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파이의 아내>, <1987> 그리고 한국 역사 영화 속 영화-진실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파이의 아내>, <1987> 그리고 한국 역사 영화 속 영화-진실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3.04.10 09: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이 나라에서 미치지 않았으니 미친 게 분명하다.”

<스파이의 아내>(2020)의 메시지와 그 강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사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전쟁은 “진작에 무너졌어야 할 옛 세상이 무너지는 개벽의 계기”로 여겨진다. 이처럼 감독은 일본의 제국주의를 철저한 악으로 규정하고 간절히 패망을 기원한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역사 영화와 달리 당시를 살아가던 일반 대중마저 전범의 영역에 포함한다는 것이다. 오랜 소꿉친구, 상냥하던 이웃은 어느새 파시즘의 물결에 동참했다. 나치즘의 사회적 기반이 소수의 광신자가 아닌 평범한 독일인이었다는 ‘대중 독재’ 담론은 바다를 건너도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는 제국의 일부분으로 작동하던 대중을 고발하고 그들을 위한 어떠한 정당화의 요소도 남겨두지 않는다. 물론 시민은 권력 앞에서 무방비하고 또 무기력하다.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세상이 선량한 너를 타락시킨 것처럼 너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일갈하지만, 제국의 개는 침묵을 유지한다. 예루살렘에서 도쿄로 옮겨온 ‘아이히만’들이 끝내 공습을 선고받는 것은 마땅한 처사로 여겨진다. <스파이의 아내>에는 이처럼 우리 모두가 처참히 망가져 버렸다는 씁쓸함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무너져 내려도 괜찮다는 뜨거움이 공존한다.

문득 “한국에도 이토록 철저하게 자기반성을 담은 영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무지한 여성 주인공이 점차 시대의 이면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장준환 감독의 <1987>(2017)이다. 필름을 마주하기 이전의 사토코처럼 <1987>의 ‘연희’(김태리)는 정치에 무관심했고, 오히려 일상을 포기한 시위대를 한심하게 여겼다. <스파이의 아내>와 <1987>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성 캐릭터의 스탠스가 뒤바뀌는 지점이다. 연희는 가족과 연모하던 남학생이 부당한 폭력을 당하자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시위에 가담한다. 이에 비해 사토코의 저항은 필름에 담긴 ‘진실’을 목도했을 때 시작된다. 필름의 이미지만으로 사토코가 폭력을 체감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지닌 리얼리티의 힘과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아이’가 환기된다.
 

<1987>의 '연희'(김태리 扮)

지가 베르토프는 협소한 인간 시야 너머의 영역을 드러내는 카메라의 눈을 전면화하고 극대화할 것을 주장했다. 그가 연출되지 않은 영화, 대본 없는 영화, 연기가 행해지지 않는 영화를 강조하는 근저에는 ‘사실의 전달’이라는 확고한 목표가 자리잡고 있다. ‘영화-눈’은 방법론일 뿐, 목표는 ‘영화-진실’이다. 영사 장치를 반복해서 드러내고 자국의 역사적 치부를 낱낱이 고발하며 영화인의 역사적 소명과 더불어 필름을 향한 애정이 두드러진다. 초반부에 아내는 남편을 “친구가 잡혀갔는데 영화 놀이나 하는 매정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결국 진실을 지켜낸 것은 필름이었다.

 

대중 독재

다시 <1987>로 돌아와, 대부분의 한국 역사 영화가 상정한 전제를 지적할 수 있다. <1987>의 연출 중 가장 눈에 띄는 방식은 사건과 인물의 연쇄 고리이다. 언론, 법조계, 시민들은 악의 처단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올바른 정의를 상정하고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발생하는 연쇄는 연희라는 캐릭터가 무지함을 깨고 정의를 향하는 데 기여한다. 시민이 직접 쟁취한 민주주의라는 가슴 뜨거운 신화는 따라서 두 가지 전제 위에 성립한다.

1. 국민을 억압하는 국가(군부 독재)가 절대 악으로 존재한다.

2. 일반 대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정의로운 것을 인지하고 절대 악에 저항할 수 있다.

비단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한국 역사 영화는 대부분 위 두 가지 전제하에 성립한다. 한국 역사 영화의 소재인 한국사를 시대별로 분류하면, 유독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은 서로 주제가 놀랍도록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영화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은 고난과 일제의 부당한 침탈에 저항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6.25 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전쟁의 참상 속에서 하나같이 한민족 정신을 부르짖는다. 마지막으로 현대사를 다룬 영화는 독재 정권의 폭력성에 맞서 국민이 하나가 되어 민주주의를 쟁취해냈다는 핏빛 역사를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한국 역사 영화 장르에서 보이는 상호유사성은 좋게 말하면 역사적 교훈에 충실하지만, 다소 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제목과 소재만으로 결말과 교훈까지 전부 예상 가능한 영화가 훌륭한 영화인가”라는 질문은 차치하더라도, 실제 그들이 규정한 ‘절대 악’이 결코 일반 대중과 철저히 분리되지 않았음을 지적할 수 있다. 나치당은 독일인 일반의 지지를 얻어 집권에 성공했다. 헌정사상 최악의 헌법인 유신 헌법은 국민 대다수의 찬성으로 제정되었다(물론 부정투표의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두환이 물러나자 독재 타도를 외치던 국민은 차기 대통령으로 노태우를 당선시켰다. 이러한 흑역사가 민주주의를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박정희를 열렬히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잔존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독재와 대중은 결코 유리되어 대립하지 않는다.  

