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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공화주의여! 정치를 바꾸는 청년들의 저항
아, 공화주의여! 정치를 바꾸는 청년들의 저항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4.07.3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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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2021 - 애런 존슨

“청년들이여! 언제나 정의와 함께 있으라. 그대들의 내면에서 정의의 관념이 희미해지는 날, 그대들은 파멸하리라.”

“아직 이해관계나 인간관계가 뒤얽힌 이전투구에 휩싸이지 않은 그대들, 아직 어떤 비열한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은 그대들, 순수와 선의로 목청껏 외칠 수 있는 그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정의의 완성을 위해 일어날 것인가?”

최근 영국과 프랑스에서 치러진 총선의 결과에서 문득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8일에 쓴 「나는 고발한다(J’accuse)」의 몇몇 대목이 떠오른 것은 극우적인 보수 반동의 기류를 강력 저지한 젊은 세대에게서 졸라가 간절히 바란 청년상(像)을 보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청년들은 최근 전국 곳곳에서 최루탄 가스 속에 “파시스트를 반대한다”면서 반(反)극우 시위를 벌였고, 영국 청년들은 보수당 정권의 무조건적인 이스라엘 지원과 미국 지지에 분노감을 표출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권력과 언론이 유대인 드레퓌스를 모함하고 간첩죄 누명을 씌울 때,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 재심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당시의 극단적인 극우 세태를 비난했다. 보수세력과 이들의 지원을 받은 일부 청년들은 졸라의 글이 실린 신문을 길거리에서 불태우고, 초상을 목매달았으며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여라!”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거나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했다.

하지만 졸라는 ‘청년들에게 고함’이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 청년들에게 정의로움을 잊지 말아달라고 당당히 호소했다. 청년세대가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와 자유는 윗세대가 피 흘린 투쟁의 대가로 이루어진 성과들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 달라는 졸라의 발언은 점차 청년들을 움직였다.

사실, 졸라의 말처럼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졸라의 조국인 프랑스에서는 1789년 전제군주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으로 시작한 대혁명이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지금의 공화국을 탄생시키기까지 수많은 혁명가와 민중들이 피와 눈물을 뿌려야 했고, 같은 시기 의회민주주의를 가져온 영국의 청교도혁명 역시 많은 이들의 희생을 요구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봉건제의 악습에 반대하고 인간해방을 주장한 동학혁명을 비롯해, 3·1 독립운동,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가까이는 촛불혁명 등 수많은 혁명적 거사에서 운동가들과 민중들의 저항과 희생 때문에 그나마 우리 사회는 가까스로 지금의 민주공화국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오해 마시라! 우리의 ‘공화국’은 북한의 전체주의적 인민공화국과 구별하기 위해, 민주공화국이라고 명명한다).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지구촌을 강타하면서, 민중들이 숱한 피를 흘리며 발전시킨 각국의 공화주의는 자본과 권력이 강고하게 결합한 보수적 과두제로 인해 하나둘씩 파탄에 이르고 있다.

공화주의는 원래 주권이 인민에게 있고, 인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인민의 인권과 이익을 위해 국정을 행하며, 국가원수가 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일정한 임기로 교체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영국은 아직 군주제이지만, 왕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어서 실제적으로는 인민의 인권과 이익을 중시하는 공화주의 체제에 가깝다.

자본과 권력의 지배를 받는 보수적 과두제는 극단의 증오 정치를 낳는다. 보수적 과두제는 극소수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가진 자에게 유리한 세제개편, 약자와 이민자를 조롱하는 반사회정책을 일삼으며 계층 간 대립과 갈등을 부추긴다. 보수세력의 기득권화는 극단의 증오 정치를 가져온다. 미국과 유럽,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극단의 증오 정치로 얼룩진 유럽 정치를 청년들이 저지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특히 노골적인 인종 정책으로 유럽의회에서 돌풍을 일으킨 프랑스 국민연합(RN)의 위세가 젊은이들이 연대한 특유의 ‘공화주의 전선’에 힘입어 어김없이 꺾였다. ‘공화주의 전선’이란 극우 세력의 집권 저지라는 목표 아래 이념을 초월해 정치 세력이 하나로 연대하는 현상을 말한다. 한때 나치 치하의 치욕적인 역사를 경험한 프랑스에게 ‘공화주의 전선’은 프랑스만의 독특한 연대의식을 일깨웠다. 청년들이 곳곳에서 극우 세력의 급부상에 위기감을 느껴 힘을 합쳤다.

임기가 3년이나 남은 마크롱 대통령이 프랑스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이라는 극약처방을 선택한 이유는 유럽연합(EU) 의회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극우 세력인 국민연합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극우파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은 프랑스에 할당된 81석의 유럽의회 의석 중 30석을 가져갔다. 반면 마크롱 대통령의 르네상스(RE)는 겨우 13석을 얻었다.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 가다간 차기 2027년 프랑스 대선을 극우정당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치는 오욕의 인물로 낙인될 판이었다.

마크롱의 위험천만한 결단은 2024 파리올림픽을 2주가량 앞두고 치러진 탓에 ‘자살골 아니냐’는 비아냥과 조소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의 결단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지지율 1위를 달리던 극우 국민연합은 3위로 내려앉았고 대신 2위에 그쳤던 장뤼크 멜랑숑의 좌파연합 신민중전선(NFP)이 깜짝 1위에 올라섰다. 위기의 범여권은 2위로 기사회생했다. 마크롱은 ‘폭망’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반쪽짜리 승리’를 거뒀다.

