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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넓어진 세계 - ‘2014년 생’ 시원에게
조금 더 넓어진 세계 - ‘2014년 생’ 시원에게
  • 양근애 | 문화평론가
  • 승인 2024.07.3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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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2022년 신촌극장에서 백송시원 배우님이 출연한 연극 <2014년 생>을 본 관객입니다. 그리고 세월호 10주기가 된 올해 나온 책 『2014년생』(아를, 2024)을 꼼꼼히 읽은 독자이기도 합니다. 배우님께 오래전부터 말을 걸고 싶었는데 무슨 말을 먼저 할지 잘 몰랐어요. 망설임을 담아 편지를 보냅니다. 이제부터 시원이라고 불러볼게요. 실은 시원이 미취학 아동일 때 어느 연극 뒤풀이에서 처음 시원을 만났고 그 후에도 멀찍이서 여러 차례 본 기억이 있어요. 엄마를 찾지 않고 이모 삼촌들 사이에서 야무지게 고기를 먹던 시원이 자라 어느새 열 살이 되었다니 정말 시간이 마법을 부린 것 같아요. 시원이 출연했던 연극 <시소와 그네와 긴 줄넘기>(2021)도 보았어요. 그날은 어린이날이었는데 시원이 또박또박 알려주었던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거기엔 이런 조항도 있었습니다. “제4조. 국가는 아동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린이는 시민이 아닌가요?”라는 질문 

그때 들은 ‘국가’라는 단어와 <2014년 생>에서 들었던 “어린이는 시민이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겹쳐봅니다. 그때 시원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고장 나 있기 일쑤인 화장실 세면대를 예로 들면서 어린이의 시민성에 대해 물었지요. 실은 그 장면을 보고 저는 조금 충격을 받았어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건물, 점자블록이 없는 인도, 자막이 없는 공연장처럼 장애인을 배제하는 공간에 대해서는 생각했어도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출생률이 0.7명인 나라에서 어린이는 어른들의 보호를 받고 자라야 할 귀한 존재라고만 생각했지 주체적인 존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원의 질문은 정말 예리하고 또렷해서 어린이의 시민권뿐만 아니라 어른의 시민권까지 되짚어 보게 만들었습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정하는 아동은 만 18세 미만의 모든 사람으로 생명에 대한 고유한 권리를 가졌고, 아동과 법정대리인의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또는 기타 의견, 출신, 재산, 장애, 태생, 신분 등의 차별 없이 권리를 존중하고 보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동의 인권 보장은 곧 인간의 존엄과 인권에 대한 보장인 셈이에요. 그리고 이 권리는 차별금지법 개정의 근거와 다르지 않아요.

 

‘어린이다움’과 ‘어른다움’의 이분법

그렇지만 그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에 대해 어른인 제가 할 말이 없어집니다. 아, 그렇다고 제가 어린이의 몫과 어른의 몫을 나누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이 편지를 최대한 정중하고 정성스럽게 써야겠다고 다짐한 까닭은 <2014년 생>이 ‘어린이다움’과 ‘어른다움’의 이분법을 묻고 시민권의 세부를 들여다보고 애도와 윤리에 관한 생각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인걸요. 세월호 이전에도 세월호 이후에도 위험에 노출된 아동을 구하지 못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 것은 분명 어른의 책임이지만, 그 이후의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갈 시민에 분명 어린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책에서 읽었어요. 열 살이 된 시원은 공사로 인해 보행이 위험해진 교차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찰서에 갑니다. 거기서 경찰은 시원에게 친절을 베풀지만 (“나중에 커서 경찰대학에 가서 좋은 경찰이 돼라.”, “사탕 줄까?”) 시원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지 않습니다. 시원은 노들장애인야학에 갔을 때 배웠던 ‘돕는다’와 ‘조력한다’의 차이, ‘돕는다’와 ‘친절을 베푼다’의 차이를 떠올리며 자신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했음을 알아차립니다. 어른들이 어린이의 말을 그저 ‘귀여움’으로 치부하고 내용을 제대로 듣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어린이다움’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겠지요. 그 ‘—다움’이 차별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여성다움’, ‘남성다움’, ‘피해자다움’, ‘장애인다움’, ‘노인다움’처럼 말이에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시위에서 “장애인도 시민이다!”라고 구호를 외치는 시원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어요. 시원이 특별한 어린이로 보이지 않고 어린이들이 권리를 외치는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세상을 상상하면서 말이에요.

