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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액션에 대한 게으른 상상력이 머무는 곳 - <황야>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액션에 대한 게으른 상상력이 머무는 곳 - <황야>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4.02.19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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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는 무엇인가가 달라질 것이란 가능성을 봤을 때 품을 수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엇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있기만 하다면) 조금은 변화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기대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영화들이 큰 기대를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다른 무엇에 대한 가능성을 충족시키지 못한 탓이 크다. 어떤 배경이든, 어떤 사건이든 , 혹은 어떤 인물이든 상상을 벗어나는 장면을 경험하긴 쉽지 않았고 이야기의 흐름은 ‘또’라는 말로 축약시킬 수 있을만큼 이러저러하고 그렇고 그런 경로에 놓여 있었다. 퇴행이 아니기만 해도 다행일 상황, <황야>는 정확히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디스토피아라는 배경과 액션이라는 장르, 그리고 이 액션을 수행할 배우가 보여줄 것은 새로울 것이라는 기대와 상당한 거리를 설정한다. 디스토피아라는 배경에서 벌어질 일들은 가장 가깝게는 붕괴와 맞닿았던 <콘크리트 유토피아>, 인간을 위협하는 괴물로 인해 잿빛 세상을 그렸던 <반도>,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쳤던 <사냥의 시간> 등에서 이미 겪어온 바이며, <황야>의 많은 설정들은 이 작품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배경이 반복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비슷한 배경에서 비슷한 사건을 바탕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장르적 컨벤션 안에서 충분히 운용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황야>의 앞에 놓인 세 작품은 그런 면에서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황야>는 이 모든 것을 어설프게 뭉뚱그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결점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액션이라는 장르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의 그 닳고 닳은 설정들을 너무도 쉽게 끌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영화는 기수(이희준)가 딸을 살리겠다는 일념 속에서 과도한 실험을 진행하며 붕괴된 세상에서 벌어질 음모를 예비하며 시작한다. 이후 영화는 폐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남산(마동석)을 쫓으며 나름의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삶을 보여주며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수나(노정의)와 남산의 관계를 제시한다.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자신의 딸과 닮은 수나를 챙기는 데에 진심을 다하는 남산, 영화는 여기에서 부터 예의 그 뻔한 ‘약자를 지키는 남성만’을 위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황야>를 보면서 가장 많이 겹쳤던 작품은 무려 2010년도 작품인 <아저씨>였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진 남성, 자신을 지켜줄 이와 함께 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 무뚝뚝하면서도 소녀에게만 마음을 여는 두 사람만의 유대, 그리고 이 남성의 엄청난 신체 능력. 물론 이 모든 설정은 엄청난 신체적 능력을 지닌 남성의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아저씨>의 소미가 마약하는 엄마를 보아야 했고, 납치된 아이들 사이에 섞여야 했으며, 마약을 제조하다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을 목격하고 급기야 장기가 적출되는 위기에 놓였어야 했던 것처럼, <황야>의 수나는 할머니와 폭력적인 이별을 해야 했고,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격리되어야 했으며, 기수가 감춰온 끔찍한 실체를 마주하고 생채실험을 할 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황야>에서 한 가지 다른 점을 찾으라면 이런 남성이 한 명 더 등장한다는 사실 정도가 아닐까. 기수가 딸을 살리겠다고 진행한 실험의 결과는 끔찍하게 상체만 남겨진 소녀의 모습으로 가시화됐으니 그 참담함이 차이라면 차이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오래된 레퍼런스를 고스란히 가져온 <황야> 앞에서 도대체 남성들의 분노는 왜 늘 소녀의 희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냐는 질문은 던질 수 조차 없다. 이를 더 확장한다면 한국영화에서 ‘(유사)딸’ 이라는 인물들이 어떻게 그려지고 어떤 위험에 처해있었으며 결국 어떤 식으로 희생되거나 왜 죽기 직전에야 구조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해야 할 텐데 이 영화에서는 이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기대할 수 없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이 기대는 것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이다. <황야>의 이 모든 설정은 남산, 즉 마동석이라는 배우의 신체에 전적으로 기대어 운용된다. 이 작품의 고루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엄청난 액션이라는 이름 아래 감추어진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손쉽게 활용되는 ‘딸’들의 희생, 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가? 

이러한 이유로 <황야>에서의 디스토피아라는 설정도, 죽지 않는 인간들의 등장도, 먼저간 요원들을 살리겠다며 나섰던 여성 은호(안지혜)의 역할도 사실 중요치 않다. <범죄도시>시리즈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 배우의 액션과 농담이 뒤섞인 <황야>의 황량함은 그 익숙함과 반복으로 인해 어떤 기대도 품을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넷플릭스 1위라는 결과로 쉽사리 <황야>의 빈곤함을 누르려는 것은 꽤나 치졸한 발상이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작품과 다르게 OTT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작품은 OTT 메인화면에 얼마나 오래, 그리고 자주, 큰 화면으로 노출시키느냐에 따라 영화 감상의 가능성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게 지적되지 않는다. 작품성만으로 도출되지 않았을 ‘1’이라는 숫자로 많은 것이 나려앉는 지금, 작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황야>(2024.1.26. 넷플릭스 공개)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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