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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악한 미국의 치부 'CIA 특수작전단'
추악한 미국의 치부 'CIA 특수작전단'
  • 헤르난도 칼보 오스피나 | 작가
  • 승인 2009.02.0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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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전복·음모…제3세계 민주정부 겨냥 '물밑 테러' 당사자들, 세월 지나 '승승장구'

 

▲ <비극적인 실수>, 1980 - 로저 페인

1953년 8월 이란의 민족주의 지도자 모하메드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시키면서 'PB/Sucess'는 CIA에게 무적의 명성을 안겨주었고 전 세계비밀작전의 모델이 됐다.
 1960년 3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9년 1월 혁명을 성공시킨 쿠바를 불안정하게 만들 목적의 새로운 작전을 승인했다. 아르벤스 정권 전복에 참가했던 요원들 대부분이 쿠바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됐다. 그 면면을 보면, CIA의 2인자 리처드 비셀, 쿠바 테스크포스 설립을 담당한 트레이시 반즈, 심리전 책임자 데이비드 애틀리 필립스, '쿠바임시정부' 수립을 담당한 하워드 헌트 등이다. 미군첩보장교 포터 고스와 조지 H. W. 부시1), 두 젊은이가 이 팀에 합류했다. 부시는 "CIA 쿠바 침공 부대원이 될 쿠바 망명자들을 모집하는 일"을 도왔다.  
 
 피그즈 만 침공과 'JM/WAVE'
 1961년 4월17일, 2506연대 부대원 1천500명이 피그즈 만(漫)에 상륙했다. 70시간 후 그들이 패배하자 CIA의 1인자 델레스와 2인자 비셀은 사임했다.
 이 패배로 깊은 상처를 입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CIA에 과도한 권한을 부여했고, 이 결정이 장기간 전 세계의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는 새로운 쿠바 침공을 감독했다. 마이애미는 미국 땅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최대 규모의 유사 군사작전 - JM/WAVE - 의 진원지가 됐다.
 티어도(애칭 '테드') 섀클리와 토마스(애칭 '톰') 클린스가 진두 지휘를 맡았고,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첩보기관과 함께 일했던 에드워드 랜스데일 장군, 리처드 시코드 공군장교, 미군첩보부의 데이비드 산체스 모랄레스 등이 추가로 투입됐다.
 1962년 10월 14일, '미사일위기' 당시 미국은 쿠바에 설치된 소련의 탄도미사일 철수를 요구했다.
 소련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 조건(여기에 터키 주둔 미국 미사일 철수 조건이 덧붙여졌다)하에 미사일 철수를 받아들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JM/WAVE' 팀 해체를 명령했다.
 쿠바혁명 이후에도 미국의 지역안보 전략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 부대를 재편하고 파나마운하 내 미국 영역에 훈련교육장-스쿨 오브 아메리카-이 탄생했다. 1963년 케네디대통령이 암살됐을 때는 이미 그의 지역안보 이론(케네디 독트린)이 작동하고 있었다. 1964년 3월 31일 주앙 굴라르 브라질 대통령이 실각하면서 일련의 쿠데타가 발발했고 수많은 야권인사들의 대량 실종과 악랄한 고문이 시작됐다.
 
