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날 석양마저 잦아드노라면 차마 마음 가누지 못하고 필시 석양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건 올해의 햇빛이 다만 여기서 그치기 때문이다.
이덕무(1741~1793), 『청장관전서』 제48권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1」
올해의 마지막 날 햇빛이 그치고 나면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되지만, 올해의 시간과는 영원히 이별이다. 시간과의 이별이라니. 시간은 언제나 흘러갈 뿐이어서 이별은 당치도 않지만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과거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싶어 하고 과거에 대한 아쉬움으로 시간과의 이별이 떠오르는 것 같다.
사라지는 것들
‘일상’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일상’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일까 아니면 ‘일상’이 나와 함께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두려움일까.
2023년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병원, 버스 터미널, 열차, 소극장, 학교
지난 8월 31일 명동성당 옆을 지켜왔던 백병원이 폐업 했다. 1941년 설립되었으니 82년이나 오래된 병원이다. 백병원 폐업 소식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길을 걷다 보면 한 번쯤은 들어가 보았을 수도 있는 카페나 음식점들의 인테리어가 바뀌는 경우는 자주 보았지만 설마 병원이 그것도 종합병원이 환자들을 두고 폐업 할까 싶었다. 그런데 진짜로 문을 닫았다.
1985년 문을 열어 38년이 된 중랑구의 상봉터미널은 11월 30일로 마지막 운행을 했다.
이 터미널 부지에는 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강릉~ 동해~삼척 해안선을 달리던 동해안 바다열차는 12월 25일을 끝으로 2007년부터 16년간의 운행을 마쳤다.
지난 11월 10일부터 시작된 록 뮤지컬<지하철 1호선>은 12월 31일 학전(學田)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있다. <지하철 1호선>은 1994년부터 2008년까지, 10년 뒤인 2018년부터 2021년까지 그리고 이번 공연까지 자체로 역사가 되어있다. 학전(學田)에서의 공연이 마지막인 이유는 1991년에 개관한 학전 소극장이 33주년이 되는 2024년 3월 15일에 문을 닫기 때문이다. 학전 홈페이지에서 공연을 검색하니 김덕수 사물놀이 <소리굿>,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노래를 찾는 사람들 콘서트<푸른 내일을 향해>, 김광석, 안치환 <가을 콘서트>, 임진택 판소리<오적, 똥바다>, 김광석 라이브 1,000회 기념 콘서트가 나온다.
갑자기 지나버린 90년대의 시간이 떠오른다. 당시 김민기가 TV에 나와 돈이 필요해서 앨범을 낸다고 담담하게 말하던 모습과 앨범 발매일을 기다렸다가 집 근처 레코드 가게에서 CD 전집 4장을 샀던 기억이 난다. 그가 처음으로 개사나 판금 조치, 압수영장 등 규제를 받지 않고 자작곡 그대로를 수록한 음반을 냈던 이유는 정말로 돈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증거는 다음의 기사만 보아도 충분하다.
“노래 만들기 외에 노래굿이나 연극 등을 연출해 온 그가 직접 운영하는 극장<학전>에서는 요즘 록오페라 <지하철 1호선>이 공연 중이다. 그는 또 10월 중순에 예술의 전당에서 환경문제를 고발하는 록오페라<개똥이>도 마련할 예정이다. 1995년 6월 29일 자 동아일보기사”
종로구에는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 여담재가 2020년 11월 출범하여 2021년 3월 개관 기념 특별전을 시작으로 문을 열었었는데 3년 만인 지난 10월 말로 운영을 종료하였다. 여담재는 기존에 있던 사찰인 원각사를 이용하여 새롭게 지은 건물로 2021년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하였고, 바로 옆에는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1563-1628)의 비우당(庇雨堂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도 이전 복원해 놓아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더불어 단종비 정순왕후가 빨래 하였다는 자주동샘이 있어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울시에서 사업을 종료하여 현재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 되었다.
사라지는 과거들
초등학교가 사라지고 있다. 학령인구의 감소 등으로 폐교가 되거나 통폐합될 예정인 초등학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인 교동초등학교(1894년 개교)를 비롯한 구한말 「소학교령」에 의해 개교했던 학교들인 매동초등학교 (1895년), 재동초등학교 (1895년), 효제초등학교(1895년)의 경우도 전교생 200명 내외로 전 학년을 합해 12학급이 겨우 유지되고 있다.
1907년 영창학교로 시작하여 1910년 공립 영평 보통학교로 개교하였고, 2022년 개교 112주년을 맞았던 포천의 영평초등학교도 전교생 46명으로 결국 폐교하였다.
