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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트럼프는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 박종호 l 뉴욕주립대 정치학박사
  • 승인 2024.02.2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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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3년 11월 19일 아이오와주 워털루에서 열린 선거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뉴스1

뉴욕 맨해튼에서 북서쪽으로 4시간을 꼬박 달려 도착한 도시 이타카는 아이비리그에 소속된 코넬 대학교가 위치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20년 8월 코로나19의 기세가 한창이던 당시 이타카는 도시 전체가 유령처럼 고요한 분위기를 풍겼다.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이 맞붙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약 두어 달 정도 남긴 시점이었는데, 평소였으면 시끌시끌했을 대선 분위기를 오히려 한적한 캠퍼스 주변의 주택가에서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널찍한 차도 양편으로 늘어선 목조 주택 앞마당에는 바이든을 지지하는 작은 팻말이 차도를 따라 죽 늘어서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바이든을 응원하는 분위기로 느껴졌던 탓인지, 당시 동행했던 동료들은 의식적으로 트럼프를 응원하는 팻말을 찾으려고도 했었다.

반전의 분위기는 오히려 3년이 넘어 올해 1월 다시 방문했던 이타카에서 그 일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잘 정돈된 중심가를 지나 남쪽 고속도로로 빠지는 언덕을 중심으로 트럼프의 이름이 걸려있는 팻말이나, 정원 가로수에 걸려있는 공화당 깃발 등이 자주 눈에 띄었다. 민주당 텃밭이나 다름없는 뉴욕에서는 다소 의아한 광경이었다. 특히 뉴욕의 북동부 캠퍼스타운은 젊은 고학력자 인구가 대부분이어서 항시 민주당 지지율이 80% 후반을 기록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뉴욕주립대학교(빙엄턴)의 조나단 크라이스너 교수는 최근 미(美) 중서부 정치학회에서 “같은 뉴욕주 안에서도 서비스업이 중심인 남부와 전통적인 제조업 기반이 몰려있는 북부는 정치적 지향점이 다르다”며 “올해 하원의원 선거에서 이 차이가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로 죽고 사는 트럼프

이날 코넬대학교에서 열린 원탁회의에서는 뉴욕주립대학교(빙엄턴)와 로체스터 대학교의 교수들이 만나 올해 열릴 미국 대선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는 로체스터 대학교의 신진 학자인 베타니 라시나 교수였다. 그녀는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을 통과한다면) 민주당은 지난 대선과 같은 전략을 취해서는 곤란하다”며 “코로나 19와 관련된 정책 실패를 거론하는 것은 별 소득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코로나 19는 더 이상 트럼프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트럼피즘(Trumpism)은 코로나 19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고 일갈했다. 민주당은 트럼프가 부상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을 현재까지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의를 주관했던 크라이스너 교수 역시 “코로나 19 종식 이후의 미국은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기에 더욱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라며 말을 보탰다. 

트럼피즘은 과거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 및 이념을 의미한다. 트럼프의 정치 성향은 이전부터 파악되었으나 이를 트럼피즘으로 지칭한 것은 2020년 대선을 전후해서다. 당시 트럼프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역대 최다득표 낙선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이는 몇몇 학자들에게 트럼프가 아닌 그의 지지자들을 더욱 주목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벌어진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은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그것은 미국 정치의 당파성(partisanship)이 양극단에 치달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트럼피즘의 기반은 고도화된 민주주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낙오되는 저학력, 저소득층 하층민이다. 자본주의와 지구화의 영향으로부터 오래 노출된 사회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이성적 합리주의를 내걸지만,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양극화가 고착되기 쉽다. 이로 인해 사회의 ‘낙오자’들은 기성 정당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진보 정당들 역시 도시 전문직 및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하느라,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제조업 임금 노동자나 소규모 자영농들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민주당도 인구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도시 전문직 및 서비스업 종사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통적인 노동자들의 처우에는 놀랍도록 무관심했다. 정치학자이자 언론인인 토마스 프랭크는 저서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에서 “민주당에 대한 지지층 이반이 트럼프의 등장을 낳은 구조적인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의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가 오래된 유럽에서도 소외 계층을 포섭하려는 ‘포퓰리즘’의 기승을 여러 차례 목격해 왔다. 유럽 사회학계의 거두인 한스피터 크리에지 유럽연합대학원(EUI) 교수는 이전부터 지구화로 인한 승자와 패자는, 종교나 민족같이 정치적인 피아(彼我)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주장해왔다. 물론 미국의 경우는 이와는 다소 다른데,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로 대표되는 ‘능력 사회’의 무형적 가치와 무관치 않다. 

