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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의 죽음
외삼촌의 죽음
  • 김혜성 l 탈북작가
  • 승인 2024.02.2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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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시골에서 홀로 자전거를 타는 주민./뉴스1

외삼촌이 죽었다. 불과 마흔 살밖에 되지 않은 분이, 그것도 칼에 찔려서. 굶주림 끝에 죽는 사람들도 많고, 심지어 나라에서 쏜 총에 죽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죽음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뻔했던 때였다. 그럼에도, 내 가족의 죽음인지라 충격으로 다가왔다. 외삼촌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는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영미, 윤미, 설미. 어린 내 사촌들과 외숙모는 어쩌나.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성화 속에서 딸만 줄줄이 셋을 낳고 구박덩어리 며느리로 살다가 남편을 잃은 외숙모가 너무나 불쌍했다. 그런 가운데, 가장 걱정됐던 사람은 평생을 외아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6개월 전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반신을 못 쓰게는 됐지만 조금씩 회복의 기미가 보였다. 그런데, 금쪽같은 외아들이 죽다니. 외할머니가 그 소식을 들으면 곡기를 끊고 아들을 따라 저승에 갈 것 같았다. 외할머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외할머니에게 외삼촌은 세상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가족이 외삼촌의 부고를 애써 숨겼다. 

첫째 영미는 아버지의 죽음이 도통 실감 나지 않는지, 굳게 닫힌 입을 좀처럼 열지 않았다. 네 살 난 둘째 윤미는 아버지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북한의 가난은, 네 살짜리 아이의 뱃속도 채워주지 못했다. 두 돌짜리 막내 설미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그 순하던 아이가 유난히 보채고 엄마 품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외삼촌은 키가 크고 호남형으로 잘생긴 사람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둥그런 눈가에 짙은 쌍꺼풀이 있었다. 콧날도 날렵했다. 얇은 입술 사이로 허연 덧니를 드러내며 허허 웃을 때면 성격 좋은 사람 같았고 호탕해 보였다. 동네에선 외삼촌을 홍길동이라 불렀다. 외삼촌을 짝사랑하던 동네 처녀들도 많았었다고 했다. 외할머니에게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외삼촌까지 3남매가 있었다. 이모는 막내라 사랑받고, 외삼촌은 아들이라 온갖 정성을 한 몸에 받았다. 

외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로 기어 다니며 방을 닦을 때면, 외삼촌은 기다란 다리를 윗방 문턱에 올리고 누운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외삼촌에게 비키라고 하지 않고, 외삼촌의 양쪽 다리를 번갈아 들면서 방바닥을 닦았다. 엄마가 동네 우물가를 오가며 아침저녁으로 지게에 물을 날랐던 반면, 외삼촌은 외아들이라고 힘든 일 하지 않고 쌀밥만 먹었다. 외할머니는 끼니때마다 무쇠 가마에 옥수수를 씻어 넣고, 그 위에 흰쌀을 씻어 조심스럽게 얹어서 밥을 했다. 그리고는 다 익은 밥을 뜰 때면, 외할머니는 주걱으로 옥수수알이 섞이지 않게 쌀알만 거둬 외삼촌 밥그릇에 담아내려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외삼촌은 40년 인생 내내 쌀밥만 먹고 살았다.

외삼촌이 죽기 전 있었던 몇몇 사건들이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집 뒤 야산에 덫을 놨는데 산토끼가 걸렸다. 가족들이 고기 맛을 못 본 지 1년이 넘었을 때였다. 사람이 동물성 단백질을 못 먹으면 펠라그라라는 병에 걸린다고 한다. 손등과 발등, 혓바닥이 쩍쩍 갈라져서 피가 나는 이 병에 걸리면, 고기를 먹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어서다. 간혹 올무에 산토끼가 걸리면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부어 털을 벗겨 낸다. 별다른 양념은 없다. 그냥 커다란 무쇠 솥에 물을 가득 붓고 산토끼를 넣고 소금이 있으면 대충 뿌려서 푹 삶아 낸다. 그리고 친척들까지 데려다가 국물을 우려내서 마셨다. 외삼촌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그날따라 산토끼 고기를 참 맛있게 먹었다. 옆에 조카들도 있고, 어린 자식들도 있는데 먹어보라고 하지도 않고 아버지가 권하는 대로 정신을 놓고 먹었다. 외삼촌이 평소와는 좀 달라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뭔가 싸한 느낌이 있었다.

“죽기 삼 년 전에는 정신이 나간다”라는 말이 있다. 외삼촌은 종산리 제3작업반에서 트랙터를 운전했는데, 리에서 김일성 선전실을 짓기 위해 리당 청사 옆 극장을 철거하는 일에 동원됐다. 지붕을 허물고 양면 벽을 전부 뜯어냈다. 정면 벽 하나만 남았다. 점심시간이 됐다. 건설 경험이 없는 농부들은 홀 벽 뒤에 그늘에 의지해 점심을 먹다가 벽이 넘어지면서 그 아래 깔려서 다 죽어버렸다.

