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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미대생은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미대생은 어디로 갔을까
  • 김지연 | 문화평론가
  • 승인 2021.03.3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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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작가로 살아남기

새로운 계절에는 새로운 소식이 기다려진다. 30대 현대미술작가 A(1)는 지난 연말부터 국공립 미술관과 작은 지자체까지 여러 레지던시에 지원하고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합격하면 곧장 짐을 싸서 입주할 예정이다. 어느 지역에서 몇 달을 보내게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이지만, 아르바이트를 줄이고 작업을 지속하기엔 레지던시 입주가 그나마 나은 선택이다. 봄이 온다는 소식은 들리는데, 원하는 소식은 아직이다.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꽃이 필 때마다 마음만 조마조마하다.

한 해에 쏟아지는 미대 졸업생은 3,000명이 넘지만(2) 이 중 전업 작가가 되는 비율은 10%를 넘기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기준 국내 미술작가는 약 4~5만 명, 수십 년 전부터 미대를 졸업한 이들 중 그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그 중 작업으로 얻는 월평균 수입이 100만원 이하인 작가가 전체의 79%에 달한다. 취업한 미대 졸업생 대다수는 미술학원 강사, 일러스트레이터, 미술관의 임시직으로 최저시급에 가까운 임금을 받는다.(3) 시간이 꽤 흘렀지만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로 살아남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A는 월등한 실기와 수능 성적으로 명문 미대에 입학했고,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일하지 않는 대학원생은 거의 없다. 졸업 전시 이후, 작은 갤러리에서 몇 번의 단체전을 했고 신생 공간의 제안으로 개인전을 했으나 작품이 팔리지는 않았다. 대형 설치작업을 해보고 싶지만 비용이 엄두가 나지 않을 뿐더러, A에게 제안이 오는 작은 공간들에서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어떤 갤러리는 전시를 핑계로 작가에게 비용을 전가하거나 부당한 수수료를 받는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작가들 사이에서 돈다. 더 큰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전시 제안이 오기를 기대하기에는, 아직 경력이 부족하다.

국공립 미술관이나 시·군 단위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에 입주한 선배들은 대형 미술관에서의 전시, 비평가와의 매칭, 작품 연구 기회를 얻으며 이름을 알렸다. 물론 일부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유명무실하지만, 중요한 것은 ‘레지던시 입주 작가’라는 명예로운 이력과 그나마 여유로운 작업환경이다. 레지던시를 몇 번 거친 선배들은 큰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활동 무대를 점차 넓히다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송은 미술대상, 에르메스 미술상 등 굵직한 미술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물론 각각의 미술상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다르기에 실력이 뛰어나다고 모든 상의 후보가 되기는 어렵다.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의 권력화

A도 레지던시에 입주하고 싶지만 높은 경쟁률로 인해 선발과정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최근 모 레지던시에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 비용이 드는 발표 영상 제출을 요구했고, 지방의 어느 레지던시는 1차에서 터무니없이 많은 인원을 뽑아 모두 자비로 대면 면접을 오게 해 논란이 됐다. 행정 편의를 위해 작가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게 뻔히 보여도, 작가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권력화의 이유는 작가들이 레지던시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관이 주도하는 예술 성장을 작가들은 반기지 않지만, 그나마 가장 나은 보장이므로 뾰족한 대안이 없다. 공적 지원이 없다면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작품 판매에 의존해야 하고, 그렇다면 대중적인 주제는 물론 회화나 조각처럼 팔리는 장르로 매체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이미 영상, 퍼포먼스, 가상현실, 다원예술 등 실험적인 장르와 주제를 시도한다. 이를 위한 재력을 갖춘 작가는 드물기에, 새로운 시도를 위한 중립적 재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민간 자본에만 의존하기에 우리나라의 예술적 토양은 아직도 부족하다. 

