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안형 원귀에서 욕망의 사이코패스로
영화학자 로빈 우드는 공포영화와 관련해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공포영화 속 괴물들은 사회가 억압(하려)했던 타자들이다. <살인마>(1965, 이용민),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이장호), <여곡성>(1986, 이혁수), <여고괴담>(1998, 박기형 감독), <폰>(2002, 안병기) 등 한국 공포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처녀귀신을 떠올리면, 이 주장의 타당성을 알 수 있다.
처녀귀신들은 가부장제 내지는 남성 중심의 사회문화라는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이다. 그들은 원귀로 귀환해 서슬 퍼런 복수를 감행하고 원한의 대상을 처단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를 근거로, 공포영화 속에서 괴물들이 보이는 가공할 파괴력은 사회적으로 억눌린 욕망이 거침없이 폭발하는 장면이라 해석되며, 이런 괴물들의 행태는 관객들에게 공포와 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 한국 공포영화 속 ‘원귀’, 억압받는 여성들은 2000년대 초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기부터 점차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부터 <검은 집>(2007, 신태라)의 ‘이화’처럼 여성 사이코패스로 귀환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경향은 <썸바디>(2022, 정지우)의 ‘김섬’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화’나 ‘김섬’은 사회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억압받는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이는 한국 사회가 급변하면서, 처녀귀신 영화의 원귀로 박제됐던 여성들이 또 다른 공포 장르인 미스터리나 스릴러 속에서 사인화(私人化)된 욕망을 품은 가해자로 변모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2. 사인화된 욕망에 사로잡힌 한국형 괴수의 등장
이런 ‘욕망의 사인화’는, 한국형 괴수물에서도 포착된다. ‘괴이한 짐승’, 괴수가 주로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바로 한국형 괴수물이다. 대표적으로, <대괴수 용가리>(1967, 김기덕), <용가리>(1999, 심형래), <괴물>(봉준호, 2006), <차우>(2009, 신정원), <7광구>(2011, 김지훈), <물괴>(2018, 허종호) 등이 있고, 오티티(OTT) 시리즈 영화 <스위트 홈>(2020, 이응복)과 <경성 크리처>(2023, 정동윤) 또한 이런 괴수물에 속한다. 또한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좀비로 표현한 영화 <괴시>(1981, 강범구), <부산행>(2016, 연상호)과 오티티 시리즈 <킹덤>(2019, 김성훈), <지금, 우리 학교는>(2022, 이재규, 김남수) 등도 괴물로 변한 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괴수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한국형 괴수’들은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며 사소화되는 개인이 아니라, 한 사회의 잘못된 공적 시스템 그 자체를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작품 속 개별 캐릭터들은 이야기 전반에 걸쳐 그것의 파괴와 전복을 시도한다. 즉, 공포영화에서는 사회적으로 억압당한 인물들이 원귀로 귀환해 가공할 파괴력으로 시스템의 전복을 시도하는 반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 등 한국형 괴수물에서는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는 캐릭터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괴물에 맞서며 시스템의 전복을 꿈꾸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 공포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원귀와 한국형 괴수물의 괴물이 차별화된다. 다시 말해, 한국 공포영화의 원귀는 한 개인의 억압된 욕망이 귀환한 결과물(원귀=개인)이라면 한국형 괴수물의 괴물은 한 개인이나 사회를 억압하는 시스템 그 자체(괴물=시스템)라는 것이다.
