」의 결말이 시사하듯, 몰리의 자궁(•)으로 그는 돌아온다. 이 책이 펼치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또한 귀향의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끝을 낸다. 그러나 “신성모독”인 “여자 자궁으로의 (모든) 귀향”(168)이 아니라 “본향으로 ... 돌아와 자리를 되찾는 것”(313), 즉 성서적 구원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모더니스트,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오디세우스와 떠났던 긴 항해가 이와 같이 전반부와 후반부, 이향과 귀향, 문안과 문밖, 신성모독과 구원, 근대와 전근대의 조우와 충돌로 끝나는 것은 독자를 텍스트의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엔딩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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