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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엘리자베스 여왕을 추모하며 <더 퀸>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엘리자베스 여왕을 추모하며 <더 퀸>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2.10.04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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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96세의 나이로 2022년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입헌군주제 이래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아온 군주, 그 삶은 어땠을까. 엘리자베스 2세를 소재로 한 영화 <더 퀸>을 보며 그를 추모해보는 건 어떨까.

 

정식 이름은 엘리자베스 2세로, 엘리자베스 1세는 16세기 튜더 왕가의 여왕이자 헨리 8세의 딸이었다. 16세기 중후반 대영제국의 발판을 만든 여왕이고, 독신으로 살며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녀를 다룬 영화로는 <엘리자베스>, <골든 에이지>,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등이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탄생과 관련해 피로 얼룩진 가정사를 그린 영화로 <천일의 스캔들>도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 영화 <킹스 스피치>의 모델이었던 아버지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위에 올라 70년간 영국을 다스렸다. 2022년 6월 재위 70주년을 기념한 플래티넘 주빌리(Platinum Jubilee)가 열렸으며 영국의 최장수 통치자로 기록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로 다음 왕위는 아들 찰스가 73세의 나이로 물려받았다.

 

블레어 총리와 엘리자베스 2세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명제에 대다수 현대인은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한정된 영역에서는 여전히 특권적 지위를 부여해놓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럽의 왕실, 그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이 영국 왕실이다.

입헌군주제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정신적인 지주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는데, 한편으론 지금 이 시대에 왕이 꼭 필요한가라는 얘기도 지속해서 나오고 있다. 왕실의 얘기는 대중에게 잘 공개가 되지 않고, 또 우리나라엔 없는 제도이기도 해서 영화는 여러모로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왕관 뒤에 가려진 여왕의 고뇌

<더 퀸>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취임부터 며느리였던 다이애나의 장례식까지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총리와 여왕의 관계도 우리에겐 흥미로운 대목이다. 영화는 무엇보다 다이애나의 사망사고로 급박하게 흘러가는 시간 동안 여왕이 맞닥뜨린 다양한 상황과 감정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흥미롭다.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 헬렌 미렌이 엘리자베스 2세 역을 맡아 심도 있는 감정연기를 선보여, 2007년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동안 영국 왕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더 퀸>은 왕실 사람들, 특히 여왕에 대해 무척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를 만든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은 영화 <위험한 관계>에서 귀족사회의 추악한 욕망을 파헤치고, <그리프터스>에서 거미줄처럼 엮인 범죄의 연결고리를 포착해 보이는 것 너머의 사실을 보여준 감독인데, <더 퀸>에서도 왕실의 동화 같은 환상 대신 살아 숨 쉬고 있는 영국 왕실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왕실을 다룬 또 하나의 영화로 <스펜서>가 있다. <스펜서>가 다이애나 스펜서의 시점에서 시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 2세를 바라보면서 두 사람 사이에 흘렀던 묘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영화라면, <더 퀸>은 다이애나의 죽음을 통해 왕실의 어른으로서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여왕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왕이 필요 없는 21세기에 왕으로 산다는 것

다이애나와 찰스 3세는 동화 같은 결혼식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남편이 결혼 전 교제하던 여성을 계속 만나면서 결국 이혼하게 된다. 그러다 다이애나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영국민들은 큰 슬픔에 빠지고, 영국 국민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어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의 일원이 아닌 다이애나의 죽음을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애도할 것인가 하는 왕실다운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여왕은 왕실의 품위유지와 손자들에 대한 배려를 이유로 그녀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어린 왕자들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별궁에 잠시 가 있기로 한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왕실의 추모 메시지를 여러 번 요청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슬픔도 품위 있게 대응해야 한다는 원칙과 다이애나는 더 이상 왕실의 일원이 아니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며느리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국민들의 눈에는 이런 여왕이 너무 매정하게 느껴지며 원성이 높아진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다이애나를 연상시키는 사슴

당시 신임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이를 중재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쓰는데, 영화에서 토니 블레어는 왕관이 지닌 무게, 왕관 뒤에 가려진 여왕의 고뇌를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영국은 왕실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이 지불해야 하는 막대한 비용과 시대에 맞지 않는 권위적 행태로 그 존속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개혁적인 성향의 노동당 당수로서 총리가 된 토니 블레어는 애도문을 발 빠르게 발표하며 특히 ‘국민의 왕세자비’라는 표현을 써서 영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이렇게 여왕을 제치고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는 멀어지는 여왕과 국민들 사이의 중재자로 나서며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버킹엄의 화려한 뒤편에 감춰진, 의외로 소박한 여왕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준다. 덜컹거리는 지프차를 손수 몰거나, 평범한 아줌마 같은 차림으로 사냥개들과 산책을 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렇게 온갖 품위와 예의를 지키는 듯하면서도, 냉정하고 고집스러운 이면에 고뇌하는 여왕의 모습은 헬렌 미렌의 뛰어난 연기로 현실감과 생명력을 얻었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 쓰인 ‘왕관을 쓴 자는 편히 쉴 날 없나니’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70년간 왕위를 지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인 윈스턴 처칠을 시작으로 사망 이틀 전 임명한 리즈 트러스까지 총 15명의 총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70년을 버텨온 여왕의 지혜가 아니었을까.

살얼음판 같은 왕실의 속내를 보는 즐거움과 여왕의 인간적인 고뇌가 느껴지는 영화 <더 퀸>을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를 추모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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