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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식의 문화톡톡] 과잉된 도덕담론의 한국 사회, 흉기가 된 도덕
[홍원식의 문화톡톡] 과잉된 도덕담론의 한국 사회, 흉기가 된 도덕
  • 홍원식(문화평론가)
  • 승인 2023.06.16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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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대명천지에 그 누가 도덕 이상사회를 꿈꾸랴마는, 때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도덕 이상사회를 꿈꾸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특히 현실정치 분야에서 논란을 벌이는 장면을 보노라면 더욱 이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마치 도덕이 한국 사회에 철철 넘쳐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 상대에 대해 도덕적 질타를 하는 모습을 보면 무슨 도덕군자이기라도 한 듯 준엄해 보이기까지 한다.

 

도덕 과잉의 담론과 한국 사회의 민낯 

단순히 사실적 판단이나 현실적 판단만 내리면 될 문제를 도덕의 문제로 끌어다 붙이고, 엄연히 법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임에도 도덕의 문제로 몰아가는 정경을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논란을 벌이는 사항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아니한가만 따지면 될 것을 너무나도 쉽게 옳은가 틀리는가의 단계를 거쳐 결국 좋은가 나쁜가의 문제로 건너뛰어 버린다. 바로 도덕적 선과 악의 문제로 비약하고 만다. 도덕몰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모든 문제가 도덕의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


급기야 초점이 논란하는 문제에 있지 않고 논란하는 사람에게로 들이닥친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사라지고 ‘선한 분’과 ‘악한 놈’의 편가르기만 남는다. 말하는 자신은 늘 도덕의 법정을 주관하는 선의 화신인 양 상대를 악마로 몰아세운다. 선과 악으로 갈라치기해대는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습이 나에게는 너무나 거칠고, 차갑고, 아프게 느껴진다. 

   
이렇듯 도덕 담론이 넘쳐 난다면, 한국 사회도 정녕 도덕이 넘쳐나는 사회일까? 그것을 측정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가 과연 ‘도덕지수’가 높은 사회일까? 뭔가 왜곡되고 뒤틀린 감이 밀려든다. 


인간이 살아가고 사회를 이루는 데 도덕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굳이 여기에서 도덕이 무엇인가를 따져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것이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이 다수가 되어 도덕이 넘쳐나는 사회를 이룬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너나 나나’와 ‘오십보 백보’

우리는 ‘너나 나나’라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근거 없는 도덕적 우월감을 드러내거나 도덕적인 척 위선을 보일 때, 이 말은 충분히 비판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때로 ‘너는 뭐 그리 도덕적인데’라는 비아냥과 함께 도덕적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이 말을 내뱉는 경우가 있다.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이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 사회의 도덕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까짓 것 도덕이 뭐 그리 중요한데’라는 도덕 경시의 어감도 느껴진다. 이건 아닌데, 참 아프고 참담해진다.


‘오십보 백보’라는 말도 있다. 중국 고대의 유학자인 맹자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전쟁에서 50보 도망친 자가 100보 도망친 자를 보고 힐난한 것에 대해 50보와 100보의 차이만 있을 뿐 도망쳤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꼬집어 비판한 것이다. ‘너나 그나’라 비판한 점에서 ‘너나 나나’라 말하는 것과 무척 닮아 보인다. 하지만 이 비판은 100보를 도망친 자가 할 게 아니다. 만약 100보를 도망친 자가 50보를 도망친 자에게 너나 나나 똑같이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맞받아 비판한다면, 100보는 어디까지나 100보이고, 50보는 어디까지나 50보라고 말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작금 우리 사회에 논란하는 광경을 보면, 100보 도망친 자가 50보 도망친 자를 보고 너나 나나 똑같이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비판하는 꼴이 횡횡하고 있다. 때로 자신은 도망치지 않은 체하며 50보 도망친 자를 보고 목청까지 돋워 비판하는 꼴을 보노라면 정말 가관이다.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라는 말이 너무나도 어울린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이렇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 넘쳐나고 있다. 100보 도망친 자가 ‘너나 나나’를 외쳐대며 사람들의 생각을 호도하고, 얼토당토않은 것을 갖다 붙여 물타고, 하는 일마다 변명하고 감추며 똥 묻은 개 마냥 온 사방을 설쳐대는 게 우리 현실인 것 같다.


여기에서 무턱대고 둘 다 틀렸다고 말하는 양비론도 문제가 있다. 그것이 ‘오십보 백보’의 의미를 충실히 따른 것처럼 보이고, 또한 무척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원래 내용과 같이 50보 도망친 자가 100보 도망친 자를 보고 힐난하는 상황이라면, 너도 마찬가지로 도망치지 않았느냐라고 비판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런데 만약 100보 도망친 자가 50보 도망친 자를 보고 힐난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너는 50보 도망친 자보다 50보 더 도망쳤다고 꼭 집어 비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50보 더 도망친 사실만이 아니라 ‘너나 나나’의 문맥에 따라 도망쳤다는 사실마저 대수롭지 않은 듯 뭉개고 묻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흉기가 된 도덕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도덕이 흉기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도덕의 불모지에서 돋아난 독버섯과도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도덕이 마구잡이로 타인을 찔러대는 개망나니의 손에 들린 칼 같기도 하다. 법적 책임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책임만 지우면 될 것이고 반성과 속죄는 그 사람의 몫일 텐데, 끝까지 쫓아가 돌팔매질하고 난도질해댄다. 너무나 거칠고도 강퍅해진 세상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의도적으로 도덕을 덧씌워 비난을 퍼붓는 짓들이다. 상대를 완전히 몰염치하고 비인간적이며 위선적인 인간으로 내몬다. 이렇게 내몰린 자는 모멸감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다름 아닌 우리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도덕적 흠집내기이고 ‘인격살인’이다. 이 인격살인은 ‘인격’을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다면 이건 사회적 집단 살인행위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도덕이 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도덕적 비난은 쏟아내긴 쉽지만 받아들이긴 참으로 아플 수 있다. 법적 책임은 그것을 지고 나면 벗어날 수 있는데, 도덕적 책임에 내몰리게 되면 벗어날 길이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인격살인에 내몰려 끝내 죽음에 이른 자를 보고, 그 까짓 것 가지고 죽기까지 하느냐는 식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인격살인에 내몰렸다고 모두 죽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아마도 죽음에 이르는 자는 대부분 도덕적 감수성이 큰 사람일 것이다.


이럴진대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신중하고도 신중하게 할 바이다. 칼날이 날카로울수록 칼집을 두터이 하고 함부로 칼을 뽑지 않아야 한다. 타인을 향해 도덕적 비난을 하기에 앞서 백번이고 천번이고 먼저 자신을 되돌아볼 일이다. 내가 감히 저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깊이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도덕의 자리는 바로 이곳이다. 도덕의 마음은 바로 이곳에서 싹트고 새록새록 자라난다. 도덕의 마음자리를 마련하고 다독이는 것이 우리의 급무이다. 그 누가 함부로 타인에게 도덕적 비난을 퍼부을 수 있단 말인가?

 

 

글·홍원식
계명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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