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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틱톡 챌린지가 된 우리 시대의 테러리즘
[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틱톡 챌린지가 된 우리 시대의 테러리즘
  • 김경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3.08.07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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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부림의 시대에서 <조커>(2019)를 재관람하다

지난 721, 신림역에서 한 남성의 칼부림으로 4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그로부터 2주 뒤인 83일 오후에 분당 서현역 AK몰에서 의문의 칼부림 사건이 발생한 뒤 잇따른 모방 범죄로 한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부터 디씨인사이드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 숱한 칼부림 예고가 업로드되었으며, 모두가 공포에 떠는 중이다. 이 와중에 다시금 소환되는 영화 한 편이 있다. 바로 4년 전에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논란의 한가운데 선 토드 필립스의 <조커>(2019). SNS에서는 묻지마 칼부림을 저지르는 20대 남성을 두고 이 영화 속 범죄자인 조커에 빗대기 시작했다. 이 영화를 다시금 검토한다는 것은 이 시대의 악의 형상을 규정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영화 조커 스틸컷, 출처_네이버 영화
영화 조커(2019) 스틸컷, 출처_네이버 영화

이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인 맥락부터 설명해야 한다. <조커> 상영 당시 미국에서는 모방 범죄를 우려해서 상영관 인근에 경찰이 배치되었다. 이 영화의 레퍼런스가 된 마틴 스콜세지 <택시 드라이버>(1987)가 모방 범죄를 일으킨 영화이듯이. 2012,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상영할 때 제임스 홈스라는 청년이 내가 조커다라고 소리지르며 극장에서 총기 난사를 벌여서 80명이 죽는 초유의 사건이 있어서 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상징이 바로 조커이어서다. <조커>는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된 순간부터 대안우파와 인셀(자발적 비혼주의자involuntary celibate의 줄임말로, 외모나 성격 등의 여러 이유로 연애에 실패하고, 알파메일로 불리는 인기 있는 남성의 기준에서 밀려난 백인 남성 일군을 지칭한다. 미국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여성혐오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유명하다.)의 테러리즘을 미화하는 영화라는 비판을 들었다. <조커>는 이후로 20대 남성의 정치적인 테러리즘이 발생할 때마다 소환되었다. 대안우파와 인셀은 4chan에서 정치적 아이콘으로 전유당한 페페 더 프로그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아이콘이 있어야 했고, 그들을 문제시하는 이들도 그 둘을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아이콘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그 둘의 욕망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조커>를 둘러싼 논쟁은 이윽고 평론가 사이에서도 악인에게 서사를 주어야하는가, 재현의 윤리는 무엇인가 등의 주제를 두고 갑론을박을 오가는 윤리적인 전쟁터가 되었고, 모 영화 잡지에서는 찬반 논쟁까지 일었다. <조커>에 대한 논의는 타협 지점을 발견할 수 없는, 호불호가 아니라 호오의 영역이 되었다.

<조커>의 가장 논쟁적인 장면은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으로 인해서 폭동이 일어난 뒤다. 아서 플렉이 방송인 머레이를 쏴죽 인 순간에 조커 가면을 쓴 폭도가 곧장 고담시 전반에서 폭동을 일으킨다. 와중에 경찰에게 가격당한 다음에 자동차 보닛에 누워 있던 아서 플렉은 일어나 자신을 둘러싼 군중을 내려다본다. 문제는 이때 그를 촬영하는 카메라가 이상하리만치 그를 권위적으로 찍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려던 카메라가 그제야 아서 플렉의 허리춤에 위치한다. 군중은 열광해 있으며, 그는 보닛 위에 서서 춤을 춘다. 문제는 이때 그를 둘러싼 연기다. 조커와 군중을 숏-리버스 숏으로 드러낼 때, 관객은 조커와 군중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다. 반면 카메라가 군중의 눈을 매개할 때, 군중의 눈에서는 아서 플렉의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사운드는 조커가 춤을 추든 아니든, 그 실루엣이 조커든 아니든 계속 열광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군중을 그려낸다. 이같은 시선의 불일치야말로 이 영화의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감독은 재빨리 논쟁을 회피하려는 듯이 폭동을 서둘러 아서 플렉의 망상으로만 보이게끔 장치를 마련한다. 영화 <조커>에서는 현실이 있어야 할 자리를 가상이 대신한다.