<1987>의 '박 처장'(김윤석 扮)

또한 권력의 하수인이자 폭력의 주체가 되었던 당시의 경찰과 형사도 저항하는 시민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정의를 규정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손에 피를 묻혀가며 맹목적 정의를 성취하고자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들이다. <1987>에서 가장 악랄한 캐릭터 박 처장(김윤석)은 남한 바깥의 인물이자 한때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념의 참상을 몸소 경험한 이 인물을 가엽게 그리기보단 그의 광기로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그러나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그도 한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대중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부당한 폭력에 노출되어 잘못된 정의관을 세운 대중은 언제든 또 다른 폭력의 주체로 변모할 수 있다.

이것이 <1987>을 비롯한 대부분의 한국 역사 영화와 <스파이의 아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후자는 비극에 일반 대중이 관여했음을 고발하고, 극단적인 자기파괴를 받아들인다. 이에 비해 한국 역사 영화는 사건의 재현에 급급하여 악을 물리쳤다는 일종의 나르시즘을 유발한다. 과거 전범국과 식민지라는 두 나라의 역사적 입장 차이가 영화 전반에 미친 영향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한국의 영화가 상정하는 전제만으로는 대중이 또 다른 극단주의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다.

 

'안전한' 영화

역사의 참상을 다루면서도 ‘나르시즘’에서 벗어난 영화가 한국에 전무한 것은 아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은 군부 독재 시절 가해자의 시선으로 자기파괴를 통해 순수의 회복을 기원한다. 가해자 또한 거대한 구조의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자칫 폭력의 주체를 동정하게 만드는 플롯은 영화에 대한 많은 비판을 야기했다. 그러나 영화적 완성도를 배제하더라도, <박하사탕>이 폭력에 무방비한 대중을 충실히 표현했다는 점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반-영웅적 서사가 허용될 사회적 여유가 있다면, 역사적 참극의 반복과 관련된 담론 형성을 위해서라도 지적되었어야 하는 부분이다. 물론 이와 같은 반-영웅적 서사는 관객과 캐릭터의 비판적 거리가 유지된 채 읽혀야 할 것이다.

공수창 감독의 영화 <알 포인트>(2004)는 <박하사탕>이 적절히 유지하지 못한 관객과 캐릭터 간의 거리를 적절히 조절했다. 공포 장르를 표방하며 영화가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한국 역사의 치부이다. 초반부에 비뇨기과에서 실시된 성병 검사는 주인공(감우성)의 소대원들이 전쟁 상황에서 ‘적절치 못한 성관계’를 했음을 암시한다. 원혼이 입고 있는 아오자이와 성병에 걸리지 않은 소대원만이 유일하게 살아남는 결말에서 국군의 전멸은 그들이 강간을 범했기 때문임이 밝혀진다.
 

공수창 감독의 <알 포인트>(2004)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인간은 더욱 광기에 쉽게 노출된다. 고향으로의 복귀만을 간절히 바라는 군인들의 모습은 동정을 유발하지만, 영화는 인물들에 군대 조직 특유의 야만성을 부여하여 관객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형성한다. 부당한 폭력을 저지른 인간은 기어코 처벌받는다. 주인공 최 중위가 원혼에 홀려 소대원에게 자신을 사격하도록 명령하는 장면에는 <스파이의 아내>나 <박하사탕>과 유사한 자기파괴의 모티브가 담겨 있다. 비록 장르적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공포감 조성이 우선시되었지만, 극단적 상황 속 무방비한 인간의 심리와 그것이 자국의 치부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알포인트>는 기존의 역사 영화가 다루지 않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이에 비해 2010년 이후 한국 역사 영화에는 재현에 대한 강박이 두드러진다. 이는 한국이 높은 역사 민감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영화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끊임없는 왜곡 논란은 감독들에게 ‘안전한’ 관점을 강요한다. 이미지로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의 모호함은 논란을 가중한다. 불상사를 피하고 싶은 감독들은 전형적이지만 확실한 이미지로 ‘객관적인’ 재현에 힘써 교과서적인 교훈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엄청난 관객을 불러 모은 <명량>(2014)과 작년에 개봉한 <영웅>(2022)이 각각 이순신과 안중근이라는 캐릭터를 지극히 평면적으로 다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작자가 관객의 눈치를 살피니 서사의 여백마저 철저히 관객의 입맛을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로맨스, 액션, 코미디는 분명 교과서적인 교훈에 어긋나지만, 모두의 즐거움을 위해 용인된다. 역사 영화 속 모든 로맨스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스파이의 아내>의 로맨스는 감정선을 영화 전체의 함의와 절묘하게 병치시켜 서사에 힘을 불어넣었다. <색, 계>(2007)처럼 로맨스가 역사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불러일으키는 핵심 전략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