극적 반전의 배경엔 ‘공화주의 전선’이 있었다. 마크롱은 일찍이 이걸 계산해뒀다면, 22년 전의 공화국 전선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2002년 대선에서 연임에 도전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마린 르펜 현 국민연합 대표의 부친이자 원조 극우의 상징인 장마리 르펜 후보를 상대로 싸운 결선에서도 합리적인 좌우 세력이 연대한 공화국 전선이 위력을 발휘했다.

또 2017년 마크롱 대통령과 마린 르펜 후보가 결선에서 맞붙었을 때, 2022년 대선에서 두 사람이 재대결을 펼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좌파 진영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너무 얄밉지만, 밉더래도 극우 세력에게는 표를 주지 않겠다는 심리가 작동한 탓이다.

영국 총선에서 제1야당인 노동당이 14년 만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정권을 되찾은 것도 청년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에 힘입은 바 크다. 2020년 보수당의 극우적인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침체된 경제 상황에서 영국 청년들은 에라스무스 제도를 통한 유럽 대학 교환학생 불가, 유럽 국가 인턴 및 취업 기회 박탈 등 과거 자신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빚은 현실의 암담함에 분노해왔다. 하원 650석 가운데, 노동당이 412석을 차지해 과반을 훨씬 넘긴 반면, 집권 보수당이 121석으로 기존 의석보다 250석을 잃고 참패한 것은 영국 청년들의 정치참여가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 출범한 영국 노동당 정부는 유럽연합 탈퇴 이후 처음으로 EU 회원국과 양자 정상회담에 나서는 등 보수당 집권 14년 동안 파행으로 치달은 대외관계의 정상화에 나서고 있다. 영국 노동당 정부는 최근 의회 공식 개원식에서 사회기반시설과 주택 건설을 늘려 침체한 영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은 웨스트민스터궁(국회의사당)에서 킹스 스피치(국왕 연설)를 통해 “노동당 정부는 지속적 경제 성장을 추진하고 주택 부족, 에너지 등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서비스 중심의 정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찰스 3세의 연설을 통해 발표된 노동당 정부의 40개 주요 법률 제정 계획을 보면, 사회기반시설 확충을 통한 성장 정책 외에 노동자의 권리 부문 강화 등 사회 정책 강화가 주요 골자다.

특히 최소 노동시간을 설정하지 않아 노동 착취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제로아워 계약’ 폐지, 취업 첫날부터 출산휴가와 유급 병가 허용, 사용자에게 유리한 근로 계약을 위한 ‘해고 후 재고용’ 금지, 노조 활동에서 불필요한 제약 철폐 등이 추진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전도사 격인 <파이낸셜 타임스> 같은 경제신문은 영국의 낮은 경제성장률과 생산성, 주요 7개국(G7) 중 최저 수준인 투자, 높은 공공부채 등의 상황을 들어 노동당의 비전에 벌써부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지지층은 새 정부의 ‘국가의 복원’에 압도적인 응원을 보내고 있다.

유럽 정치의 흐름을 주도하는 프랑스와 영국에 좌파의 바람이 동시에 거세게 분 것은 1997년 영국 토니 블레어 정부와 프랑스 리오넬 조스팽 정부의 등장 이후 처음이다. 두 나라를 휩쓴 좌파 바람이 앞으로 치러질 각국의 총선에서 ‘우경화한 극보수 정권들’을 교체시키는 태풍으로 작용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극단화한 정치권력에 경종을 울릴 것으로 보인다.

극단화한 정치권력의 증오 정치는 지구촌 곳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미국에서 발생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를 겨냥한 암살 시도 총격 사건은 증오 정치가 불러온 비극이다. 용케 총알의 관통을 피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피범벅인 채로 주먹을 불끈 쥐고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를 외치며,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증오를 부추겼다.

일국의 지도자로서 무모한 짓이지만, 지구촌에는 증오를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삼는 극우 정치 지도자들이 득세한다. 3년 가까이 소모적인 전쟁으로 수많은 자국민을 사지에 내몬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 1년 가까이 테러 행위와 ‘제노사이드’를 자행하는 하마스 세력과 이스라엘 네타냐후 대통령, 명분 없는 이 두 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미국의 ‘동맹’ 지도자들은 “더 이상 전쟁은 안된다”는 자국민의 간절한 외침에 귀를 닫는다. 선거가 치러지지만, 극우 정치 지도자들은 좀체 자리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지하의 에밀 졸라를 되살려 125년 만에 「나는 고발한다」를 다시 쓰게 한다면, 다음 문장을 빨간 고딕체로 강조하며 ‘지구촌 공화주의’를 지켜내려 하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한평생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몰두해온 자들이 권력의 단맛에 더 취하고자, 평생을 다 바쳐 공화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재와 싸운 사람들을 청산되어야 할 ‘구악’이나 ‘좌빨’로 매도하는 우리 현실에서는 가슴 깊이 새겨둘 만한 경구다.

“청년들이여! 언제나 정의와 함께 있으라. 순수와 선의로 목청껏 외칠 수 있는 그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정의의 완성을 위해 일어날 것인가?”

 

 

글·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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