<조커>는 빌런에 서사를 더하려는 것을 제외하면 스타일로는 별 볼 일이 없는 영화다. 뉴아메리카 시네마의 유산을 모방하려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어서다. 토드 필립스는 마틴 스콜세지가 그려낼 법한 1970년대 뉴욕의 이미지를 빌려와 고담시를 재창조했다. <택시 드라이버>(1976) 속 트래비스의 대사를 빌리자면 도시는 비가 쓸어버려야 할 것의 천지다. <조커>는 초반부터 이를 드러내고 있다. <조커>의 초반부는 얼굴을 반쯤 분장한 아서 플렉의 분장실에서 시작한다. 아서 플렉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아서 플렉의 분장실에 들리는 라디오다. 라디오에 따르면 고담시는 환경미화원과 도시 사이의 노사 분쟁이 심화된 나머지 누구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쥐가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중이다. 처음부터 <조커>는 폭동의 가능성을 어렴풋이 열어두었다. 아서 플렉이 옆집의 소피를 처음 만난 순간 친 장난, 아서 플렉의 동료가 리볼버를 은밀하게 건네는 장면은 <택시 드라이버>의 오마주다. 머레이 프랭클린은 <코미디의 왕>에서 펍킨을 연기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했다. 또한 조커로 거듭나는 아서 플렉이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망생이라는 설정도 <코미디의 왕>의 오마주다. 이와 같은 오마주는 이 영화가 1980년대의 유산을 통해서 지금 시대를 겨냥하리라는 기대감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영화에 혼선이 생겨난다. 스콜세지는 1980년대 당시의 미국의 정신분열적인 혼란을 카메라에 담는 감독이었다. 베트남전 PTSD라는 소재를 담은 <택시 드라이버>, 미국 매스미디어를 다루는 <코미디의 왕> 등의 영화는 문제적인 캐릭터로 미국의 양극화된 사회를 하나로 잇는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정치인과 그 정치의 희생양인 서민이 한 택시에 타고, <코미디의 왕>에서는 서민이 스타와 만난다. 양극화된 사회를 한 데에 압축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캐릭터의 돌발적인 행위를 통해서 미국 사회의 파국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택시 드라이버>의 각본을 쓰기도 한 폴 슈레이더의 작법이기도 하다. 폴 슈레이더는 오즈 야스지로와 로베르 브레송, 칼 드레이어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쓴 영화 연구자 출신이다. 폴 슈레이더는 이 중에서도 로베르 브레송의 영향을 여실히 드러낸다. 로베르 브레송은 평생토록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영화화하고자 했다.백치를 각색한 <발타자르, 제멋대로>백야를 영화화한몽상가의 나흘밤등이 그러하다. 폴 슈레이더는 이를 도스토옙스키와 브레송을 거쳐서 1980년대 미국의 정치 지형도를 그려내려고 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영향 아래에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셋 이상이 나오는 소포클레스의 캐릭터 사용을 한층 확장한다. 한 공간에 다섯 명이 되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저들만의 상으로 대화하게끔 한다. <택시 드라이버>는 그런 대화적 상상력에 기반한다.