외삼촌도 그 현장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넘어진 벽은 외삼촌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덮쳤다.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주린 배를 채우던 동료가 누렇게 식은 옥수수밥을 삼키지도 못한 채 외삼촌 눈앞에서 즉사했다.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다 아는 북한 농촌이다. 그런 동네에서 한날한시에 가장이 여덟 명이나 죽어버렸다. 외삼촌이 현장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고, 그 이야기를 내가 옆에서 듣고 있었다. 외삼촌은 횡설수설하는 게 정말 정신줄을 놓아 버린 사람 같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외삼촌은 세상에 미련을 내려놓고, 마음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사는 사람 같았다. 내가 알던 외삼촌은 똑똑하고 꿈도 있었고 누구보다 조카와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시절을 기점으로 좀 이기적으로 변해 갔던 것 같다. 2002년 12월 21일이었다. 갓 가을을 맞이했던 터라 집에 쌀이 좀 남아있었다. 수확한 지 얼마 안 된 팥도 있었다. 엄마가 올해 동지에는 팥죽이나 끓여 먹자고 하면서 불린 쌀을 담은 대야를 내 머리 위에 얹어 주며 방앗간에 다녀오라고 했다. 방앗간은 제2작업반에 있었다. 방앗간이 종산리에 하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기계 소음이 듣기 싫어서 밖에서 시간을 보내려 나왔다. 

오후 대여섯 시경, 짧은 겨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익숙한 실루엣에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외삼촌이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 외삼촌을 꼭 보고 싶었다. “외삼촌! 외삼촌!” 한 네 번쯤 불렀던 것 같다. 소리소리 지르며 불러댔더니, 외삼촌이 자전거를 세우고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허연 덧니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여기는 어쩐 일로 왔냐고 물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방앗간에 왔다고 하면서 짧은 인사를 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외삼촌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방앗간 앞에 서서 한 20분은 떠들었나? 그리고 헤어졌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외갓집에서 컸다.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 사촌들과 정도 추억도 많이 쌓았다. 외삼촌은 나를 첫 조카라며 무척 아꼈고, 결혼 후 자기 딸들을 낳고도 여전히 나를 예뻐했다. 그런 외삼촌이 죽었다. 사고사도 아니고 타살이란다. 누군가와 척을 질 사람도 아닌 외삼촌이, 칼에 찔려 죽었다니.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무렵 행방불명됐던 이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외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했으니, 외삼촌이 대신 연락을 받았다. 
집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를 꺼렸다. 집안 모임이 잦아지고 어른들끼리만 수군대는 일이 반복됐다. 눈치가 빨랐던 나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머니에게 이모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엄마는 얼버무리며 이모는 남포 청년 고속도로 돌격대에 지원해 평안남도 남포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남포에 갔다면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데려갔다는 것인데, 보위지도원이 와서 이모의 행적을 묻냐고 따졌다.

엄마는 비밀이라고 하면서 이모가 중국에 있다고 했다. 중국에 있는 이모가 외삼촌을 통해 가족들에게 큰돈을 보내왔다고 했다. 2002년도 후반이었는데 이모가 보냈다는 돈 액수가 상당히 컸다. 북한 돈으로 약 80만 원이었는데, 옥수수 2톤은 족히 살 돈이었다. 농장원들이 매년 배급받는 옥수수가 약 150kg이었으니, 2톤이면 10년 치 월급이 넘었다. 한국에서는 노동의 대가가 현금이지만, 북한에서는 옥수수나 쌀 등 현물이다. 외삼촌은 그 돈 80만 원에서 자신의 누나(내 엄마)에게 30만 원을 주고, 나머지는 외할머니 뇌졸중 치료약을 사겠다고 했다. 이모가 외삼촌에게 돈을 보내면서 “일본제 중고자전거를 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쌀밥에 고기를 드셨으면 좋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외삼촌은 이모의 바람대로 외할머니 밥상에 삼시 세끼 쌀밥과 고기를 올렸다.

