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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대신 눈빛과 손짓을 남기는, <길위에 김대중>
진실 대신 눈빛과 손짓을 남기는, <길위에 김대중>
  • 송상호 | 영화평론가
  • 승인 2024.03.29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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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길위에 김대중>

한 청년 사업가가 정치판에 뛰어든 뒤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온몸으로 견뎌낸다. <길위에 김대중>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되기 전 김대중의 모습이다. 대개 관람객은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다큐를 통해 몰랐던 비화나 생애를 알 수 있어 감명을 받았다든가 교과서로 볼 수 없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는 등의 감상을 내놓는다. 물론 <길위에 김대중>을 토대로 실존 인물의 삶에 가까워지는 일도 좋지만, 그보다 흥미로운 일이 있다면 다채로운 푸티지 속 김대중이 마치 극영화의 배우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찾아내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표정과 몸짓의 존재감

그걸 위해 붙잡아야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이번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 옥중 연설이나 미국 연설 장면 따위의 영상에도 물론 눈길이 갈 수 있겠다. 또 해당 작품이 5개월간 12시간씩 검토해 제작됐으며,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기획이 본격 제작에 들어가면서 탄생 100주년에 개봉할 수 있게 된 비화도 흥미롭다. 김대중에 관한 1,700시간 가량의 자료를 전부 뒤적인 끝에 선별된 영상들을 밀도 있게 세공해낸 편집 역시 이목을 끄는 지점들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진정 매달려야 하는 영역은 따로 있다. 바로 화면 속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에 서려 있는 굳은 의지나 몸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단 따위의 것. 다시 말해 재서술되고 재구성된 김대중의 행적이 아닌, 표정과 제스처가 머무는 그 찰나를 파악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그 이유는 <길위에 김대중>이 수많은 이미지의 연쇄로 관객과 만난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먼저 영화에 동원된 스코어부터 재즈의 질감이 묻어나는 선율이 넘실댄다는 점에 주목하자. 분명 우연이 아니다. 사진과 영상의 조합이 빚어내는 활력의 리듬을 음악 역시도 함께 발맞춰 따라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결국 영화를 따라가는 관객들은 감각 기관의 자극 자체에 사로잡히는 여정에 몸담는다. 영상과 사진 속 인물에게 묻어나오는 비언어적 표현이나 실루엣이라든지, 실제 인물의 음성이 매개하는 당대 시공간의 분위기 같은 요소가 감상의 척도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관객들은 서사 속 정보를 취합 및 선별해 인물을 판단하고 파악하는 작업과 자연스레 멀어진다. 결국 <길위에 김대중>은 실존 인물의 행적을 좇는 다큐멘터리지만 한편으로는 극영화의 화법을 일정 부분 녹여내는 유연한 면모를 보여주면서 객석의 감상을 능동적으로 가꿔준다.

이때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길위에 김대중>이 몇몇 장면을 재연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공들여 찍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고, 아무리 봐도 재연이 티가 나도록 촬영됐다. 실제 푸티지를 찾을 수 없었거나 찾아낸 자료를 활용하기 힘든 상태였을 확률이 높다. 어느 쪽이든 <길위에 김대중>이 역사를 재서술한 구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점에 주목하자. 푸티지를 활용할 수 없었다면, 보이스 오버로만 서술하거나 사진을 배치하거나 각종 편집술에 의지했어도 문제 삼을 이는 아무도 없다. 어차피 다큐멘터리는 그런 장르가 아닌가. 그렇지만 <길위에 김대중>이 몰입도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는 재연 장면을 굳이 끼워 넣었다는 게 흥미롭게 느껴진다.

재연의 목표는 명료하다. 인물이 프레임을 메워 존재감을 발산할 때 비로소 파급력이 생겨난다는 창작자의 판단이 있었을 테다. 그 어떠한 수단으로도 인물의 표정과 육체를 대체할 수는 없지 않나. 그게 김대중 본인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영화에 재연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길위에 김대중>이 역사 기반의 서사보다는 인물이 뿜어내는 이미지에 몰두하는 영화였다는 걸 더욱 강조하게 되는 셈이다.