특히 <조커>, <택시 드라이버>의 두 캐릭터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와 라스콜리니코프와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가난하고, 사화에서 소외당한 존재 상황에 있는 데다가, 양극화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사회 전반에 절망하고 있다는 점, (지하에 가까운) 방에서 몽상에 골몰하다가 범죄를 저지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여성과의 소통을 갈망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명백히 도스토옙스키의 캐릭터 성격화를 모방한 것이었다. 특히 <택시 드라이버(1976)>의 경우, “폴 슈레이더 본인의 개인적인 트라우마와 1972년에 대통령 후보 조지 월러스를 저격한 아서 브레머의 일기와지하에서 쓰는 수기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 비평이 지배적이다. 폴 슈레이더는 또한 인터뷰에서 <택시 드라이버>를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미성년에 빗대기도 했다. 그는 그 작품의 각본을 쓰던 자신을 혼란스러운 유년기adolescent에 빗대며, <택시 드라이버>를 재능만 남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수기, 혹은 돌고루끼가 쓰는 데에 실패한 개인적인 수기라고 고백한 적 있다. 폴 슈레이더가 도스토옙스키와 그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작품 속 도스토옙스키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끔 만든다. 다만 <택시 드라이버>는 도스토옙스키를 이어받되 시공간을 달리 설정해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트래비스 비클을 지하생활자로 다루는 작품이었다. 열두 살 창녀 아이리스를 구하고자 하지만 실패로 되돌아간 뒤, 우발적으로 모히칸 머리를 하고 테러를 결심하는, 또 테러 현장에서 발길을 돌려 아이리스의 포주를 죽이러 가는 그의 심리는 계속 대상에게서 우회하는 지하생활자의 심리 구조와 닮아있다. 이는 <조커>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난다.

 

택시 드라이버1976_스틸 컷_네이버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_스틸 컷_네이버 영화

이때 지하생활자의 심리 구조는 무기력증을 존재 상황의 알리바이로 삼고자 하는, 그럼으로써 자신이 주류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야 자아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지하에서 쓰는 수기2부에서 지하생활자가 장교와 즈베르코프를 마주하는 장면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당구장에서 자신을 모욕한 장교에게 원한과 증오를 지니고 있으면서 창밖으로 던져질까 두려워한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파리라고 모욕당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끊임없는 직접적인 교에게 하는 복수가 겨우 어깨를 부딪친 것뿐이다. 즈베르코프에게도 마찬가지다. 즈베르코프는 유산을 상속받고서 물질적인 성공만을 숭배하는 부류로 성장했다. 이 지하생활자가 즈베르코프에게 할 수 있는 복수라고는 파티를 망치는 것이 전부다. 지하생활자는 스스로를 낭만주의자라 칭하고, 내면이 깨어난 자라고 이야기한다. 지하생활자의 무기력증은 1부에서 인간 의식이 4분의 1만 있어도 충분했다는 자조로 드러나기도 한다. 지하생활자의 무기력증은 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고서, 그 사회를 관찰하려 하는 사람들이 처하는 존재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시대와 조르조 아감벤이 동시대성이라고도 정의한 거리를 두면서도 들러붙음으로써 자신의 시대와 맺는 독특한 관계, 정확히 말해 그것은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서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시대와 거리를 두고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다. 그는 스스로를 낭만주의자라 이야기하고, 동시대인으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보고, 종종 우리의 가장 긍정적인 지성들이 보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선명하게 보는 것이다. 그들의 사유는 그 사유로 상대를 감화할 수 있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를 잘 드러내는 명제는 나는 혼자인데 그들은 모두라는 명제다. 동시대인으로 시대를 선명히 인식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하생활자를 1860년대 뻬쩨르부르크의 동시대인으로 본다면, 소설가는 지하생활자와 같은 인물의 내면 풍경을 거쳐서 그 시대를 정확히 볼 수 있다. 폴 슈레이더가 하고자 한 작업이 이러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전 직후, 사회에 불만을 표출하기 힘들었던 1970년대 청춘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했다. 지하생활자를 동시대인으로 볼 때, 이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할 수 있는 인물들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지하생활자는 도스토옙스키가 가고자 하는 결말, 스스로 안티히어로라고 인식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순간에서야 자신을 시대와 동떨어진 인간으로 정체화할 수 있다. <택시 드라이버>는 안티-히어로라는 자각으로 끝난다.

