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을 소재로 한 영화 <미나리>가 언론에서 떠들썩하다. 그 이유는 윤여정의 연기 때문이다. 관심의 초점은 당연히 아카데미상 수상으로까지 모인다. 그게 뭔 대수인가. <기생충> 때도 그랬지만 한국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는 것이 무슨 지상 최대의 목표인 양 호들갑 떠는 건 더 이상 못 봐주겠다. 아카데미상을 받든 말든 연기 잘했고 영화 좋으면 그뿐이지, 일개 미국 내 영화상일 뿐인 아카데미를 왜 세계 최고의 상처럼 떠받드는지. 이제 그만 중단해주길 바란다. 너무 한쪽을 올려주다 보면 다른 한쪽이 내려간다. 차분한 비평을 통해 영화의 진가를 사유하는 노력을 하는 게 남는 일 아닌가.
언론의 홍보와는 별개로, 이 영화는 윤여정의 수상 말고도 미국영화치곤 한국인과 깊이 연관된 부분이 많아 논의할 지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미국영화인지 한국영화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국어가 많이 나오고 또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엄밀히 따져보면 이 영화는 헷갈릴 일 없이 무조건 미국영화다. 미국 제작자에 미국인이 감독이다. 배우만 한국인을 썼을 뿐인데 왜 한국영화인가. 물론 한국인 소재에, 한국배우가 열연을 하니 혼동할 수는 있지만 엄연한 미국영화다. 그런 점에서 미국영화 사이의 한국인 소재 영화로서 논의할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논점으로 바로 들어가자. 영화는 지금의 2020년대를 그리지 않는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몇십 년 전의 미국이다. 우리에겐 한국인의 이민을 소재로 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미국인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노스탤지어 영화다. 지나간 시대를 회고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미국 관객들에게 어필했으리라는 추측을 해본다. 서부극을 통해 향수를 느끼는 미국 관객들이기에, 그들은 이 영화로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즐거움을 얻는다. 한국인 관객과 미국인 관객이 공감하는 지점은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뉜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한다. 남을 배려하거나 양보하는 일은 두 번째다. 그러니 미국에서 한국계 이주민이 뿌리를 내리는 일이 쉬울까? 영화는 트레일러집에 도착한 제이콥(스티븐 연) 일가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가난한 일가족의 유랑을 그린 미국인’ 소재의 원형은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조드 일가를 소재로 한 존 스타인벡의 대표적인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였다. 미국인들은 영화 속 가난한 한국인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동정하지만, 그건 자신들의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향수로 인해 전이된 감정일 것이다. 제이콥 부부는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고 제이콥은 틈틈이 농작물을 심는다. 그는 미국 땅에 자신의 존재와 일가를 뿌리내리고 싶어하는 야망을 갖고 있다. 그에게는 농작물을 팔아 돈을 벌어 사업가가 되고 부를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에 비해 아내 모니카(한예리)는 현실적이다. 그녀는 척박한 땅으로 와서 고생해야 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교육과 건강이다. 아이의 심장병 때문에 그를 건사할 친정엄마(외할머니) 순희(윤여정)가 집으로 온다.
서로의 다른 이상 때문에 미국에서의 삶은 부부의 잦은 싸움으로 점철된다. 이들이 싸우는 이유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병아리 감별사 일은 기계적인 노동이고, 제이콥은 공장에서 기계의 부속으로 살면서 부를 축적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는 자영업자가 되어 더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연친화적인 농업을 선택한다. 한국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유전자를 찿다보니 하이테크 기술이 아닌 자연친화적인 농업이다. 그는 트레일러가 위치한 척박한 황야를 ‘에덴동산’이라 이름짓고 거창한 창세기를 시작한다.