크라이스너 교수는 “능력만 있으면 이방인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가치였지만, 이는 특출난 능력이 없는 서민들의 희생 하에 가능했다”라며 “서민들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미국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고 짚었다. 

 

트럼프의 재난지원금을 못 잊는 유권자들

미국 사회 내 만연했던 공교육의 질적 저하와 더불어 고급인력의 수입 기조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이어졌고, 이는 ‘화이트 푸어’의 주변화로 이어졌다. 이 와중에 코로나 19가 미국 사회를 강타했고 현재는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각종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며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팍팍해졌다. 예산정책우선순위센터(CBPP)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전체의 9%가 지난 일주일 동안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녀가 있는 가구에서는 이 수치가 12%까지 뛰었다.

지난해 11월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최근 미국인의 29%는 에너지 요금을 납부하기 위해 기초 생필품에 대한 지출을 줄인 경험이 있다고 한다. 아울러 자동차가 필수품인 미국인들에게는 휘발유 가격 상승도 상당한 타격이다. 휘발유 가격은 뉴욕 기준으로 현재 배럴당 3.5달러 안팎으로, 불과 1년 사이에 50% 이상 올랐다. 코로나 19 이전 기준으로는 두 배에 육박하는 수치다.

학술대회에서 만난 한 박사과정생은 조만간 이타카를 떠날 것이라고 했다. 북동부 이타카의 경우 물가가 아주 비싼 편은 아니지만, 생활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고자 고향으로 돌아가 논문을 끝내겠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코로나 19가 시작되었던 2020년 빙엄턴대학교에 입학한 박사과정생 6명 중 현재 캠퍼스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학생은 1명에 불과하다. 

대학원생을 제외하더라도, 물가 상승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대부분 저임금 근로자와 육체 노동자다.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로체스터 대학교의 알렉산더 리 교수는 반쯤 장난삼아 “(대학원생을 포함해) 이들 모두가 트럼프를 지지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월 NBC는 과거 IBM의 공장 노동자로 일했으며, 지금은 월마트 계산원으로 일하고 있는 한 백인 남성의 인터뷰를 전했다. 그는 “코로나 19 당시보다 지금이 훨씬 더 살기 힘들다”며 “트럼프는 최선을 다했다. 물가도 물가이지만 재난지원금(stimulus check) 덕분에 당시에는 당장 먹고 살 생필품 구입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USA today>(2024년 1월 13일) 역시 ‘민주당은 아직도 트럼프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사설을 실었다.

라시나 교수는 “당시에는 모두가 힘들었다”며 “그러나 코로나19의 종식 이후 빈민층들은 코로나 이전보다 더욱 혹독해진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무리한 정책은 지지자들이 원했던 것”

2016년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몰고 왔던 미국 정치지형의 변화를 분명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양당 간에 성문화되어있지 않았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준수해온 ‘게임의 법칙’의 완전하고도 철저한 파괴였다.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랏은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현재까지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켜온 힘은 그들의 제도가 아닌 선진적인 정치 문화에 있다고 말한다. 정당 내부에서 캠페인 과정에서 극단주의를 거를 수 있어야 하며, 정당은 서로를 화해와 타협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정당들 사이에는 ‘아무리 이기기 위해서라지만 이런 짓까지는 할 수 없다’라는 최소한의 상식선이 존재했다는 의미다.

트럼프의 시대는 서로 간에 지켜져 온 일종의 관습 헌법들이 철저히 부정당한 시대라는 데 전문가들은 의견을 같이한다. 레비츠키와 지블랏은 “공화당은 당장의 승리를 위해 트럼프를 받아들였지만, 당선 직후 그에게 철저히 배신당했다”라며 “행정부를 견제하는 입법부의 기능은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평했다. 트럼프는 공화당의 정당 조직을 무시한 채 무차별적인 행정 명령을 통해 민주주의의 제도적 완충장치를 해주는 기구들을 무력화시켰다. 사법부, 검찰, 감사원, 선관위 등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붕괴된 것도 이 시기다.

