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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경의 문화톡톡] "먹히는" 이야기의 비밀
[구선경의 문화톡톡] "먹히는" 이야기의 비밀
  • 구선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2.09.20 09: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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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먹힌다’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 “그게 먹힐까?” “요즘은 그런 거 안 먹혀” 하는 식으로 말한다.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인기를 끌고 소위 대박을 터트리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방송계에서도 많이 쓰는 말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적인 언어로 사용하기엔 좀 뭣하지만 늘 시청자 반응을 의식해야 하는 방송계에서는 생생하게 힘을 갖는 표현이다.

시청자에게 뭐가 먹힐지, 어떤 게 반응이 있을지 고민하는 건 방송일을 하는 사람들의 숙명이다. 누군가가 봐주지 않는다면 방송은 존재 이유가 없고 다음번에는 존재할 기회도 없게 된다. 그래서 늘, 어떤 게 먹힐지 고민하며 산다. 요즘은 어떤 게 인기가 있는지 사람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늘 촉을 세우고 산다. 지금 당장 관심사만 좇다 보면 뒷북치는 격이 될 수 있고 그렇다고 너무 앞서가면 역시나 싸늘한 무관심뿐이니 딱 반 발짝만 앞서가야 한다는 게 이곳의 정설이다. 말이 반 발짝이지 내 보폭을 가늠해줄 기준이 있을 리 만무하니 쉽지 않은 노릇이다.

 

먹히는 이야기를 찾기 위한 강박은 가끔 부작용을 낳는다. 뭔가 하나 대박을 터트린 작품이 나오면 방송국에서는 그와 비슷한 작품을 찾기에 바쁘다. 특히 예상하지 못한 작품이 예상하지 못한 큰 대박을 터트리면 더욱 그렇다. ‘아니 시청자들이 이런 걸 좋아했나?’ ‘아니 이게 대세였던 거야?’ 하면서 비슷한 부류의 작품을 찾는다. <동백꽃 필 무렵>이 잘 된 후엔 방송국마다 따뜻하고 훈훈한 휴먼 드라마를 원했고 <스카이캐슬>이 잘 되고 난 후엔 ‘이제 잔잔한 이야기는 안 봐, 센 게 필요해!’를 외쳤다. 막장 드라마가 욕을 먹으면서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후엔 유사한 막장이 쏟아져 나왔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시청자의 기호는 나날이 바뀌고 변덕스러운 속내는 알 길이 없으니 검증된 길을 찾을 수밖에. 검증된 사례가 앞에 있는데 다른 길을 가기엔 불안하기도 하겠다.

 

그런데 최근에는 조금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뚜렷한 대세가 있기보다 이것저것 다양한 이야기가 많은 것, 그 자체가 유행인 듯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채널의 다양화, 그래서 드라마 편수 자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드라마 관계자로서 이전에는 새로 시작하는 미니시리즈를 적어도 1, 2회만큼은 대부분 챙겨보곤 했다. 방송 3사에 월화/수목 미니시리즈와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정도가 있었고 대부분 16부작 이상이 기본이었으므로 예를 들어 월요일 밤에 선택할 수 있는 드라마는 다 해야 세 편이었다. 그러니 신작의 1, 2회를 다 챙겨본다고 해도 그리 바쁘지 않았다.

지금은 지상파는 물론 케이블과 종편까지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고 인터넷 콘텐츠 서비스에서는 정해진 편성 주기도 없이 드라마가 계속 업로드된다. 6부작부터 이전과 같은 16부작에 이르기까지 회차도 자유롭다. 이렇다 보니 일단 물리적으로 다 챙겨볼 수 없는 물량이다. 관계자로서도 이미 종방한 후에야 ‘아 그런 드라마가 있었어’하고 반문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넷플릭스의 다양한 드라마들
넷플릭스의 다양한 드라마들

그래서 드라마는 더욱 다양해졌다. 장르와 소재, 주제, 형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드라마들이 방영되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도 어딘가에서는 사극을, 어느 채널에서는 수사물을, 또 다른 플랫폼에서는 시대성을 띤 액션물을, 로맨스를, 코미디를, 혹은 막장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걸 골라볼 수 있도록 뷔페가 차려진 상이라고나 할까.

요즘은 로코가 대세야, 이젠 막장 아니면 안 봐, 지금은 수사물 전성시대지, 하는 말들을 하기 어렵다. 그 모든 장르를 어느 채널에선가는 하고 있고 예전처럼 대박 시청률은 없는 대신 작품이 잘 만들어진 경우 마니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강한 팬덤을 형성한다. 시청률은 높지 않았어도 대본집이 나오고 모여서 본방사수하는 이벤트도 열린다. 개인의 취향이 좀 더 존중된다는 점에서 시청자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시기에 창작자의 임무는 무엇일까. 창작자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런 시대에 더 중요한 건 오리지널리티인 거 같다. 독창성 또는 개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는 누구에게나 중요하지만 작가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간단히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 오리지널리티이니 예를 들어 살펴보자.

‘미혼모가 술집을 하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라는 로그라인에는 아무런 훅이 없다. 하지만 동백이의 캐릭터에, 용식이의 대사에, 옹산 사람들의 에피소드에 작가의 개성이 듬뿍 담겨있고 그것이 <동백꽃 필 무렵>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었다. <나의 해방일지> 첫 회엔 확 눈길을 끄는 드라마틱한 요소는 별로 없다. 그런데 작가는 ‘계란 흰자’로서의 경기도민의 이야기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순간이라도 노른자가 아닌 흰자로서의 소외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터이고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게 뭘까 하면서 TV 앞을 지키게 된다. (물론 <나의 아저씨>와 <또! 오해영>을 믿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 역시 그 작가의 오리지널리티이다) <오징어게임>은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에 우리나라 전통 놀이를 접목하고 한국적 신파를 적절히 섞어 넣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에 관한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사랑스러운 호감형의 캐릭터를 만들어내어 크게 호평받았다. 작품들의 색깔도 방식도 포인트도 다르지만 각기 다르게 발현된 오리지널리티가 시청자를 사로잡은 것이다.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출처:홈페이지)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출처:홈페이지)

다 다른 이 작품들의 작은 공통점 하나를 찾자면 모두 순간순간 클리셰를 벗어나는 대목이 많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클리셰는 피해야 할 것이지만 또 완전히 피할 수는 없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적절히 활용될 때 시청자가 편안하고 익숙하게 이야기에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들에는 지루한 클리셰가 없다. 뻔한 이야기 흐름이나 인물의 반응이나 이쯤에서 나올 법한 예상 가능한 대사가 적다.

그래서 재밌다. 그것이 작가의 오리지널리티가 보이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힘은 작가의 개성에서 나온다고 생각된다. 배워서 되거나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라, 흉내 낼 수 없고 작가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혹은 흘러넘쳐 나오는 것이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는 참 절망스러운 말이다. 배울 수 없다니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내면에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되는 게 그 길이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서 그렇게 쌓인 내면이 보여주는 오리지널리티,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작가 경력으로 내린 결론은 그러하다. 막막한 이야기이지만 그게 창작의 본질이 아닐지. 창작이 제작이나 제조가 아닌 이유다.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이 경지도 넘을지도 모르겠다. 작년에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출간되었고 얼마 전에는 미국의 미술대회에서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이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니 드라마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이쯤 되면 오리지널리티의 사수를 위해 인공지능과도 경쟁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만,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드라마로 써 봐야 할까. 아니 어쩌면 누군가, 이미 써서 방영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글·구선경
드라마작가. 작가협회 교육원과 대학에서 드라마와 스토리텔링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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