외삼촌은 이모에게서 돈을 받은 후, 함경북도 은덕으로 자주 다녔다. 농촌에는 뇌졸중이나 암 환자들을 위한 약이 없다. 진료소가 있지만 유명무실했다. 의사가 처방전을 써주면 그걸 들고 시장에 나가 중국산 약을 사야 했다. 농촌은 시장이 없으니, 외삼촌은 일본제 중고 자전거를 타고 은덕을 드나들며 외할머니 약재들을 샀다. 은덕에는 외삼촌 고향 친구들이 많았다. 종산과 은덕군과의 거리는 약 24km. 그 중간 즈음에 금송리와 박상리를 잇는 가파른 산, 강팔령이 있었다. 은덕에서 종산으로 오는 길은 오르막이 완만하지만, 종산에서 은덕으로 가는 방향의 오르막은 가파르다 못해 오르다 보면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외삼촌은 외할머니를 살려 보겠다고 자전거로 매달 은덕과 종산리를 오갔다. 외삼촌은 은덕에 갈 때면 고향 친구 집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평생을 친하게 지내던 고향 친구가 외삼촌을 칼로 찔렀다. 외삼촌을 칼로 찔러 죽인 사람은 노동당원이었다. 용철이라고,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외삼촌은 노동당원인 용철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나라가 가난해지자, 노동당원 배급도 끊겼다. 용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고향 친구인 외삼촌에게 북한 정권을 비판하고 세상을 비관했다. 그러자, 외삼촌이 “노동당원인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라고 타일렀고 술에 취한 용철은 그 말에 욱해서 칼로 외삼촌을 찔렀다. 칼은 정확히 외삼촌의 횡격막을 뚫고 지나갔다. 용철의 아내가 밤이 새도록 외삼촌을 간호했다. 용철은 자신의 범죄가 들킬까 두려워 외삼촌을 병원에도 데려가지 않았다. 외삼촌은 밤새 고통에 몸부림치다 은덕에서 숨을 거뒀다.

12월 24일, 외삼촌이 사망 소식이 종산리에 전해졌다. 가장 먼저 부고를 들은 외숙모는 허둥지둥 우리 집으로 달려와 목이 터져라 울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 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외삼촌을 칼로 찌른 사람이 노동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외삼촌은 정치범의 아들이다. 노동당원이 정치범의 아들을 칼로 찔렀다. 이건 국가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 사촌들의 운명이 바뀌는 문제다. 다행이었던 건 술자리에 외삼촌과 용철, 용철의 아내, 그리고 용철의 입당을 보증해준 보증인이 동석했었다. 

보증인은 다음 날 아침, 술에 깬 후 안전부로 가서 사건에 대해 진술하고 당적 책임을 지겠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그리고 자신은 당원의 자질이 없는 용철을 보증했으니, 당의 결정에 따라 당원증도 내놓겠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리는 한시름 놓았다. 이제야 외삼촌의 죽음을 마음 놓고 슬퍼할 수 있었다. 사람이 죽었으니 관을 짜야 했다. 기다란 널판자로 만든 허름한 관이 쇠달구지에 실려 외할머니의 집 앞에 왔다. 대패질도 안 했는지, 톱밥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외삼촌은 12월 21일 나와 마지막으로 만났고, 다음날인 22일에 은덕군으로 갔다가 23일 고인이 됐다. 나무관에 누운 외삼촌의 시신은 고향 사람들의 손에 들려 고향 뒷산을 향했다. 12월말이라 땅이 얼어 삽이 들어가지 않았고, 구덩이는 너무 얕았다. 이렇게 추운데 저 허름한 관에 몸을 뉘었을 외삼촌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고향 사람들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팠는데, 얼어서 안 파진다고 했다.

어머니가 통곡을 하며 삽을 들고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언 땅에 삽이 들어가지 않자, 어머니는 두 손으로 땅을 막 파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달려와 말렸다. 여러 장정들이 곡괭이로 땅을 팠지만, 땅은 너무나 단단해 잘 파지지 않았다. 외삼촌의 관이 얼어붙은 땅 위에 놓였다. 외숙모가 무덤 주변 흙을 두 손으로 한 움큼 잡아 관 위에 뿌렸다. “잘 가요. 또 만납시다.” 외숙모의 통곡소리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외삼촌의 관 위로 흙이 쏟아졌다. 움푹하게 파여 있던 무덤에, 순식간에 수평으로 흙이 채워졌다. 그리고 둥그렇게 흙을 조금 높이 쌓아 이곳이 무덤임을 표시했다.

외할머니는 외삼촌이 죽었다는 말을 끝내 듣지 못하셨다. 외할머니가 외삼촌이 왜 안 오냐고 물어볼 때마다, 가족들은 출장을 갔다고 둘러댔다. 외할머니는 눈치를 채신 듯 집안 분위기를 살폈다. 12월 26일, 외삼촌의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도와준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를 하는데, 외할머니가 큰 손녀인 나를 불렀다. 외할머니는 집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물었다. 나는 송별회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외할머니는 그 후 외삼촌에 대해 몇 번 더 물으셨다. 그리고는 고기를 달라고 했다. 우리는 돼지고기를 사서 푹 삶아 외할머니께 드렸다. 
그 돼지고기를 맛있게 드신 외할머니는, 그날 이후 쌀 한 톨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목숨처럼 아끼던 외아들을 지키러 스스로 저승길을 떠나신 것이다. 외삼촌이 죽은 지 한 달 남짓 지난 1월 31일이었다. 

 

 

글·김혜성
2004년 16세에 탈북해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연세대 인문학부를 입학해 역사학을 전공했다. 2017년 프랑스인을 만나 결혼했고, 프랑스인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프랑스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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