특별히 포천의 영평초등학교를 기억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곳에 있는 표지석 때문이다. 영평초등학교는 예전에 영평현 관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영평리 선정비 5기를 모아 둔 곳이기도 하다. 선정비 말고 또 다른 표지석이 하나 있는데 개교 100주년인 2010년 영평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세운 종두 시술지 표지석이다.
종두 시술지
이 기념비는 서기 1797년부터 1799년까지 영평 현령으로 재임하던 실학자 초정 박제가가 다산 정약용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종두(種痘)를 실시하여 수많은 어린 생명을 천연두로부터 구해낸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영평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본교 44회 동문이 세운 것이다.
초정 박제가(1750~1805)는 1797년(정조 21)부터 1799년(정조 23)까지 영평 현령으로 근무하였고, 다산 정약용(1762~ 1836)은 1798년(정조 22)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마과’ 즉, 마진(홍역)계통의 병과 그 치료법을 모아 잘 통하도록 정리했다는 뜻이다. 박제가와 정약용이 함께 종두를 실시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나와 초정의 의논(*종두와 시술 방법 등)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끝났다. 이때 초정은 영평현(永平縣)의 지현(知縣)이 되어 섭섭해하며 부임하였다. 그 후 수십 일 만에 초정이 다시 와서 기뻐하며 나에게 “두종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므로, 내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니 초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영평현에 부임하여 이 일을 관리들에게 이야기하였더니 이방(吏房)이란 자가 흥분하며 잘된 것 하나를 구하여 먼저 자기 아이에게 접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종핵은 비록 미소하였으나 종두는 잘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관노 아이에게 접종하고 세 번째로 제 조카에게 접종시키니, 종핵도 점점 커지고 종두도 더욱 훌륭하였습니다.”
이에 의사(醫師) 이씨(李氏)라는 이를 불러 처방을 주어 두종을 가지고 경성 이북 지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더니 선비 집안에서 많이들 접종하였다고 한다.
이 해(1800,정조 24)6월에 건릉(健陵)이 승하하였다. 다음 해 봄에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 가고 초정은 경원(慶源)으로 귀양 갔다. 그런데 간사한 놈이 의사 이씨를 모함하여 시의(時議)로 무고하니 의사 이씨가 고문받아 거의 죽게 되고 두종도 단절되었다.
정약용 『여유당전서』 제1집 10권 문집, 설, 종두설 국사편찬위원회
에드워드 제너(1749~1823)가 1796년 발견한 종두법인 우두법은 천연두에 걸린 소의 고름을 쓰는 방법이고 정약용의 마과회통에서 말한 종두법은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사용한 인두법이다. 인두법을 실시했던 의사의 이름은 이종인인데 1798년 박제가를 만났다는 내용과 다른 책들을 참고하여 치료법을 적은 『시종통편(時種通編)』이라는 의서를 남겼다. 다산이 말한 것처럼 정조의 죽음 이후 박제가와 정약용은 유배를 갔고, 이씨로 알려진 의사 이종인도 고문 받아 두종이 단절되었다. 천연두의 치료는 『우두신설(1885)』의 저자 지석영이 1879년 공식적으로 최초의 종두 시술을 하기까지 80년이 걸린 셈이다.
인두법이 이어져야 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운 내용들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해도 드러내지 않는 사실들은 잊혀 간다.
지석영이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 제생병원을 찾아가 우두법을 배워 최초의 공식적인 종두시술을 하였고, 이후 종두 접종 사업이 일제강점기 엄청난 효과를 보았다는 주장은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천연두 예방법인 인두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알리지 않는다면 그저 힘이 없고 나약해서 식민지가 되었었다는 논리에 말려들 수밖에 없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
학교가 없어지는 이유는 학생 수가 너무나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다닌 학교가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일 것 같다. 마치 나의 과거를 강제로 잃어버리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학교가 있었기에 동문이 있었고, 동문들은 학교에 대한 사랑으로 학교라는 장소가 가진 상징성을 표지석에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국의 학교 중에서 폐교가 되는 학교가 생기더라도 장소는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병원과 버스터미널, 열차, 소극장이 문을 닫는 이유는 모두 운영난 때문이라는데, 결국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여담재의 경우는 이용객이 적어서라니 그것도 결국 같은 맥락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런 공간들은 하필이면 모두 사회적 약자일 수 있는 환자들, 승용차로 가기 어려워 버스로 이동해야만 하는 사람들,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병원, 터미널, 여담재 같은 곳들이 대안도 없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부질없는 기대를 해본다.
다음으로 학전 소극장.
한 사람이 삼십여년 동안 해온 일들의 무게와 깊이가 너무 크고 깊어서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학전 어린이 청소년 무대가 없어진다는 사실도 마음 아프다.
어린이와 청소년, 아픈 사람들, 사회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새로운 햇빛이 비치면 좋겠다.
글·김정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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