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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타향’ 같은 고향과 ‘장소’로서의 고향의 차이-<와이키키 브라더스>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타향’ 같은 고향과 ‘장소’로서의 고향의 차이-<와이키키 브라더스>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0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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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은 데뷔 초부터 줄곧 ‘낙오된 사람들’을 다루어 왔다. 그래서 “낙오자, 실패자, 소외, 연민 등은 임순례 영화의 원형질”이라는 평가가 어색하지 않다. 그중에서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는 “인물, 주제, 스토리 등 여러 측면에서 임순례의 영화적 DNA를 확인할 수 있는” 초기 대표작이다. 무엇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낙오자’인 주인공 성우에게 고향이 지닌 장소적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따라서 <리틀 포레스트>,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남쪽으로 튀어> 등의 작품과 함께 임순례 영화에 나타난 고향의 의미를 탐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떠돌이 악사로 생활하던 성우는 유랑 밴드를 이끌고 고향 수안보에 돌아와 새 출발을 꿈꾼다. 이-푸 투안에 의하면, 고향은 깊숙하면서도 고요한 애착의 장소이며, 사람들은 고향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윤영호·김미선 옮김, 사이, 2021, pp.79-81). 따라서 고향과 관련해서는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는 일차적인 의미 외에 개인의 정서, 내밀한 체험, 인간적인 유대관계가 중요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충고 보이스 공연과 첫사랑 에피소드가 충주 수안보가 성우에게 애착의 장소가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서사는 성우가 귀향한 현재 시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 중간중간에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플래시백으로 삽입된다. 특히 성우가 서울과 타향에서 경험한 사건들은 성우가 수안보를 유토피아적인 장소로 생각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현재/과거, 타향/수안보의 대비가 고향의 장소적 의미를 강화해주는 것이다. 고향의 이러한 의미는 성우가 고향을 중심에 두고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방랑과 귀환의 기록이다. 성우는 전국의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연주하는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리더이다. 성우의 공간 이동은 ‘고향-타향-고향-타향’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타향에서의 이동은 유랑에 가깝다. 공연 환경도 매우 열악하다. 그들은 장터에서 펼쳐지는 지역 축제, 시골집 마당에서 열린 고희연 등에서 연주한다. 풍찬노숙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밴드 단원은 7명에서 3명으로 줄고, 마침내 성우 혼자서 연주하는 상황에 이른다.

성우는 귀향한 뒤 수안보에서 고등학교 시절 충고 보이스 단원으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 음악학원 원장 등을 만난다. 그런데 성우의 처지는 고향에서도 여전히 궁핍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밴드는 해체되고, 그는 나이트클럽에서도 밀려나 룸살롱을 전전한다. 고향에 남아 있던 친구들의 상황도 성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청 공무원 수철은 해고당한 뒤 자살하고, 민수는 속물적인 약사로 살아간다. 첫사랑 인희도 남편과 사별한 후 채소 행상을 하며 어렵게 생활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인물 구도와 성격은 <리틀 포레스트>와 유사한 점이 많다. 고향과 관련된 성우와 혜원의 행적 이외에 인희/엄마, 수철/은숙, 오병주 원장/혜원의 아버지는 비슷한 캐릭터로 등장해 유사한 역할을 한다. 성우의 첫사랑인 인희는 육체와 영혼이 피폐한 상태로 귀향한 성우를 보살펴주는 유사 어머니이자 연인이다. 이는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가 어린 혜원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성장을 도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반면 유사 아버지 역할을 하는 오병주 원장은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가다가 세상과 허무하게 작별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초반 서사는 주인공 성우의 몰락의 연대기이다. 반면 고향에서 줄곧 생활한 충고 보이스 출신의 수철에게 성우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수철은 성우에게 “성우야, 행복하니?”라고 묻는다. “친구 중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행복한 인물은 성우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우의 실상은 수철의 상상과 거리가 멀다. 성우에게 타향살이는 유랑의 연속이지만, 수철은 단지 꿈을 이루는 과정이라고만 여긴다.

충고 보이스의 공연과 연포해수욕장 장면은 수안보가 성우의 시간이 축적돼있는 장소이자 애착의 장소가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충고 보이스 네 친구가 밴드 연습을 하다가 푸른 바다에 뛰어들어가 수영하고, 알몸으로 모래밭을 뛰어가는 해수욕장 장면은 성인이 된 그들이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실 때, 그리고 성우가 룸살롱에서 알몸 공연의 수모를 당하는 순간에 등장한다. 이로써 성우의 잿빛 현실과 화양연화의 과거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성우는 고향에서도 흔한 떠돌이 악사일 뿐이다.

성우에게 수안보는 고향이지만 어머니의 품과 같은 ‘근원적인 장소’는 아니다. 이-푸 투안에 의하면, 고향에 대한 강한 애착심은 친근함과 편안함, 보살핌과 안전에 대한 확신, 소리와 맛에 대한 기억, 공동의 활동과 세월이 쌓아온 아늑하고 기쁜 추억으로 생겨나는데, 이러한 감정들은 엄마의 존재와 관련이 깊다. 그런데 성우에게는 엄마도, 진정한 친구도 없다. 성우는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친근함, 편안함, 보살핌, 기쁨의 정서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성우에게는 편안하게 휴식할 집이 없다. 성우는 전국 각지를 유랑하는 동안은 물론 수안보에서도 여인숙 생활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인숙은 정주하는 곳이 아니라 임시 거처이며, 편안함이나 보살핌과는 거리가 먼 장소이다. 이러한 설정은 수안보가 성우에게 고향이라는 장소적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수철의 죽음과 장례식장 몸싸움도 수안보의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성우의 여정은 ‘수안보→타향→수안보→여수’로 정리된다. 성우는 고향 수안보에 정착하지 못하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그런데 심층 서사의 측면에서 고향은 성우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생과 부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장소가 된다. 즉 수안보는 성우에게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장소이다. 다시 돌아온 수안보는 성우에게 타향과 다름없는 고향이면서도 성우의 상처 치유와 재생의 가능성을 마련해준 장소가 된다.

그 과정에서 고교 시절 첫사랑 인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우에게는 부모 혹은 집과 관련된 친밀함과 유대감이 없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서먹하기만 하다. 하지만 인희가 여인숙에 머무르는 성우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성우가 연주하는 나이트클럽을 몰래 찾아가고, 성우의 프러포즈를 은근히 기대하는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인희로 인해 수안보는 성우에게 새로운 의미를 장소로 변화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우는 인희와 함께 여수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한다. 밴드의 재결성, 첫사랑 여인과의 재회 및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은 성우의 삶에 긍정적인 신호가 될 수 있다. 이 시퀀스에서 성우는 충고 밴드 시절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밝은 표정으로 노래한다. 이러한 변화는 성우가 수안보에서 재생과 부활의 가능성을 찾았음을 말해준다.

비록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그래서 방랑과 몰락의 시간을 다시 겪을지라도, 성우는 고향에서 새 출발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유사 엄마이자 연인 역할을 하는 인희 덕분이다. 이는 수안보가 성우에게 애착의 장소가 되고, 고향이 장소적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같은 공간이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되는 비밀을 넌지시 알려준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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