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호 구매하기
[안치용의 문화 톡톡] 아름다움의 묵시와 임박한 종말에 관하여
[안치용의 문화 톡톡] 아름다움의 묵시와 임박한 종말에 관하여
  • 안치용(문화평론가)
  • 승인 2021.07.19 02: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68년 미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에서 한 실험이 시작된다. 실험 책임자는 존 B 칼훈 교수로 쥐 생태 연구자였다. 칼훈 교수는 가로ㆍ세로 2.7m, 높이 1.4m의 공간을 만들어 노르웨이 야생쥐 4쌍을 입주시켰다. 이곳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쥐 유토피아였다. 먹을 것과 물을 무한정 공급하였고 고양이 등 천적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았다. 유일한 제약은 가로ㆍ세로ㆍ높이로 구성된 공간의 크기였다.

쥐들은 예상대로 이 지상천국에서 번성하였다. 개체수가 55일마다 두 배로 늘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쥐들의 지상천국은 스스로 붕괴하고 말았다. 실험결과 유토피아 창조 315일째에 개체수가 620마리를 기록한 것을 정점으로 이후 개체수는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유토피아 창조 600일째에는 이 지상천국에서 최후의 쥐가 태어난다. 600일째 출생한 이 노르웨이 야생쥐 이후로는 전혀 번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315~600일 사이 쥐 유토피아에서 노르웨이 야생쥐 사회의 참담한 붕괴가 목격되었다. 사회구조가 파괴되었고 개체들에게서 집단생활을 유지할 때 나타나는 정상적인 사회행태가 소멸하였다. 어린 쥐는 제대로 양육되지 못한 채 성장하기 전에 가정에서 내쫓겼다. 이 과정에서 어린 쥐들은 다치거나 죽었다. 인구가 과밀해지면서 수컷들은 자신만의 고유 영토와 암컷을 확보할 수 없었고 아예 지킬 것이 없으니 당연히 지킬 수도 없게 되었다. 일부 수컷들은 미숙한 쥐에게 성적으로 접근하거나 동성애에 빠져들었고, 암컷들은 새끼를 돌보지 않았고 교미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암컷들에게서 유산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어쩌다 새끼를 키우는 암컷이 있으면 수유를 저지당하고 새끼가 공격받는 등 육아에 무차별적인 방해가 가해졌다. 무엇보다 쥐사회 내에서 폭력성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는데, 특이하게도 폭력은 공격적인 방향으로 고착되는 양상을 보였다. 방어는 포기하고 공격에 전념하다 보니 쥐들은 서로 물어뜯는 데 혈안이 되었다. ‘피투성이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암컷들은 새끼를 낳지 않게 되었고, 출생률이 0을 기록하면서 쥐 사회는 외부의 침탈 없이 자멸하고 만다.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독자마다 언뜻 자신이 속한 조직을 떠올릴 법하다. 혹자는 자신의 인생경로를 대비시킬 수도 있겠다. 크게 보아서는 지구촌이 이 실험공간과 다르지 않다. 다분히 재미삼아 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나는 이 지구란 곳이 어쩌면 인간 종보다 월등하게 지적 수준이 높은 외계생명체가 만든 실험장이 아닐까 가끔 상상한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지구 입장에서는 인간이 암세포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이 지구를 지배하는 또는 지배한다고 믿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더불어 지구의 이 지배적인 생명 종과 관련하여, 칼훈 교수의 실험실에서 나타난 것과 유사한 양상이 지구촌을 무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진단이 잇따르고 있다.

칼훈 교수의 야생쥐 실험을 자연스럽게 <인구론>의 맬더스로 연결짓는 해석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실험실의 노르웨이 야생쥐 역법(曆法)으로 실험 며칠 째를 맞고 있는 것일까. 315일에 도달하였을까 아니면 목전에 두고 있을까. 어쩌면 600일에 더 근접한 것은 아닐까.