시원은 세월호 참사가 어린이 보행 교통사고와 닮았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사회적 참사는 끊이지 않았고 시원의 말대로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대신 ‘안전 교육 받고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대한민국”에서 생존하는 일은 개인의 몫이 되었어요. 연극에서 잘 말해준 것처럼 스쿨존 뿐만 아니라 학생인권조례, 노키즈존, 성평등도서, 현장체험학습 등 아동청소년의 권리에 관한 일들은 사회제도를 바꾸는 일과 무관하지 않고, 나와 가장 가깝게 일어나는 일들이 결국 다른 이들의 생명과 안전과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 변화의 출발일 거예요. (참, <2014년 생>은 거기서 더 나아가 북극곰과 지구에 닥친 기후위기까지 다루는 멋진 공연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을게요)

<2014년 생>은 시원이와 이나리 배우가 함께 등장하는 공연이지만, 이 공연에 세월호 생존자 주희와 도연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공연 시작 전 모르는 관객들끼리 둘러앉은 어색함을 깰 겸 수건돌리기를 시작했을 때, 비어 있는 ‘자리’를 돌아보며 생각했어요. 여기 없는 사람들의 자리를 느껴봐야겠다고요. 그래서 책에 실린 주희와 도연의 에세이는 정말 여러 번 읽고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동안 세월호 생존자들이 성인이 되었고 이십 대 후반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사회적 참사를 겪은 많은 당사자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이 사회는 자주 잊어버린 것 같아요. 잊으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호 참사 후 십 년이 지나는 동안 생존자들끼리도 만남을 가지기가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마음이 어떨지 짐작도 잘 되지 않아요. 올해 세월호 생존자와 형제자매 이야기를 담은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가 나왔고 그 책과 관련한 행사에서 시원을 다시 만났어요. 그 자리에서 시원은 “어른들이 차별이나 편견 없이 어린이와 약한 사람, 작은 동물을 배려해 주면 좋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어요. 그 당연한 말을 십 년이 넘게 반복했지만, 앞으로의 십 년은 조금 달랐으면 좋겠어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그날 2부 토크에서 이태원 참사로 동생을 잃은 누나에게 세월호 참사로 동생을 잃은 언니가 “이런 일이 또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무 빨리 왔어요.”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 순간, 저도 참았던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어요. 연이은 참사는 이제 무슨 일을 해야할까 무슨 일을 할 수나 있을까 무력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십 년 전의 무력감과는 조금 다른 것도 같아요. 시원처럼, 저도 이 일들이 나와 무관하지 않은 나의 일이라고 느끼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나눌 것이 있는지 둘러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꼬박꼬박 연극을 보러 다녀요.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 수전 손택이라는 사람이 쓴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의 부록에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어요.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손택이 한 말이에요. 그 책에서 던진 질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가?” 말하자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하지 말고 연대하자는 취지의 글인 셈이에요.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시원의 태도를 보면서 저는 이 질문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고 곧장 실천으로 옮겨가는 산뜻함에 감탄했어요. 어른들이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 망설이는 동안 시원은 무엇을 돌파해야 하는지 알려주듯 곧장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모습이 묘하게 힘을 주었어요. 아마 주희나 도연도, 또 무대에 함께 선 나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2014년 생> 공연의 관객 사백 명과 함께 만든 노란 리본은 거대한 리본이 되어 기억저장소에 갔다고 들었어요. 시원이 팽목항이 쓸쓸해 보여서 만들고 싶다고 했던 노란 리본은 하나의 마음이 되어 여러 사람에게 전달된 것 같아요. 제 마음도 거기 들어 있어요. 2014년에 태어난 시원은 미래에 태어날 아이들에게 세월호가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고 싶다고 했지요. 세월호를 과거의 사건으로 기억하지 않고 미래로 보낼 수 있다면, 그건 당사자가 되어 곁에 있는 사람들, 그 곁에 있는 다음 사람들, 그렇게 리본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세월호를 자기 삶에 넣고 그 이후를 살아가기 때문일 거예요.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뒤에 오는 슬픔은 그 사람을 잊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겠지요. <2014년 생>은 애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해준 공연이에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아이들을 잊고 잘 살라는 말이 더 가혹하게 들릴 거예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잊으라 말하는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소중했던 날들을 더듬고 잊을 수 없는 일들을 애써 잊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게 진짜 애도일 거예요.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의 흔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넓어져서 더 큰 세상을 그려볼 수 있을 거예요.

 

좁았던 어른 세계의 닫힌 문을 열고…

말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서 미안해요.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2014년에 태어난 시원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러니까 한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던 순간에 새로 태어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존재가 지난 십 년을 건너뛰지 않고 부조리와 모순을 차곡차곡 밟아나가는 모습을 볼 때, 그 힘이 다른 힘들과 연결되어 이 세계가 조금은 더 넓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고맙습니다. 좁았던 어른 세계의 닫힌 문을 열고 여기로 와보세요, 손 흔들어줘서 고마워요. 세월호 참사는, 이태원 참사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약하고 다른 존재들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가지요. 덕분에 약한 사람들과 더 약한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는 이 세계를 조금씩 넓혀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돼요. 시원이 어린이의 권리를 탐색하는 방식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듯, 각자의 방식으로 세월호를 기억한다면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순된 일들을 조금씩 해결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게 됩니다.

열 살이 된 걸 축하해요. 그리고 열 살 이후의 세상을 더 씩씩하게 살아가길 응원해요. 언젠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요즘 시원의 관심사와 그 관심사로 인해 더 다채로워졌을 시원의 세계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요. 그 속에 무수히 많은 세계가 겹쳐 있어서 우리가 우리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또 극장에서 만나요.

 

 

글·양근애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 경계에 파열을 일으키는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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