그런 흐름에 균열을 낸 것이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본격적인 한국형 좀비물로 평가된다. 흔히 괴수물에서 좀비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서처럼 말초적인 욕망만 남은 채 모든 것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이는 <부산행>의 괴수들 즉, 좀비로 변한 인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데, 이전의 한국형 괴수물 속 괴물들이 처단되고 전복돼야 할 사회적 시스템 그 자체였던 것과 달리 <부산행>의 좀비는 한 사회의 시스템 내에서 인간성을 강탈당한 각 개인 욕망을 재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 모습은 어둡고도 거대한 시스템 속에 갇힌 채 무수한 말들 속에 파묻혀 자아를 상실하고 욕구마저 통제당하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당장은 그렇게 억압당하고 있으나 기회를 포착한 순간 자신 외의 모두를 먹잇감으로만 인식하는, 인간의 육체를 한 괴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산행>이 인간의 욕망과 그 파괴적 성향을 인간의 육체로 귀환한 좀비를 통해 보여줬다면, 오티티 시리즈 <스위트 홈>과 <경성 크리처>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즉, 억압됐던 개인의 욕망이 폭발함으로써 스스로 괴물의 육체로 재탄생하며, 그 몸집은 각각의 욕망에 비례해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스위트 홈>의 괴물들은 인간성을 상실한 채 무차별적인 파괴를 일삼는 욕망의 결정체로 등장하기에 스릴러적 쾌감을 선사한다. 반면, <경성 크리처>의 성심(강말금 분)은 스토르게 즉, 혈육의 정을 기억하고 있는 인간적인 괴물로 변모하는데, 이것이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신파적 요소로 작동한다는 점은 자못 놀랍다. 그것은 아마도 성심이 억압할 수밖에 없었던 욕망 즉, 딸을 만나고자 하는 그리움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3. 한국형 괴수물의 보수성
앞서 언급했듯, 이제 한국형 괴수물은 공안적 성격이 강했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개개인의 특수화된 욕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억압될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억압된 욕망은 무의식 중에 잠겨 있다가 어떤 형태로든 귀환한다. 이런 프로이트의 이론에 기반해 로빈 우드의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억압된 것이 귀환해 극 속에서 모든 것을 전복할 만한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관객들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평범한 환경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시스템의 전복과 파괴를 시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나 가공된 환상일 때, 사람들은 자신을 짓누르는 사회적 규범을 상상 속에서 파괴함으로써 쾌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관객 혹은 시청자들이 영화 <부산행>이나 오티티 시리즈 <스위트 홈>, <경성 크리처> 등에서 얻게 될 쾌감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최근의 한국형 괴수물에서는 잘못된 사회적 시스템이 아니라 사인화된 욕망을 지닌 개인이 처단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이 장르의 보수성을 지적할 수 있다. 이 같은 양상은 주로 80년대 초까지 활발하게 제작됐던 공안형 처녀귀신 중심의 한국 공포영화에서 나타난다. 현재 한국형 괴수물 또한, 사회적 전복을 꿈꾸던 기존의 괴수물처럼 각 개인의 욕망을 사회 시스템 전복에의 의지로 활용하기보다, 자체를 처단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상당히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차우>, <7광구>, <물괴> 등에서는 여전히 점프 스케어(Jump scare)에 의지한 채 관객들에게 짜릿한 악몽을 선사하는 데에만 몰두함으로써 기존 한국형 괴수물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
4. 글을 맺으며
<기생충>(2019, 봉준호), <킬링 로맨스>(2023, 이원석), <잠>(2023, 유재선) 등 한국 영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2023년 12월 27일은 어떻게 기억될까 궁금하다. 누군가는 동시대를 살았던 한 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공허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한 개인을 향한 공적 인격 살인이 적법한 수사라는 이름으로 당당해지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 게다가 거기에 동조하며 기득권에 편승하려는 일부 언론사들의 보도 행태를 보면 일말의 윤리성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속의 괴물들은 현실에도 늘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욱 소름끼친다.
한국형 괴수물에서 등장인물들이 괴물들의 가공할 파괴력에도 끝까지 맞서 싸우듯, 현실 세계에서도 이런 괴물들의 등장과 끔찍한 그 괴물들과 함께 하는 일상에 결코 익숙해져서는 안 될 것 같다.
글·윤필립
세종사이버대학교 한국어학과 초빙교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영화평론이 당선됐고, 만화평론상, 대종상,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의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대학에서 담화분석, 문화교육, 문학치료 등의 연구에 집중하며 강의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