 

칼훈 교수의 실험은 맬더스 묵시록의 구현이란 측면에서 충분히 흥미롭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이목을 집중시키는 대목을 포함한다. 바로 아름다운 자들(the beautiful ones)’로 불리는 일단의 쥐들이다. 피투성이의 이 세기말적 쥐 집단에서 한 눈에 구별되는 개체들이 아름다운 자들이었다. 그들 세상이 종국으로 치달으면서 등장한 이 수컷 무리는 실제로 외양이 아름다웠다. 이 쥐들은 짝짓기 경쟁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그러니 암컷을 두고 서로 싸울 일이 없어졌다. 집단에서 떨어져 혼자 먹고 마셨고 잠도 따로 떨어져 잤다. 공격성을 발휘해 다른 쥐들을 물어뜯는 대신 자신의 털을 다듬으며 말하자면 자아의 성찰과 실현에 전념하며 살았다. 털에 윤기가 흘렀고 스트레스로부터 원천 차단되어서인지 건강하기도 건강하여 자연히 보기에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암컷 쥐들이 나중에 해부한 결과 적잖게 암에 걸린 것으로 나타난 현상과 대조적이다. 이렇게 칼훈 교수가 아름다운 자들이라 명명한 새 족속이 탄생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당대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짝짓기에 무관심하니 아름다운후손을 보는 일은 아예 불가능하였다.

이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자. 비유를 확장하면 실험실이 지구일 수 있고, 대한민국일 수 있으며, 개인별로 몸담은 조직일 수 있다. 지구온난화를 떠올리면 실험의 진행과정이 지금 인류가 초래한 상황과 많이 닮아 있다. 우리 사회의 상황은 더 많이 닮았다. 특히 서로 물어뜯는 데 몰두하는 게 여지없이 한국 사회다.

내가 재미 삼아 해본 상상대로 만일 인류가 외계 고등 지적생명체에 의해 지구라는 실험실에 넣어진 노르웨이 야생쥐 같은 처지라면 사실 이 아귀다툼에서 속수무책이다. 상황을 인식한다고 하여도 근본적인 제약조건인 공간을 어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쥐들이 대표를 뽑아 칼훈 교수와 협상을 벌여 난국을 타개하는 것 같은 해결책을 상정할 수 있겠다. 어차피 재미 삼아 내놓는 해결책이라면 쥐들이 실험실에서 국가를 수립하고 관료제와 치안경찰을 도입하는 통제의 방안도 거론할 수 있다. 하지만 실험실의 쥐나 지구의 인간이나 합리적이고 조화로운 삶을 모색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쥐들은 국가와 같은 통제제도를 세울 수 없어서, 인간은 그런 제도를 너무 많이 세워서 희망을 잃어버린다. 그저 지금 우리를 포함한 인간들에게 주어진 삶이 묵시록적인 실험을 위해 조성된 것이 아니기를 바라자.

실험실이 아니라 한들 우리가 처한 아수라장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칼훈 교수의 쥐실험실에서 실험을 위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공간만은 아니었다. 추가적인 실험을 위하여 음식이나 암컷ㆍ수컷의 숫자 등을 제한할 수 있다. 인간 사회에 주어지는 제약은 훨씬 더 많다. 외계 고등 지적생명체가 개입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발적으로 다양한 유형의 실험실들을 창안해내어 우리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제약(制約), 통제(統制), 또는 더 자본주의적인 용어로 희소성(稀少性)은 우리 삶의 근간을 형성한다. 비근한 예로 기업에서 임원 자리를 두고 벌이는 경쟁을 들 수 있다. 재벌 그룹에서는 한 해 수천 명이 입사하지만 한 해 임원이 되는 숫자는 수십 명에 못 미친다. 임원 승진 경쟁은 쥐실험과 달라서 자기붕괴 프레임을 적용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다. 그렇긴 하지만 입사하여 회사생활을 하다가 임원경쟁을 거쳐 퇴사하는 과정에 쥐실험실의 자기붕괴와 유사한 속성이 발견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명백하게 다른 게 있긴 하다. 특이한 쥐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자들이 인간 사회에는 거의 드물다. 비유컨대 작고한 법정 스님 정도가 아름다운 자로 불릴 수 있을까(‘아름다운 자가 쥐라는 사실을 근거로, 법정 스님을 모독하는 비유라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사의 스님, 그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름다운 자들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기업에 필적할 수준으로 세속화한 요즘 한국의 교회와 절에서는 세속에서보다 오히려 아름다운 자들을 찾기 더 힘들어졌다. 그렇다면 쥐세상 말고 인간세상에서, 도대체 아름다운 자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자는커녕 피에 굶주린 자, 굶주린 수준이 아니라 하여도 어쩔 수 없이 피 묻힌 자, 그런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게 실상이다.