이를 위해 시작된 것이 레지던시 사업이다. 가능성 있는 신진 작가를 선발해 작업 공간을 제공, 비평가와의 매칭, 전시 기회 등 작가가 안정적으로 작업하며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는 것이 목적이다. 식물에 준 물과 햇빛, 비료는 열매를 맺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레지던시도 입주 기간을 넘어 장기적 안목으로 지원이 제공돼야 더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국공립미술관이나 지자체는 다음 연도 예산 편성을 위한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하기에 작가들을 재촉한다. 작가들은 단 몇 개월 만에 전시와 행사를 치르느라 정작 작업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암스테르담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라익스 아카데미’는 작가들에게 필요한 공간과 프로그램을 지원하지만, 단기간의 성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무엇보다도 ‘시간’을 보장받아 더 깊은 작업을 할 수 있는 주춧돌을 다진다. 심지어 면접에서 “쉬고 싶어서 왔다”라고 지원동기를 밝힌 작가도 합격했을 정도다.(4) 물론 국내에서 ‘라익스 아카데미’ 같은 레지던시는 꿈이다. 그러나 작가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은 기회가 레지던시이므로 경쟁은 치열하고, 선발하는 쪽은 과도한 권력을 쥐게 된다. 이는 부당한 요구나 예술가의 자기검열 등 레지던시 사업의 원래 목적에서 벗어난 문제를 만든다. 기울어진 권력의 원인은 결국 작가들의 노동 환경 문제다.

 

왜? 예술은 노동이 아닌가

예술이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닌 현대사회에서는 평범한 학생들이 작가를 꿈꾸며 미대에 입학하고, 앞서 언급한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과정을 거친다. 만약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살아남아 마침내 미술상 하나를 거머쥐었다고 하자. 다른 직업이라 쳐도 상위 1% 이내일 텐데 여전히 부는 보장되지 않는다.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성공 가도에 올랐음에도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불명예스러운 구설을 남기고 자살을 선택한 ‘옥인 콜렉티브’의 비극이 이를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작가는 궤도 밖에서 프리랜서와 백수 사이 어디쯤의 삶을 산다. 누구도 행복하게 일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에서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부당한 대우도 견뎌내야 하는 주홍글씨다. 그러나 방점은 ‘좋아하는’ 보다 ‘일을 한다’에 찍혀 있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직업이 되면 원치 않는 일들이 따라붙고, 계약과 마감을 지키려 밤새 일해야 한다. 결국 예술 역시 노동이다.

그럼에도 작가가 받는 작품 대금이나 아티스트 피(Artist Fee) 등을 작업 시간으로 치환했을 때 최저시급 이하라면 큰 문제가 아닐까. 하지만 구체적 기준 마련이 어렵다는 이유로 기초적 노동권과 안전망에서도 배제되고, 권리를 요구하려면 모든 것을 개인이 증명해야 한다. 돈과 성공을 말하면 작품의 진정성조차 의심받는 세상에서, 기약 없는 도돌이표를 그리며 예술 현장의 실상을 이해시키고 가난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부업으로 당장의 생계를 구하는 것이 빠르다. 

예술인의 노동을 인정하고 현장에 맞춘 복지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속적 요구에 2012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됐다. 이곳에서는 예술인의 사회보험, 분기별로 기업 및 기관과 매칭해 예술인을 파견하는 사업, 창작지원금 등 생활 안정을 위한 지원사업 등을 운영한다. 이마저도 예술인의 생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탁상행정으로 자주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럼에도 늘 예술인들의 지원이 몰린다. 또한 지자체와 문화재단에서 수시로 여는 지원사업도 각종 서류 작업과 까다로운 절차, 정산과 보고서 제출까지, 본 작업보다 더 많은 행정업무가 발생하지만 늘 포화상태다. 민간 자본의 지원보다는 그나마 원하는 작업을 시도해볼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업들 역시 레지던시처럼 권력화된 지 오래다.

지원사업의 권력화를 방지하려면, 새로운 지원이나 정책이 아니라 작가의 노동환경에 대한 실질적인 파악,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이들이 공적 자본에 의존하지 않을 정도로 자립하지 못한다면, 어떤 지원사업도 권력화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단추는 예술작업이 정당한 노동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과 예술가에게는, ‘먹고살 만하니 아름다움을 논할 것’이라는 곱지 못한 시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열정페이’식의 태도, ‘가난해야 좋은 예술이 탄생한다’라는 신화처럼 수많은 편견이 따라붙는다.

 

예술가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실재하는 인간에게 씌우는 신화는 잔인하다. 여성에게 아름다움이나 모성애의 신화를 덧씌우며 개별 존재의 고유성을 인정하길 거부했을 때 여성의 존재가 부정당했던 것처럼, 예술과 예술가도 그것을 신성시하는 시선 속에서 소외된다. 예술은 표현의 자유 하에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것을 만드는 자는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인간이다. 