다큐멘터리의 재연에 관해 환기하는 이 논의는 사실 1월 개봉 이후 <길위에 김대중>이 미디어 환경에서 언급되거나 소환됐던 방식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관람층이나 관심을 드러내는 관객들에겐 이 영화가 자연스레 정치 도구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인물에 대한 맹목적인 찬사나 비판 등 어느 한 편의 의견으로만 점철된 유튜브, 커뮤니티의 반응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렇지 않나. 물론 관객 수 12만의 <길위에 김대중>은 연일 입방아에 올랐던 관객 수 115만의 <건국전쟁>처럼 이슈 몰이가 뚜렷하진 않았으나, 이 영화 역시 지지 세력이 있고 그 대척점엔 폄훼 세력이 있다는 점에서 언제든 휘말릴 여지가 생긴다. 그러기에 <길위에 김대중>은 이미 영화를 둘러싼 외부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됐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길위에 김대중>의 내부에서 응시해야 할 요소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1987년 9월 광주 망월묘역을 방문해 시민들을 만나는 김대중을 담아내며 끝난다. 광주를 가득 메운 군중들과 그 사이 길 위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또 소통하려는 한 정치인의 모습. 영화 내내 이어졌던 내레이션과 주변인의 인터뷰가 잠시 사라진 영역에는 오로지 자료화면만 송출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사실과 맞닿은 역사를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연출과 편집으로 점철된 영화를 보고 있는 걸까. 이때 중요한 건, 뻔하게 들리겠지만 다큐멘터리가 진실과 동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길위에 김대중> 역시 민환기 감독이 김대중의 삶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산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영화 <길위에 김대중>

 

진실 대신 인물의 주변부로 향하는

여기서 역설이 나온다. 실존 인물 김대중에 가까워지려는 작업들은 오히려 김대중 그 자체보다 그의 주변부를 맴도는 무언가로 우리를 이끈다. 아무리 수면 위로 건져내지 못했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그 많은 영상 자료를 훑고 사실을 재배치, 재구성하던 작업을 아무리 반복해도 우리는 당시의 진실에 가닿을 수 없다. 진실의 주변에 맴도는 상상지대에서 피어나는 그의 극화된 면모만 만날 뿐이다. 그게 인물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날 때 더욱 의식해야 하는 지점이다. 게다가 제작자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인물의 삶을 입맛대로 펼쳐 내보이고 싶을 뿐, 그 인물의 행적 자체의 진위 여부가 중요하게 취급될 확률은 높지 않다.

세상은 이미 가짜 뉴스의 시대, 인공지능의 정보 조작을 늘 의식해야 하는 위험지대로 변모해버린 지 오래다. 제작자가 참고했던 자료가 전부 순도 100%의 사실이라는 보장도 엄밀히는 없다. 그가 뱉는 연설을 촬영했던 영상과 그의 행적을 기록한 문서의 진위 여부 역시 검증하자면 끝이 없다. 그렇기에 사실이 아니라 사실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태도가 중요해졌다. 결국 이미지에 사로잡혔을 때, 우리가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 따져보는 게 관건이다. 플롯과 플롯 사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근처에 머무는 인물의 이미지들 말이다. ‘연설하는 김대중’이 ‘연기하는 김대중’이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카이빙 자료를 집요하게 추적해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거나, 다년간의 동행 취재로 쌓인 관계의 미학을 빚어내거나. 여러 방식 가운데 <길위에 김대중> 역시 인물을 다루는 통상 다큐들의 접근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치밀하게 엮어낸 서사 속에서 느슨하게 풀려 있는 잉여 이미지가 종종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영화에 독특한 질감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제 처음에 던졌던 화두가 자연스레 따라온다. 글의 도입부에서 자료화면 속 김대중이 극영화 촬영에 몸을 맡긴 배우처럼 보인다고 운을 띄웠던 걸 기억해보자. 그렇게 <길위에 김대중>은 가려졌던 진실의 추적, 발굴해낸 사료를 토대로 만든 역사의 재해석 같은 작업과는 거리가 먼 결과물이 된다. 결국 영화와 객석 사이를 오가며 오래도록 우리의 뇌리에 머무를 수 있는 건 무엇인가. 김대중이 연설을 했던 이유나 명분이 우리 곁에 머무르면서 존재감을 발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연설을 할 때 그가 두었던 시선의 방향이나 대상, 말과 말 사이 잠깐의 적막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공기를 가르는 그의 주먹에 맴도는 무게감 같은 것들이 짙은 잔상으로 맴도는 게 아닐지.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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