크라이스너 교수와 라시나 교수는 “트럼프의 무리한 정책은 지지자들이 원했던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트럼프 역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지자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며, 그들이 지지를 거둘 시 그는 즉시 자의든 타의든 간에 백악관에서 물러나게 될 수밖에 없다. 두 교수는 “미국의 정당 조직은 오랜 시간 대단히 견고해졌으며, 나쁘게 말하면 양 당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지지자들의 요구를 수용할 적응력을 상실했다”고 설명한다.
기성 정치인들과 정당 조직에 실망한 빈곤층으로서는 ‘새롭고 강한’ 인물에 쉽게 끌리기 마련이다. 

로체스터 대학교의 잭 페인 교수는 “플로리다 주의 주지사인 론 드산티스를 보라”고 말했다. 드산티스를 비롯한 잠재적 당권 후보자들은 무너진 정당 조직을 재건하는 일보다, 트럼프가 남기고 간 지지자들을 흡수하는 일에 더 열중했다는 설명이다. ‘상호 자제’와 ‘제도적 자제’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보다 극단적인 언행과 공약으로 소셜미디어에서 지지를 얻는 편이 더 쉽고 매력적인 선택지라는 계산에서다. 

트럼프 같은 ‘아웃라이어’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면, 흔히들 그를 벤치마킹하려는 도전자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전임자와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더욱 극단화되는 경우도 흔하다. 실제로 드산티스를 둘러싼 LGBTQ 혐오 발언 및 디즈니와의 법정 공방 등은 공화당 내부에서도 큰 지지를 받지 못한 ‘돌출 행동’이었다. 오히려 트럼프는 낙태나 동성애와 관련해서는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페인 교수는 “트럼프는 자신보다 더 극단주의적인 후보자들이 활약하기 좋은 환경을 구축해 놓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드산티스는 트럼프의 시기에서 탄생한 부산물이다.

 

“트럼프가 올해 당선된다면” vs. “미래는 모르는 일”

전문가들은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의 2024년 당선이 위험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가 같은 방식으로 두 번이나 성공한다면, 이제 그러한 방식은 야심만만한 정치적 ‘기업가’들에게 일종의 필승 노트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났다. 빙엄턴으로 돌아가는 길을 크라이스너 교수와 함께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가족을 학생들에게 자주 소개할 정도로 학생들과 격 없이 지내는 사이로 유명하다. 학생들이 이타카 시내를 빠져나가며 민주당에 대해 다소 냉랭했던 도시의 분위기를 전하자 그는 “우리 어머니도 안심하실 수(?) 없다”며 운을 뗐다. 그의 어머니는 헨리 트루먼 시절부터 단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평생을 늘 민주당에 투표했다고 한다. 

그는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이 모두 득세하는 유럽의 예를 보았을 때, 미국 민주당 내에서 트럼프 같은 인물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며, “트럼프가 올해 대선에 당선된다면, 민주당 역시 제도권 밖에서 성장한 포퓰리즘적 인사를 찾을 수 있다”고 예측했다. 

물론 가능성이 낮은 미래다.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당내 계파들의 이해관계가 내부 규율을 통해 잘 수렴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크라이스너 교수 역시 “민주당 내에서 급진적 사회주의적인 계파가 갑작스레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군가가 “1970년대 이전에는 공화당이 사회 진보적인 이념을 제시하던 정당이었다”며 “미래는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다. 동승했던 베타니 교수도 “트럼프도 1년 남짓한 시기 만에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며 “공화당이라고 그런 규율이 이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모두 다시금 생활비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이타카에서 빙엄턴으로 돌아가는 79번 도로의 한편으로 공화당 후원금을 모집하는 광고가 스쳐 지나갔다. 

 

 

글·박종호
뉴욕주립대(빙엄턴) 정치학 박사. 석사 시절부터 연방주의와 분권화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최근에는 정치 제도 및 정책의 구조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에 관한 메카니즘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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