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끝이 좋으면 다 좋아”: 김지운의 <거미집>(2023)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끝이 좋으면 다 좋아”: 김지운의 <거미집>(2023)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20 0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1970년대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 <거미집>

김지운 감독의 10번째 장편영화로 칸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호평을 받았던 <거미집>(2023)은 동명의 <거미집>이라는 영화의 재촬영 과정을 다룬 영화에 관한 영화, 즉 메타영화적 영화이다. 이 영화는 영화 속 영화 기법을 사용하여 영화 속 영화가 만드는 ‘거미집’과 그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가 만드는 ‘거미집’이 상호반영 효과로 서로를 비추는 두 개의 ‘거미집’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전개한다.

이 영화는 1970년대, <별들의 고향>(1974)이 촬영되고 있던 무렵쯤, 영화 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프레임 영화와 제작 중인 영화를 프레임 속 영화, 영화 속 영화로, 각각 칼라와 흑백으로 구별하는 이중적 구조로 전개된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는 한국영화를 외화와 구별하여 ‘방화’로 불렀던 시대이다. 그 당시 한국영화 산업의 시스템은, 영화 속 영화의 촬영 과정이 보여주듯이, 반체제적 이데올로기 타도와 퇴폐 퇴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문화공보부의 독단적 대본 검열, 열악하고 위험한 스튜디오 시설, 렌탈에 의존하는 카메라와 촬영 장비 사용, 배우들의 겹치기 촬영 스케줄 등과 같은 악조건 속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1960, 70년대 한국영화계는 위대한 감독들과 걸작들을 배출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최근 21세기 K-시네마 시대에 이르러 이 시대의 한국영화에 대한 다시 보기와 재평가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신성필름’(신필름)과 같은 당대 충무로 스튜디오는 거대 미디어그룹의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20세기말에 이르러 블록버스터(blockbuster) 시대의 초석을 이룬 헐리웃 스튜디오들과는 그 여건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러나 충무로 스튜디오들 또한 예술적 창조력을 말살시키는 강압적인 유신시절 영화법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발전시켰으며, 나아가 국제적 위상이 남달라진 K-시네마로 도약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K-시네마를 주도하는 후대 감독들로부터 오마주를 받는 김기영 감독과 <하녀>를 비롯한 그의 일련의 하녀 영화들이 행사한 영향력의 비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2. ‘도난당한 대본’으로 만든 걸작

이 영화는 김기영의 영화를 주로, 히치콕의 영화도 각색, 전유, 인유, 브리콜라주 등 다양한 각색과 전유의 ‘도난’ 방법을 이용하여 만든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제작 과정을 다룸으로써 1970년대 한국영화에 대한 다시 보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을 찍고 있는 1970년대 김열 감독(송강호)을 21세기 <거미집>을 찍고 있는 감독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고 있다. 김열의 성공적인 감독 데뷔는 그가 훔친 스승 신감독(정우성)의 대본, 즉 스승의 ‘도난당한 대본’으로 만든 영화로 가능했다.

여기서 “도난”하다(purloin)라는 말은 ‘훔치다’라는 의미로만이 아니라 다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도둑질하다(steal), 연기하다(put off), 연장하다(pro-long), 제쳐놓다(set aside), 무력하게 만들다(render ineffective), 신의를 버리고 자신의 용도를 위하여 그릇되게 유용하다(appropriate) 등과 같은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특히 ‘전유’를 뜻하는 신의를 버리고 자신의 용도를 위하여 그릇되게 유용하다는 의미의 도난은 각색과 전유 행위가 바로 도난의 행위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포우(Edgar A. Poe)의「도난당한 편지」(“The Purloined Letter”)를 “도난”하여 패러다임을 만들었고, 그가 정신분석의 스승 ‘프로이트로의 돌아감’을 주장할 때, 그것은 단순히 프로이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스승 프로이트의 “도난”을 의미한다. 김열 감독이 창조한 첫 걸작 또한 스승에 대한 충성어린 오마주가 아니라 그에 대한 불충과 배신의 일탈 행위의 결과인 것이다.

