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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비록 내가 나를 결정할 수 없었을지라도 – 영화 <최선의 삶>
[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비록 내가 나를 결정할 수 없었을지라도 – 영화 <최선의 삶>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1.09.23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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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은 성취될 것이며 나를 지금보다 나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희망이 ‘최선’의 역할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선에 대한 방향이 없거나 잘못 설정되었을 때, 그것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결과는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다. 아니 할 수 없다기보다 공포에 가까워 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영화 <최선의 삶> 속 강이(방민아), 아람(심달기), 소영(한성민)의 하루하루가 불안한 것은 인과 관계가 어그러진 그들의 선택이 점점 공허하고 날카로워지는 눈빛으로 드러나는 탓이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들이 점점 불안한 결과로 돌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그리고 우리의 과거였다는 점에서 아찔하기도 하다.

 

한국 영화에서 교복을 입거나 교복을 입어야 할 나이의 인물들은 대체로 분명히 싸워야 할 문제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이 입시 위주 교육의 폐해이든, 부모와의 문제이든, 친구들 간의 문제이든, 빈부의 차이나 생존의 문제이든 인물들은 이 사이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아파해야 했다. 그러나 강이의 시선으로 훑어가는 <최선의 삶>은 이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전의 영화들과 거리를 둔다. 가정 내 폭력이 싫어서 집을 나서려 했던 아람이나, 자신의 자유를 위해 가출을 이용하려는 소영과는 다르게 강이는 집을 나서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 집이 싫다기보다 밖이 좋았기에 선택한 가출은 일찍이 가출한 인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고 그만큼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선의 삶>은 바로 이 인물을 작품에 중심에 세움으로써 10대들의 이야기가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정확히 무엇이 싫은지, 좋은지, 어디로 향해야 할지, 그렇다고 멈춰있을지도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는,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했고 그것이 최선이라 믿었던 당시가 너무도 적확한 ‘그때’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때의 혼란들을 단지 어린 나이의 미숙함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그럴 수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묵인한 이들에게 그들이 어떠한 시간 속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준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임솔아 작가의 동명 소설 『최선의 삶』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소설에서 그리 멀어지지 않으면서 세 소녀의 현실에 개입하는 시선과 관계들을 집약적으로 펼쳐 낸다. 장편 소설에서 세세하게 묘사되었던 상황들, 그러니까 어린 여성들이 사회로 나갔을 때 남성들은 그들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내어주고 무엇을 얻는 것인지, 가출 후 돌아갔을 때 집과 학교에서 어떤 시선을 견뎌 내야 하는지, 왜 누구는 폭력을 연기로 배우며 누구는 실제 폭력 앞에서 호들갑을 떨어야 덜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 그리고 어디에 사는 ‘주제’가 어떻게 모욕이 될 수 있는지 등이 강이의 시선으로, 세 소녀 사이의 긴장으로,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 천천히 스크린에 떠오르는 것이다.

 

영화는 이 사이 도사리고 있는 폭력을 분명히 포착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폭력보다 선뜩한 것은 분명 나와 함께 했고 그래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을 더 이상 예측할 수 없을 때, 바로 그 순간이 더 큰 공포로 다가온다는 점을 이 영화는 알기 때문일 테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강이의 선택이 쉽게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일지라도 영화가 이를 이상한 이의 광기로 남기지 않는 것은 이러한 시선과 궤를 함께 한다. 소설의 에필로그가 삭제된 결말은 강이의 선택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 스스로 최선이었다는 점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강이의 감정을 부정하지도 또 강이에게 너무 잔인하지도 않게 그의 10대가 흔들리는 것을 보여주면서 한 소녀의 삶에 교차하는 시선과 감정을 이야기한다. 이 시기를 겪을, 그리고 겪은 많은 이들에게 이 과정이 성장이라 말한다면 분명 잔인한 상처일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망각의 힘으로 그것이 성장의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얹어본다. 마치 그때의 우리가 나의 삶을 무작정 최선이라 믿었던 것처럼.

 

<최선의 삶>(2021.9.1.)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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