<조커>는 이를 다시금 2010년대 말미에 되살려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되지 않는 영화다. <조커> 에서의 고담은 가상의 공간임에도 현실과의 연상작용을 일으킨다. 고담은 스콜세지의 뉴욕과 닮아 있다. 조커 마스크를 쓴 군중은 월가 시위의 군중, 우파의 부상을 떠올리게끔 만든다. 복지시스템의 붕괴는 1981년도 당시의 레이거노믹스를 연상시킨다. 스콜세지가 뉴욕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미국 역사를 그려내는 풍경의 작가이기에 관객은 스콜세지의 영화를 볼 때 영화 바깥을 되돌아보게 된다. 반면 <조커>에서는 고담이 완강히 픽션에 머무르고 있는 데다가, 고담의 모티프가 된 사건이 1980년대의 것인지 2010년대의 것인지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스콜세지의 미장센을 따라 하려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평론가, 혹은 관객은 이 공간 설정에서 영화 바깥의 세계를 보려 했다. 마이클 무어와 슬라보예 지젝 등 좌파 지식인이 이 영화를 좌파 영화로 보려는 것도, 한편 이 영화를 대안 우파와 인셀 영화로 보려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영화는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세계를 구축하되 여러 이미지만을 발췌한다. 맥락이 제거된 합성 소스를 재조립한 인터넷 밈에 가까운 설정을 지닌 세계인 것이다. <조커>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므로, 모두가 말하게 하는 기이한 영화다.

<조커>에서는 복지시스템 붕괴나 쇼비즈니스의 윤리적 파탄, <모던 타임즈>를 보는 부르주아 등 여러 파편적인 시대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장치가 없다. 그저 파편째로 고담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머무른다.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지는 못한 채 있다. 문제는 이 파편적인 세계를 판단하는 기준이 부재해 있다는 것이다. 아서 플렉은 머레이 프렝클린이 진행하는 TV쇼에 나와 정치는 재미 없다면서 스스로를 광대라 주장한다. 스콜세지의 인물은 그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정치적 행동을 한 인물들이지만 아서 플렉은 어떤 행동에 다다르기 직전 스스로 탈-정치화된 인물이라 선언한다. 아서 플렉의 불행이 정치와 연결는 시도를 차단하는 것이다. 아서 플렉이 악인으로 탄생하게 된 배경인 무너진 윤리, 복지 시스템의 문제를 폭로하려 했다면 그 너머의 요소가 드러나야 할 텐데 이 영화는 그저 그것을 토마스 웨인이라는 인물로 이를 얼버무린다. 그가 아서 플렉을 버린 가상의 아버지이며, 정치와 자본이 결탁되어서 진보가 상상될 수 없다는 음모론적 세계관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영화는 이 모든 불행이 재미있는 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서 플렉의 불행은 사회 구조와는 동떨어진 것이 된다. 관객은 그래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떤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아서 플렉이 겪는 일은 아주 불행한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재수 없음에 밀접하다. 아리랑치기를 당했고, 등처먹는 회사 동료에게 당해 직장에서 잘렸으며 지하철에서 우연히 시비가 걸려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고, 어머니는 아프다. 더군다나 좋아하던 사람이 자신을 조리돌림하기까지 한다. 이를 한 번에 모아두었을 때는 감당이 안 될 정도의 불행한 일이지만 하나하나를 따지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차원의 일이다. 아서 플렉은 정신질환자이기까지 하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인셀과는 다르다. <조커>의 아서 플렉은 인셀이라기에는 여성으로 인한 상처로 반사회적 인간이 된 사람이 아니다. 또한 알파메일에 대한 질투마저 없다. 오히려 장애가 있는데도 생업에 전념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하층민에 가깝다는 인상이 더 강하다. 아서 플렉의 캐릭터마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불행을 한 데에 욱여넣는 듯한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여기서부터 아서 플렉과 인셀 사이의 불가능한 동일시가 일어난다. 조커의 불행이 일상적이므로, 그가 장애인으로 경험하는 소수자성이 드러난다기보다는 재수 없는 일의 연속이므로, 그 맥락만 잘라서 동일시하고 소비하기에 편하다. 영화의 문제점은 여기서 생긴다. 카메라는 재수 없는 일에 불과한 사건을 비극적 상황이라는 듯이 비추고, 음악은 이 감정선을 배가한다. 매혹적이기는 하나 조금만 멀찍이 생각할 때 길티 플레저로 보인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농담을 인용하면, 아서 플렉의 자기연민은 국밥을 먹거나 인형 뽑기를 하는 둥, 일상적인 행복에서 그 탈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커>와 리얼리티의 문제를 논해서는 안 된다. 이 영화에서의 리얼리티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주작 썰처럼 파편화된 진실을 얼기설기 뭉쳐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진정 논해야 할 것은 <조커>에서 현실이 어떻게 경험되는가다. <조커>에서 흔히들 윤리적으로 문제시하는, 카메라부터가, <조커>를 웃기게 보이게 하는 지점이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서 플렉에 가까이 가는 카메라가 왜인지 V-log와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또한 분장실에서 문구를 새기는 것은 SNS에 글을 쓰는 듯한 감각과 닮아 있다. 아서 플렉은 V-log안에서 움직이고 있고, 전국이 이를 생중계하고 있는 셈이다. 아서 플렉은 유투버로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앞서 문제시한 <조커>의 가장 문제적인 장면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자. 조커와 군중 사이에 생기는 비대칭적인 시선은 확연히 동시대의 것이다. 연설과 캠페인 등으로 각각 얼굴을 지닌 대중과 마주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나서다. 각각의 가면을 쓴 군중은 조커라는 동질 집단으로 보이되, 저마다의 아이디를 가지는 인터넷 군중으로 보인다. 이는 똑같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채로 군중이 혁명에 참여한 <브이 포 벤데타>(2006)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다. 조커가 누군지 몰라도 군중이 계속 생기는 양상은 마치 프랙탈의 확장과도 닮아있다. 문제는 군중이 가면을 쓴 채로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흔히들 축제의 장이라고 이야기하는 카니발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커(2019)_스틸컷
조커(2019)_스틸컷