스승의 유작 대본을 훔쳐 만든 <불타는 사랑>으로 감독 데뷔를 한 뒤, 김열 감독은 동료들로부터 항상 스승과 비교되고 성공적인 차기작이 없이 3류 치정극만 찍는 B급 영화감독 취급을 당하게 된다. 이에 그는 지독한 열등감과 강박에서 헤어날 수 없고 환각에 시달리며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 항우울증약에 의존하고 있는 그는 반복되는 꿈을 통해 이미 완성한 치정극 <거미집>을 걸작으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결말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고, 그대로만 찍으면 반드시 걸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맹신하고 재촬영을 강행한다.

김열 감독은 어쨌든 재촬영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칠 수가 있었고, 다시 찍은 영화의 시사회에서 마침내 관객의 환호를 받지만, 이에 정지한 채 비추는 카메라의 집요하고도 강박적인 프레임 속 그의 얼굴 표정은 기쁘기보다는 공허하고 혼란스럽다. 이러한 프레임화의 엔딩 장면에서 김열 감독의 표정이 김지운을 비롯한 K-시네마를 이끌고 있는 21세기 후대 감독의 복합적인 심리를 투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카메라-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심층적 의도는 한국 영화의 새로운 미래로의 탈주를 위해 1970년대 영화를 ‘도난’한 21세기 후대 감독의 복합적인 심리와 입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정신분석적 해석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3. “결말만 바꾸면 걸작이 된다, 딱 이틀이면 돼!”

셰익스피어의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는 간단한 해결책 이상을 요구하는 복합적인 딜레마를 제기하는 그의 문제극(problem play)으로 분류된다. 엔딩 장면의 김열 감독의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끝이 좋으면 걸작이 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그의 재촬영 또한 단순히 걸작 완성의 성공이라는 해피엔딩 이상의 복합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영화계를 패로디하거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특정 시대의 영화계만을 다룬 영화는 아니다. 특정시대를 다루고는 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과 1970년대 영화계 자체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 또한 블랙코미디임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신연식의 김기영 시나리오를 각색하여 완성한 영화이지만 이 영화는 특정 감독 김기영의 전기 영화가 아니다. 주인공 김열은 김기영을 포함하여, 1960년대와 70년대 이만희, 신상옥 등과 함께 활동했던 감독들을 혼합해서 만든 영화에 대한 광기어린 집념과 욕망을 가진 허구적 인물의 감독이다.

대체로 영화에서 카메라가 화자의 역할을 대체하지만, 이 영화는 주인공 김열 감독을 보이스오버의 화자로도 등장시킨다. 따라서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화자에 의하여 전개되고, 관객은 자기의식적인 화자에 의하여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즉 김열 감독의 주관적 관점, 그의 열정과 욕망의 궤적을 따라가도록 유도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열 감독은 관객을 주도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화자’(reliable narrator)는 아니다. 이 영화에는 김열 감독의 주관적 지각-이미지만을 따라가는 카메라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존재, 즉 카메라의 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장면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뿐 아니라 난동의 소극(farce) 같은 재촬영을 끝낸 직후 텅 빈 스튜디오 장면 또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카메라는 배우들과 스탭들이 그 장면에서 떠나길 기다리다가 다시 비게 된 공간으로 들어와 감독 의자에 앉아 있는 김열 감독의 뒷모습과 돌아서 옆과 앞을, 그리고 뒤로 물러나 다시 빈 공간을 프레임 속에 담는다. 이러한 프레임화를 집요하게 강요하는 카메라-의식은 이 장면에 대한 의미화를 관객에게 맡긴다. 즉 김열 감독의 주관적 지각-이미지와 더불어 그것에 대하여 반성하는 카메라-의식을 감지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 촬영이 끝난 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은 ‘끝이 좋으면 다 좋아’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카메라가 인식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4. 두 개의 ‘거미집’의 식별불가능한 공존 상태와 단락

