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변곡점인 1979~80년은 소설과 영화의 주요한 원천이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가능케 한 데에 역설적으로 그 비극이 있었다. <서울의 봄>도 당시를 다룬 영화로 2023년 11월 22일 개봉했다. 한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가 일어난 2024년까지 이 영화는 1,3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OTT 등으로 넘어가서도 적잖은 관람이 있었다. <서울의 봄> 시간적 배경은 1979년 10월 26일부터 12월 14일까지이고, 12ㆍ12군사반란에 초점을 맞췄다.
12ㆍ3 친위 쿠데타의 전모가 밝혀지는 데는 12ㆍ12군사반란보다 적은 시간이 들 것 같다. 12ㆍ12군사반란과 달리 실패한 쿠데타인 데다 관련자들의 증언과 여러 미디어를 통해 쿠데타 과정이 비교적 빨리 또 소상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판단으로 12ㆍ3쿠데타가 좌초한 데는 12ㆍ12군사반란을 조명한 <서울의 봄>이 크게 기여했다.
12ㆍ3쿠데타의 실패 원인이 여러 가지로 분석되는 가운데 현장 군인들의 태업과 항명이 결정적이었다는 데에 이견이 없다. 사실 그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명령을 따랐다면, 즉 본회의장에 난입해 국회의원들을 끌어내 계엄 해제를 막았으면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렀을지 예측불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12ㆍ12군사반란, 5ㆍ18민중항쟁, 1987년 민주화운동, 2016~17년 촛불집회 등을 거치면서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성숙한 것이 현장 군인들에게 반역사적 행동을 자제하게 했겠지만, 영화 <서울의 봄> 또한 독감이 돌기 직전에 맞은 백신 같은 역할을 했다. 현대사의 아픔을 체험하며 역사의식을 높이는 계기를, 영화 제작진이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서울의 봄>이 한 셈이다. 만일 <서울의 봄>이 2023년 말에 개봉하여 2024년까지 흥행하지 않았다면 12ㆍ3쿠데타의 성공 가능성을 얼마라도 높이지 않았을까. 12ㆍ12군사반란 때와 달리 이번에는 여러 우연이 겹쳐 역사의 퇴행을 막았는데, 이 영화의 개봉과 큰 성공 또한 그 우연의 연쇄에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2ㆍ12군사반란을 그린 영화
영화에서는 ‘서울의 봄’이란 영화 제목이 뜨기 전에 사전 정보를 고지하는, 콜드 오프닝 격의 상황 요약 스토리가 펼쳐진다. 197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이후 12ㆍ12군사반란 전까지 상황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태신(정우성), 전두광(황정민), 정상호(이성민), 노태건(박해준), 김준엽(김성균) 등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얼굴을 비추며 이후 사태를 예고한다.
이후 전개는 현실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24년에 개봉한 <행복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김재규 역의 비중이 미미하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된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하나회 주축의 신군부와 군부 내의 반쿠데타 진영이 맞서는 구성이어서, 예컨대 <남산의 부장들> 같은 영화처럼 김재규가 존재감 있게 묘사되지 않았다.
체포돼 서빙고 분실에서 신문을 받는 모습으로 김재규가 콜드 오프닝의 말미에 잠깐 등장한다. 계엄법에 따라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국군 보안사령관 전두광 소장이 김재규에게 “밖에 나가 보세요. 바뀐 거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야.”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전두광의 개성과 영화의 방향을 암시하는 대사이고, 상대방인 김재규는 별다른 극적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실제 벌어진 일과 완전히 다른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영화이다 보니 아무래도 극적인 요소를 강화하기 위해 이태신과 전두광이 직접 대치하는 장면을 만들었고 그 장면을 선악대결의 픽션으로 그렸다.