 콩고, 베트남, 남미 등서도 활약
 이러한 새로운 전략에는 JM/WAVE 팀 내 쿠바요원들과 피그즈 만 침공 당시 생포됐다가 1962년 12월 미국으로 송환된 1,189명2)의 경험이 반영됐다. 그들 중 300 명은(대부분 쿠바 출신으로 미국 국적을 얻어 미국인이 되었다) 베닝 요새(조지아 주), 메이어 요새(플로리다 주), 피어리 요새(버지니아 주) 등지에서 장교 교육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굴릭 요새(스쿨 오브 아메리카)로 보내져 게릴라 진압훈련을 받았다.
 그들이 바로 호세 바술토, 호르헤 마스 카노사3), 프란시스코 '페페' 헤르난데즈4), 루이스 포사다 카릴레스, 펠릭스 로드리게즈 멘디구티아 등이다. 익명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이름은 곧 장안의 화제가 됐고, "남아메리카는 그들이 개척자가 되는 '파 웨스트'가 될 것5)"이었다. 
 1962년 말에는 CIA 소유 에어아메리카 항공기를 동원해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미래의 독재자 조셉 모부투를 항공 지원했다. 지상에서는 58중대가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군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로랑 데지레 카빌라의 요청으로 체 게바라는 4월 말 콩고에 도착해 반 모부투 전투병들에게 게릴라 테크닉을 전수했다6).
 이 특수작전단은 베트남에서 결정적으로 힘을 얻었다. 그들은 베트남에서 패한 프랑스 특수부대의 방법을 발전시키고 라오스와 미얀마의 아편 거래(여기에도 역시 에어아메리카 항공기를 이용했다)로 작전 자금을 조달했다.
 JM/WAVE 팀원 섀클리, 클린스, 산체스 모랄레스, 시코드, '에드' 디어본, 로드리게즈 멘디구티아 외에 CIA요원 감찰 수사관 도날드 그레그, 작전 '정치고문' 존 디미트리 네그로폰테, 전 CIA한국지부장 존 싱글로브 장군, 미 국방부 작전 담당 랜스데일, 미 해군정보국의 올리버 노스 등이 함께 팀을 이뤘다.
 1968년, 베트남 저항군을 무력화시키고 민간인들에게 공포를 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평화가속운동(암호명 피닉스)을 지휘하기 위해 빌 콜비가 베트남 현장에 파견됐다.
 하지만 이 팀의 가장 큰 성과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1967년 3월, 체 게바라를 추적하기 위해 볼리비아에 상륙한 20여명의 미 특수부대원 중에는 쿠바인 로드리게즈 멘디구티아가 포함돼 있었고, 1967년 10월 8일 부상당한 체 게바라가 생포됐을 때 사살 명령을 내린 사람이 바로 멘디구티아다.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공작
 3년 후,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에 선출되자 리처드 닉슨은 방해 공작을 명령했다. 현장에 파견된 팀은 아옌데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충복 르네 슈나이더 총사령관을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임자가 바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다.
 칠레 현장 작전 책임자들 중에 애틀리 필립스와 산체스 모랄레스도 포함돼 있었다. 쿠바와 베트남에서의 활약으로 CIA 서반구부장이 된 섀클리가 칠레 정부 전복 임무를 맡았다. 클린스가 '아옌데 건'을 맡았고, 특수작전차장 콜비가 작전 총감독을 맡았다. 아옌데 정부에 대해 국제적 비방캠페인을 벌이는 일은 부시 유엔 주재 미국대사에게 돌아갔다. 
 아옌데가 제거되고 피노체트가 권력을 잡아 모든 것이 잘 돌아가나 싶었는데 CIA 스캔들이 터졌다. CIA가 저지른 범죄 상당부분이 언론과 국회청문회(처치 청문회와 록펠러 청문회7))에서 도마에 오른 것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정보국은 활동의 상당 부분을 콘도르작전8)과 혁명연합기구특공대(CORU) 소속 쿠바요원들에게 '위임'했다. CORU는 1976년 5월 당시 CIA국장이었던 부시의 지시에 따라 도미니카공화국에 창설됐다.     
 올란도 보쉬와 포사다 카이예스는 CORU를 이끌고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테러를 기도했고, 결국 1976년 10월 6일 쿠바 민항기를 폭파(73명 사망)했다. 콘도르-CORU 합작 범죄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아마도 9월 21일 워싱턴 한복판에서 벌어진 아옌데 정부의 전 외무장관 올란도 레텔리에르의 암살이었다.
 그 사건으로 수감된 5명 중에는 쿠바 프로젝트의 베테랑 3명이 들어 있었다. 부시가 이끄는 CIA는 수사를 방해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기껏 몇 년 감옥살이를 한 후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사면 받았다.
 그들 중 한명인 기예르모 노보 샘폴은 2000년 11월 17일 파나마를 방문한 피델 카스트로에게 폭탄 테러를 시도한 혐의로 파나마 현지에서 포사다 카릴레스와 함께 체포됐다. 2004년 4월 20일 8년형을 선고받은 그들은 미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미레야 모스코소 전 파나마 대통령의 사면으로 8월 25일 석방됐다.
 
 '이란-콘트라'사건 저질러
 그 사이 대부분 요원들은 대 니카라과 전투에 투입됐다. 부시 부통령이 작전 감독, 그레그와 노스가 음모를 지휘했다. 네그로폰테 온두라스 주재 미국대사(흔히 '총독'으로 불림)는 니카라과를 군사공격 거점으로 변화시켰고, 온두라스 군대 내 결사부대(3-16대대)는 야권을 탄압하는 일을 맡았다. 로드리게즈 멘디구티아는 볼리비아, 아시아, 살바도르로 등지에 '콘트라'로 불리는 니카라과 반혁명분자들을 공수했다. 포사다 카릴레스에게 임무를 맡기기 위해 CIA와 마이애미의 반 카스트로주의자들은 쿠바항공 민항기 폭파범으로 베네수엘라 감옥에 수감돼 있던 그의 탈옥(1985년 8월)을 계획했다.
 의회가 '콘트라'에 대한 모든 재정지원을 금지했기 때문에 부시 부통령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자금을 모았다. 이스라엘을 통해 이란에 무기를 불법 판매한 것이 1986년 '이란-콘트라게이트'로 터져 나왔고, 부시 대통령 시절, 존 케리 의원의 상원위원회는 CIA와 콜롬비아 마피아의 커넥션을 고발했다.
 CIA는 1947년 탄생한 이래 흥망성쇠의 연속이었다. 1954년 설립된 특수작전단의 작전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한 가지 사항이 있다. 바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 명만 예로 든다고 해도 포사다 카릴레스와 보쉬는 마이애미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고, 체 게바라를 처형한 로드리게즈 멘디구티아 역시 마이애미에서 경호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해방 이라크'의 초대 미국대사를 역임하고 20년 간 미 정보부장을 지낸 네그로폰테는 2007년 1월 국무부 부장관이 됐다. 1960년부터 쿠바 프로젝트에 참여한 포터 고스는 2004년 9월부터 2006년 5월까지 CIA국장을 지냈다.

  번역 |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각주

1) 여기에서 언급되는 부시는 아버지 부시다. 
2) 5천400만 달러에 달하는 식량과 의약품과 포로들을 맞교환했다.
3) 카노사는 훗날 쿠바-미국 재단(CANF) 회장이 된다. CANF는 마이애미에 근거지를 둔 중요한 반 카스트로 조직이며 카노사는 1997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이 재단을 운영했다. CANF는 1997년 아바나에서 일어난 테러에 연루됐다.
4) 현 CANF 회장
5) 장 피에르 질레, <그린베레. CIA 특공대>, 알뱅 미셸, 파리, 1981.  
6) 체 게바라와 그의 부하들은 1965년 11월 철수했다. 
7) 포드 대통령 재임기간이던 1975년 발간된 록펠러 보고서에는 CIA가 '20년 전부터' 불법적인 활동을 해왔다고 기록돼 있다. 존슨 전 대통령과 닉슨 전 대통령도 휘말렸다. 
8) 반체제 인사들의 암살, 납치를 목적으로 한 남미독재체제의 비밀정보국과의 협력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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