이 영화의 무대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 스튜디오이고, 주인공은 카메라 뒤에 있어야할 감독이다. 그리고 이 영화 <거미집>은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카메라 앞에 있어야 할 배우들이 앞과 뒤를 오가며 만들어 내는 두 개의 ‘거미집’들로 구성되고, 이 두 거미집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 영화 속 영화와 영화 밖 영화, 프레임 영화와 프레임 속 영화로서 두 영화 <거미집>은 메인과 서브라기보다는 상호작용을 통해 영화 속 영화의 허구와 영화의 현실 사이의 식별불가능한 공존과 단락(short circuit),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을 보여줌으로써 각각의 공간에서 불거진 문제와 혼란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혼돈 가운데 새로운 창조로, 미래로의 출구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내재하고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불륜 스토리와 본 영화 <거미집>의 현실의 불륜, 즉 사장(강호세)과 여공 출신 첩(한유림)의 불륜 관계와 남자 주인공 사장 역을 맡은 톱스타 강호세(오정세)와 첩 역할을 맡은 한유림(정수정) 사이의 불륜 관계는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 이미지로 작용한다. 이 두 이미지들의 상호간의 작용으로 관객은 오정세와 정수정이 연기하는 사장과 강호세, 첩과 한유림을 의식하며 보게 된다. 또한 영화 속 영화 기법을 사용한 메타영화적 구조로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영화의 허구적 세계를 확장하여 동시에 현존하고 있는 사장/유부남 톱스타 강호세/오정세, 여공/신인배우 한유림/정수정을 보도록 유도한다. 이들 뿐만 아니라 사냥꾼(만취한 배우 대신 투입)/김열 감독/송강호, 시어머니/김열 감독의 단골 배우 오여사/박정수, 아내/베테랑 여배우 이민자/임수정, 유림 대신 투입되었지만 연기력 부족으로 컷 당하는 여공/김열 감독이 걸작을 만들 것을 확신하는 신성필름 후계자 신미도/전여빈 등까지 모든 인물들이 동시에 현존하는 역할/배우, 허구세계/실재하는 세계 사이를 넘나들며 식별불가능한 이미지들을 만든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이미지가 속하는 범주를 더 이상 명확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뜻에서 식별불가능인 것이다. 그러나 거울 이미지로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두 ‘거미집’의 식별불가능한 상호작용은 단락과 간극을 발생시킨다.

영화 속 영화에서 여공(유림)이 유부남 사장(호세)의 아이를 임신했듯이, 프레임 영화에서도 호세는 유림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촬영 도중 유림이 호세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자, 이중 구조의 거미집 플롯은 충돌로 인해 일종의 단락을 일으킨다. 영화 속 영화의 내러티브 공간에 머물고자 한 불륜남으로서의 호세의 시도와 고민이 헛된 것임을 관객은 알게 된다. 이러한 단락에 의한 간극의 발생은 두 플롯의 상호작용에 의한 식별불가능한 공존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한다. 촬영이 끝나자 다음 일정을 위해 유림이 바쁘게 떠나는 것을 보면서 호세는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흔쾌히 작별을 고하고 떠난다. 사귀다 헤어지는 배우들의 진부한 입장 발표 같이 들릴 수 있지만, 이제 이들은 거미집에서 벗어나 각자의 길을 가는 동료 배우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5. 김지운의 김기영 다시-보기

김지운 감독 자신도 궁금해 했듯이,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을 한편의 영화로 완성한다면, 아마도 그 영화는 김기영의 <하녀>를 비롯한 일련의 하녀 영화 시리즈를 ‘도난’, 전유한 김지운의 김기영에 대한 다시-보기가 될 것이다. 김기영은 <하녀>를 리메이크한 <화녀>(1971), <화녀 '82>(1982)로 <하녀> 삼부작을, 그리고 하녀 뿐 아니라, 1960, 70년대 한국사회의 근대화가 파생시킨 여공, 호스티스와 같은 새로운 젠더적 하위 계층들에 대해서도 일관된 관심을 보여 호스티스와 첩을 주인공으로 한 <충녀>(1972), 그리고 이를 리메이크한 <육식 동물>(1984)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따라서 김기영의 이러한 영화들은 ‘근대화의 하녀’로 통칭할 수 있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한국 하녀 영화 시리즈의 원조로 불릴 수 있다.