반 고흐의 서사를 유독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가난에서 숭고한 예술이 탄생한다는 편견이 널리 퍼져 있지만, 그것은 순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의 작품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난하고 불행했던 삶이 후에 미화된 것이지, 가난했지만(또는, 가난했기에) 명작을 탄생시키지 못한 작가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수없이 많다. 가난은 예술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작가들이 정당한 노동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감내하며 작업하고 있기에 가난한 것일 뿐이다. 사실 역사상 유명한 작가들은 생전에 인정받았다. 피카소와 마티스, 달리가 생전에 부를 누렸다 해서 가난에 시달리다가 단명한 반고흐보다 그들의 작품이 못하다고 평가하진 않는다. 개인의 결핍이 예술의 동기가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꼭 경제적 문제일 필요는 없으며 기본권의 결핍일 필요는 더더욱 없다. 

예술은 한 사회에 꼭 필요한 분야다.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나 철학자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과 사회의 균열을 발견하고, 흩어진 점과 점을 이어 보이지 않는 서사를 드러내는 예술 작품들의 존재는 문화의 성장을 넘어 사회 전체의 기초 체력이 된다. 그 재능을 가진 사람이 교육과 경험을 통해 가진 능력을 기르고, 계속해서 예민한 눈으로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존 조건,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들이 가난으로 인해 예술을 포기한다면 오히려 사회적인 손실이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너무 많은 예술가를 잃었다. 

법적인 의미의 ‘업’이란 ‘직업 기타 사회생활상의 지위에 기해 계속적으로 종사하는 사무 또는 사업’을 뜻한다. 작업으로 수익을 얻지 못해도 업으로서 지속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직업이고, 작품제작에 쏟은 시간은 엄연한 노동시간이다. 사회구성원은 본인의 능력이나 부모의 재력과 상관없이 최저임금을 보장받고 노동권을 보장받는다. 빵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 해서 돈을 벌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으며, 누구보다 신성한 업무에 종사하는 종교인도 노동에 따른 임금을 받는다. 그럼에도 예술에만 야박한 것은 예술을 신성시하는 편견에, 당장 필요한 재화 생산이 아니라면 등한시하는 사회 분위기, 즉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특별한 보호나 시혜가 아니라 업으로 지속하는 일이 노동으로 인정받고 스스로 설 수 있기를 원한다. 우리 사회가 예술의 필요를 제대로 인식하고 작가들의 일이 정당한 가치를 지닌 노동이라고 인정할 때, 음지의 노동이 양지로 나올 수 있다. 작가들의 노동환경이 정상적인 수준으로 안착하고, 공적 지원에 기대지 않고도 자신의 업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된다면, 레지던시와 같은 각종 지원사업이 권력을 휘두르려 해도 작가들이 먼저 거부할 것이다. 그때야말로 예술에서 더 새로운 목소리와 강력한 힘이 발휘될 수 있다. 누구든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더 선명한 목소리를 낸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인식 변화에 달렸다. 

다시 A 작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봄비가 내리고 목련이 만개했다. 다른 꽃들도 줄지어 피는 것을 보니 아마 다음 계절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작업으로는 돈을 벌지 못하니 생계를 위해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해야한다. 그렇지만 A는 자신의 직업을 학원 강사가 아닌 작가라고 말한다. 업으로서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일하고 있음에도 늘 어디엔가 의존해야만 생존 가능한 상태를 벗어나 그의 직업만으로 삶을 유지하는 것은 아직 꿈 같은 일이지만, 언젠가는 봄이 올 거라고 믿는다. 시인 셸리가 겨울바람 속에 기다렸던 봄처럼…. 

 

 

글·김지연
문화평론가. 예술과 도시에 깃든 사람의 마음, 서로 엮이고 변화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 글을 쓴다. 홍익대 예술학과와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미술전문지 <그래비티 이펙트>의 미술비평공모에 입상했다. 미디어아트 전시 ‘뮤즈’ 시리즈를 기획했고, 책 『마리나의 눈』, 『보통의 감상』을 썼다. 


(1) 실존인물이 아니라 여러 작가의 일화를 조합한 가상인물이다.
(2) ‘학과계열별 졸업자수(대학과정)’, 교육통계연구센터 교육통계서비스(kess.kedi.re.kr) 4년제 미술 및 조형대학 졸업자 숫자로, 디자인, 사진, 영상 등의 응용미술이나 인접 전공은 제했다.
(3) 이민하, ‘미술대학 졸업생의 취업 현황 연구’, <미술교육논총>, 제29권 3호, 51~76쪽, 2015.
(4) 헤럴드경제, 2016.4.4. ‘“시간”을 주는 아티스트 레지던시…네덜란드 “라익스아카데미”’, 2016년 4월 4일.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6040400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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