그 까닭은 우리 사회에는 실험실의 쥐 사회에 비해 훨씬 더 체계적이고 강력한 통제체계가 작동하고 있어 아름다운 자들이 아름다운 채 살아가도록 결코 내버려 두지 않는 데 있다. 과거 관조와 성찰은 지식인의 존중받는 특권이었으나 지금에서는 무위도식쯤으로 취급받는다. 역으로 무위도식은 지식인의 존립기반이었다.

바다 속에서 복어는 그 치명적 독성으로 인하여 유유자적 아름다운 물고기로 존재할 수 있었으나, 복집에서 복어는 제독된 맛있는 생선에 불과하다. 전채 비슷하게 상에 오르는 복어 껍질은 유유자적에 대한 상징적 징벌이라 할 수 있다. 잘게 잘려 적당하게 간이 밴 복어 껍질에서는 어떤 바다냄새를 맡을 수 없고 어떤 유영(遊泳)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리된 복어 시체의 껍질을 통하여 짐짓 바다의 기억을 맛있게 씹어댄다.

무위도식하며 근본적 성찰에 몰입하는 소위 지식인은 복어껍질보다 못한 존재다. 분초를 쪼개가며 알량한 실용지식을, 그것도 복제품으로 팔아먹는 소위 전문가나 복어껍질에 근접할까. 무위가 허락되지 않고 성찰이 불필요한 시대에 지식인 혹은 지식인 류 삶의 태도는 눈에 보이는 족족 삭제된다.

원초적으로 복어는 우리보다 나은 존재다. 복어와 달리 우린 아름다운 자로 살아갈 기회마저 애초에 박탈당하였다. 물고기로 치면 복어 급()에 턱없이 미달로, 우린 애초에 식탁에 오를 운명으로 태어난 수조 안 양식생선에 불과하다. 독 같은 것을 지니지 못하였고 무위도식은 물론 잠시의 유유자적에도 수치심을 느낀다. 안달복달ㆍ좌고우면하며 옹색하게 헤엄치다가 수조 안에서 물 밖으로 뛰어올라 자진해서 조리냄비 안으로 스스로를 헌납하는 연가시에 사로잡힌 꼭두각시 생선이다. 그러한 형편이니 인간 삶이란 게 복어의 삶은 물론 쥐의 삶보다 못해도 한참 못한 것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논의의 편의를 위해 복어는 논외로 하고, 쥐세상의 난장판으로부터 철두철미하게 고립하여 아름다운 외양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특정한 쥐들의 행태가 과연 아름다운 삶을 구성하는지 의문이 든다. 모두 인간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하는 말이지만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다운 개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일일까. 인간사의 아이러니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세상에서 혹시 나 홀로 아름답게 살아갈 기회를 얻더라도, 그것을 마다하고 기어이 세속의 분진을 흠뻑 뒤집어쓰는 바보스러움에서 목격된다. 쥐세상에서는 아름다운 털 때문이었지만 인간세상에서는 아름답지 못한 세상에서, 그런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생각하기에, 아주 드물게 아름다움을 도모하기까지 하기에 아름답다는 표현이 성립한다. 청산에 산다고 인간이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그저 청산이 아름다울 뿐이다. 인간을 보고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진짜 아름답다고 할 때는 모습과 지위가 아닌 심상과 통찰력을 보고 하는 말이다. 털이 아니라 정신이 아름다운 것이다. 어차피 쥐는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아름다운 존재로 자각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자들이란 명명 또한 다른 생명 종인 사람에 의한 것이니 외관 말고 달리 근거로 삼을 게 없다.

다시 생각이 꼬리를 물어 외계인 실험설로 돌아가면, 쥐 실험실이나 다름없이 엉망진창인 이 인간세상에서 불가능한 아름다움의 틈새를 기어이 찾아내려고 애쓰는 우리 중 아주 일부를, 외계 고등 지적생명체가 관찰한다는 가정 하에, 그 일부에게 외계인들은 그들의 언어로 어떤 이름을 붙일까.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자들이기를 예상한다면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발상임이 분명하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