김기영의 하녀 영화 시리즈에서 동식(주진규)과 같은 남자 주인공은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무력한 존재이다. 반면에 여자들은 비밀을 품고 계략에 따라 행동하는 능동적인 존재이다. 순종적인 본처가 남편에게 버림받고 자살을 하는 기존 치정극의 결말을 신여성 본처가 첩과 함께 공모하여 남편과 시부모에게 복수하는 스릴러 영화의 결말로 대체하여 완성한 영화 속 영화 <거미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들 또한 욕망에 이끌려 움직이다 거미집에 붙들린 곤충처럼 무력한 존재가 되고, 여자들도 모두 원한을 품고 계략을 꾸며 복수를 실천하는 능동적인 여자들로 등장한다.

거미집은 다른 곤충들로부터 거미를 보호해 주고, 걸린 곤충들을 무력화시켜 손쉽게 잡아먹힐 수 있게 만든다. 배우 유림은 촬영에 산 거미를 사용하는 것을 질색할 정도로 거미를 싫어한다. 유림이 맡은 여공 출신 첩 또한 불륜의 잠자리에서 거미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고, 최후의 생존자로 남게 된 그녀가 죽게 된 것도 금고 속 거미의 공격 때문이다. 영화 속 영화의 엔딩은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모두 거미줄로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미집에 걸려든 모든 사람들이 무력화되어 거미의 먹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김기영의 <하녀>의 엔딩은 관객이 여태 본 하녀와 동식의 동반 타락과 죽음의 장면들을 모두 신문에 난 기사에 대한 동식의 스토리텔링, 즉 그의 환상의 산물인 영화 속 영화로 만들어 버리는 허망한 결말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해피앤딩은 능동적으로 성적 욕망과 계급상승 욕망을 표출한 여성들, 특히 하위 젠더 계층인 하녀의 마녀사냥으로 중산층 가부장의 헤게모니를 재확립하려는 감독의 의도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영화 속의 영화가 동식의 환상의 산물로 처리되고 있듯이, 김기영의 하녀 영화는 당대 근대화가 초래한 시대적 불안감에 대처하는 그의 남성적 환상의 산물로 간주될 수 있다. 반면에 김열 감독의 꿈과 환상의 산물인 새로운 결말은 원테이크로 가는 쁠랑 세깡스(plan-séquence)로 촬영을 강행한 엔딩 시퀀스로 성적 욕망과 물욕에 따라 움직이다 거미집에 걸린 등장인물들 모두의 동반 타락과 죽음에 이르는 엔딩을 제시한다. 이러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엔딩은 중산층의 가부장적 헤게모니에 대한 신랄한 비판적 입지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김지운의 김기영 다시-보기 영화로서 <거미집>은 그의 남성적 환상의 산물은 결코 아닐 것이다. 거미는 가만히 기다리다 먹이를 잡아채서 먹는 간교한 곤충으로 비유되지만, 자신의 몸에서 거미줄을 만들어내는, 즉 창조적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신화적으로도 창조와 생명, 또한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는 거미는 여성을 그 시조로 한다. 그리스 신화에 거미의 시조로 등장하는 인간 여성 아크라네는 전쟁의 여신이자 직조의 여신인 아테나와 베짜는 실력을 겨루어 승리했으나 아테나의 노여움으로 저주를 받아 거미가 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 첩(유림)이 금고를 열자 그 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려온 거미가 그녀를 공격한다. 여기서 거미의 공격은 아크라네의 복수의 반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시어머니는 가부장제를 수호하는 여신 아테나에, 그리고 그녀가 내쫓은 남편과 불륜으로 임신한 여자는 첩(유림)처럼 방직공장 여공으로 아크라네에 각각 비유될 수 있다. 그 여공 아크라네는 시어머니(오여사) 아테나가 수호하는 부당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부패한 권력층인 중산층 가정을 둘러싼 욕망의 네트워크 속에서 희생을 당한다. 그 여공은 시어머니가 내쫓은 시아버지의 첩이자 아들의 본처(민자)의 죽은 어머니이다. 따라서 거미의 반격은 이 모든 사태의 원천이 되는 여공의 원한의 복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김기영의 다시-보기로 김지운이 완성할 수도 있는 <거미집>은 그의 남성적 환상의 산물이 아니라 아내, 첩, 며느리를 가부장의 욕망을 위한 대상, 소유물로 취급하는 가부장제의 폭력적 권위에 대한 페미니즘적 도전과 저항의 산물로도 간주될 수 있는 여지도 다분하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