그는 미국이라는 척박한 대지에 한국인의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물을 대고 전기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주정부의 시스템과 마찰을 일으키고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의 시스템은 이주민들이 부를 획득하기 용이한 구조가 아니었다. 미국인들이 이민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들의 시스템을 위한 노동자로 이용하기 위함이지, 외국인이 미국을 지배하는 운영자가 되길 원한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정책에는 이주민의 자율적 행동에 대한 제재가 많을 수 있다. 제1세계와 제3세계가 갈등하는 양상이다. 이 영화는 제3세계 이주민인 제이콥 일가가 제1세계 선진국에서 착취당하면서 미국에서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은유적 공간과 이미지를 통해 제이콥의 야망과 이상을 짐작케 한다. 한국에서 온 외할머니가 심은 미나리는 제이콥이 농작물을 재배하는 척박한 황야와는 달리 멀리 떨어진 숲 그늘진 계곡에서 자라난다. 그곳은 뱀도 출몰하는 원시적 공간의 이미지다. 그곳에다 미나리를 심는 할머니는 미국사의 인디언처럼 문명 속의 원시, 마녀나 현자, 주술사와 같은 이미지로 나타난다. 에덴동산은 제이콥이 지칭하던 황야가 아니라 이곳 미나리가 자란 곳이다. 뱀이 있는 숲속의 미나리는 선악과인 셈이다. 본토 미국인들에겐 악이고 이주 한국인들에겐 선의 열매였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제이콥은 그 장소로 와서 무성하게 자란 미나리를 보며 희망의 에너지를 충전받는다.
정이삭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는 한국인의 문화적 유전자를 진하게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제이콥의 일을 돌봐주는 폴이라는 미국인은 다른 미국적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그는 채소의 씨를 심는 날, 악귀를 물러나게 하는 ‘굿’ 비슷한 행위를 연출한다.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며 예수의 골고다길 수난의식을 수행한다. 폴의 이미지는 현대 물질 자본주의 미국과는 정반대의 반문명적 이미지다. 그 이미지는 감독의 목소리로 보이는 미국 문명에 대한 해석이다. 미국 자본주의가 극단적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몸짓을 가져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로 들린다.
종래 제3세계 영화는 제3세계 자국 내 제1세계와의 갈등을 그린 신식민주의 주제였다면, 지금 이 영화는 제1세계를 무대로 제3세계 문제를 그린 다문화 소재의 탈식민주의 영화다. 한국 관객들은 한국인들이 이민 소재를 이야기하니까 당연히 한국영화라고 생각하며 보겠지만, 이 영화는 미국 내의 외국인 이주민이 어떻게 정착하는가를 그린 미국영화다. 신식민주의가 제1세계의 제3세계 착취를 논의했다면, 탈식민주의는 제1세계 내의 주체와 타자의 갈등을 타자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제1세계 내의 타자로 분류되는 사회적 약자들은 여성, 이주민, 불법체류자, 성적소수자 등이다. 그 가운데 하나인 한국계 이주민들은 불법체류 난민이 아닌 합법적 이주민임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 이주민의 정체성은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타자로 차별받는다.
정이삭 감독은 이런 이주민의 입장을 타자적으로 묘사하면서 미국정치체제가 이들의 소수민족성을 정당하게 대우할 것을 영화적으로 항변한다. 감독은 제이콥이 부를 형성하는 과정이 험난하고 순조롭지 못함을 보여주는 장면을 종래 할리우드 영화문법처럼 드라마틱하게, 악한 미국인과 선한 한국인의 이분법적 대립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생산물을 팔지 못하거나 순희로 인한 화재로 터전을 잃어버리는 등 절망적인 상황이 등장하지만, 그 원인이 미국인들의 직접적인 방해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감독은 제이콥 일가가 겪는 어려움이 표면적으로 미국인의 직접적인 방해 때문은 아니지만, 영화는 여전히 미국은 뿌리내리기 어려운 땅이고 미국화되지 않으면서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 사기를 당하거나 불구가 된 순희의 화재는 외국인으로서 고립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비극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미나리’를 중요한 상징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백인만의 나라가 아니고 누구나 같이 자국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국가여야 한다는 믿음, 그런 평등주의가 감독에겐 있다. 한국계 이주민들은 미국주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적인 문화를 유지하며 뿌리를 내리고 왕성하게 성장할 것이다. ‘미나리’의 상징은 그런 것이다.
글‧정재형
영화평론가.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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