<조커>에서의 군중은 카니발의 전도된 형상으로, 저마다가 폭동을 기반으로 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근 칼부림 예고를 하는 게시물 중 일부는 흔히들 장난으로 올리는 낚시성 게시물이다. 칼부림 예고는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틱톡 챌린지처럼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을 혐오하는 SNS 인터넷 밈은 진즉 칼부림만큼이나 폭력적이었으며, 그것이 현실화된 셈이다. 이는 조커가 의도치 않게 대중을 건드리는 방식과 닮아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21세기의 테러리스트는 슈미트적이라기보다는 도스토옙스키적인, 달리 말해 정치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했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객의 철학에서 2015년의 샹젤리제의 파리 총격 사건을 시작으로 여러 테러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바로 그들이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열심히 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테러리스트가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진지한 태도로 살인에 임한 데에 비해서 지금의 테러리즘은 할리우드 영화 뺨칠 정도로 과도한 편집이 깃든 IS의 동영상과 같다는 말을 이야기한다. (《관광객의 철학아즈마 히로키, 안천 역, 2020, 리시올. p.41-42)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우리 시대의 테러리즘이 스펙터클로 드러난다는 이야기다.  도스토옙스키의악령의 스타브로긴이 아무런 정치적인 목적 없이, 그저 상대방에게 무관심하므로 상대방의 심리를 조작하듯이 우리 시대의 테러리즘은 카니발과 구분할 수 없는 데다가, 진지하지 않은 놀이에 더 가깝다. 아서 플렉은 그 폭동이 사실일 경우에 인터넷 상 군중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다가 버려질 놀이도구에 불과하고, 그도 그를 자각하고 있다. <조커>의 리얼리티는 서사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테러리즘이 인터넷에서 드러나는 메커니즘을 의도치 않게 잘 포착한다는 데에서 나온다. 칼부림이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듯이, 우리 시대의 테러리즘은 인터넷에 익명으로, 그리고 축제의 형상으로 언제 어디서나 산재해 있다.

 

 

글·김경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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