반란군에 맞선 진압군의 마지막 희망인 이태신 장군이 전두광 무리가 모여있는 30경비단으로 신속하게 이동한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에 들어서며 이순신 장군 동상을 올려다보는 모습 또한 극적 장치이다. 30경비단 방어선 앞에서 이태신 소장은 겹겹이 쳐진 바리케이드를 전차를 앞세워 돌파하기 전에 반란 주동자들에겐 투항을, 30경비단 군인들에겐 상관이 억지로 끌고 나왔음을 알고 있다며 무장해제를 권유한다. 반란군을 지원하러 아직 9사단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두광은 마이크를 잡고 진압군에 비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반란군이 우세하다며 시간을 끈다.
그러나 이태신이 수경사 야전포병단에 30경비단을 조준하라고 지시하고 5분 안에 투항하지 않으면 정밀타격을 하겠다고 최후통첩하자 반란군은 공포에 휩싸인다. 이에 전두광이 협상을 시도하지만 이태신은 “대화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라며 일축한다. 이태신은 포격이 시작되면 즉각 돌격하라고 진압군에게 지시하고 반란군 수뇌부는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른다.
신군부의 반란이 실패할 것 같은 결정적 순간에 반전이 일어난다. 군의 야포 사격까지 단 15초 남은 상황에서 2공수에게 발각되어 30경비단으로 끌려온 국방장관(김의성)이 포병단에 사격 중지와 진압군 모든 부대원에게 복귀 명령을 내린다. 이태신은 마지막까지 국방장관에게 반란군 체포 명령을 전군에 내려달라고 간청하나, 장관은 반대로 마이크를 통해 이태신의 직위를 해제한다.
민간인 피해를 우려해 결국 교전을 포기한 이태신은 고위지화(孤危之禍)를 무릅쓰고 겹겹의 바리케이드를 넘어 전두광을 향한다. 이태신은 삼중 철조망 너머의 전두광에게 “넌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라는 말을 남기고 연행된다. 5ㆍ16군사정변 18년 만의 두 번째 군사반란에서 다시 반란군이 승리한다.
이후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조적 운명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대미 겸 에필로그를 쓴다. 노래 ‘방랑시인 김삿갓’을 부르는 전두광을 필두로 반란군의 축하 파티와 고문당하며 만신창이가 된 진압군 주요 인사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엔딩은 나중에 차례로 대통령이 되는 두 명이 포함된 1979년 12월 14일의 반란군 단체 기념 사진. 실제로 찍은 사진이다.
역사와 영화
<서울의 봄>에서 결정적 역사 왜곡이 없었지만 클라이맥스는 실제 역사는 아니다. 그런 영화적 가공이 없었다면 1,300만 명의 관객이 들기 어려웠을 것이고 당대의 역사에서 느끼는 안타까움을 공유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현실 역사를 소재로 영화적 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관객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고 또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좋은 사례이다.
한강의 소설과 함께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은 45년 전의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선한 영향을 미쳤다. 정우성이 연기한 의로운 군인의 울분이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 등지로 출동한 군인들에서도 발견됐다. 12ㆍ3쿠데타 이후 전두환을 존경한다는 군인이 목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전두환보다는 장태완이나 정병주를 더 존경할 것이다. 거의 전국민이 관람한 <서울의 봄>은 대조적인 두 종류 군인의 길을 극화하며 조명했다.
윤석열이 술김에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비하하는 사람이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준비와 치밀한 계획을 거쳐 12ㆍ3쿠데타가 기획됐고 실행됐다. 현장 군인들의 높은 역사의식과 의기는 12ㆍ3쿠데타를 기획한 일당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이었다. 그들의 역사의식과 의기의 배후에 어떤 식으로든 <서울의 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지 않을까.
“그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까. 뭐, 어디 가서 점이라도 봤어요?”
전두광이 김재규에게 한 대사이다. 전두광이 한 말이란 걸 논외로 한다면 이 대사는 꼭 윤석열에게 한 말 같아 김 감독에게 신기라도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계량화하기는 힘들겠지만, 예술이 역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사례로 <서울의 봄>은 기록될 것이다.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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