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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마실 때는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19를 들어요”
“와인 마실 때는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19를 들어요”
  • 성일권 기자
  • 승인 2024.07.09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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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스트 이정란의 다정한 와인 이야기

바람이 살랑이는 고즈넉한 계절에 어울리는 음악이 있다면, 아마 첼로 연주가 아닐까. 낮은 음넓이는 굵고 부드러운 음 빛깔을 가지며 높은 음넓이는 달콤하고 정열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는 첼로 연주를 듣고 있자면, 일상의 상념에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뮤즈의 숨결을 느낀다. 첼리스트 이정란의 첼로 연주를 듣다가 문득 그녀가 그리스 신화 속의 뮤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만큼 그의 연주가 청중들에게 감동의 울림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인터뷰어/글 성일권 사진 생동 스튜디오 @saengdong.studio

 

 
첼리스트 이정란의 다정한 와인 이야기

“와인 마실 때는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19를 들어요”

파리에서 연주후 찾은 센 강의 알렉상드르 3세 다리 ©taewook_kang

 

 그녀는 와인잔에 살짝 입술을 적시며, 

“맛이 좋은 걸요”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음색,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연주, 자연스럽게 체화된 무대매너는 이정란만의 독보적인 매력이다.12살의 나이로 서울시향과 처음 세종문화회관에서 협연을 했고, ‘파블로 카잘스 콩쿠르’(2000)에서 ‘로스트로포비치 재단 특별상’을 받았다. 서울 음대 재학 중 프랑스에 가서 필립 뮬로, 이타마르 골란, 미리암 프라드 등 당대 최고의 거장들에게 사사했으며 ‘윤이상 국제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화려한 커리어와 실력으로 도처에서 연주 콜을 받는 이정란 첼리스트를 남양주의 ‘프라움’에서 만났다. 북한강 노변에 자리한 프라움은 레스토랑과 악기박물관, 연주장을 갖춘 고즈넉한 곳으로 첼리스트와의 대화에 감성의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첼리스트는 소풍 나온 소녀마냥 아름다운 주변의 풍광에 환호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와인잔을 살짝 흔들면서 “이렇게 멋진 곳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어 너무 기뻐요”라고 말을 꺼냈다.

와인과 음악, 불가분의 관계

요즘 연주회를 참 많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얼마 전 서울시향에서 제가 수석으로 연주를 했고요. 서울시향에서 2007년부터 7년간 근무하다가 2015년에 그만두었는데, 그 이후 처음 돌아가서 객원 수석으로 연주하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너무 설레어서 좀 긴장했어요. 11~12월에는 소규모의 실내악 연주를 자주 가졌고요.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12월 20~21일 이틀에 걸쳐서 금호 솔로이스트 공연을 했고, 내년 2월 29일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있어요. 이것도 역시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공연을 하는데, 피아니스트 김태형 님과 오랜만에 독주회를 하게 됐어요. 요즘 연주 연습을 많이 하고 있지만, 오랜만의 독주회라서 떨리네요.”

파리 유학 시절에 와인 많이 드셨어요?

“주변에서는 제게 ‘파리에 살면서 맨날 와인만 마셨겠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어요. 그때는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고서는 이런저런 자리에 나가게 되면서 좋은 와인을 접할 기회가 많이 생기더군요. 주류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던 제가 요즘 와인의 세계에 눈을 뜬 것 같아요.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유학 시절에 굳이 외면했나 하는 아쉬움도 들고요.”

수많은 예술가들의 자취가 묻은 퐁 데 자르(예술의 다리)에서 ©taewook_kang

어디서 주로 와인을 접하시나요?

“당연히 연주회가 끝난 뒤의 파티장이지요. 음악을 하시는 분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와인잔을 사이에 두고 얘기하면 분위기가 금세 편안하고 친근해져요. 확실히 와인은 사람과 사람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가교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아직 잘 모르는 연주자들끼리는 서먹할 때가 많은데 연주가 끝나고서 와인이 들어가면 모두가 수다쟁이가 돼요. 인간관계도 넓어지고 깊어지고....”

지금 앞에 있는 와인은 어떠신가요? 이탈리아의 ‘비에티, 로에로 아르네이스’(Vietti, Roero Arneis)입니다. 지역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해서 생산된 와인이에요.

“맛도 좋지만, 취지가 너무 좋은걸요. 맛이 감미롭고도 적당히 바디감이 느껴져요. 마치 따사로운 지중해 바람을 쐰듯한 기분이에요.”

비에티,
로에로 아르네이스
신선한 꽃, 감귤, 멜론 향과
아몬드의 풍미의
복합미가 상당한
화이트 와인

평소 와인을 자주 즐기시나요?

“크고 작은 파티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게 와인이지요. 파리에서는 아직 와인 맛을 몰랐고, 요즘에야 비로소 와인의 은은하고 깊은 맛을 느껴보는 것 같아요. 지인들로부터 초대를 받거나, 또는 지인을 초대하거나, 연주회 뒤의 뒤풀이 파티 때나 항상 와인이 있는걸요.”

이정란님 같은 프로 연주자에게 와인은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술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와인을 마시면 음악이 더 좋게 들리고 음이 좋은 음악을 듣게 되면 와인이 생각나요. 와인과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라 할까요.”

인터뷰 중 이정란 첼리스트가 첼로 연주를 시작하자, 아름답고 깊은 선율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연주자의 컨디션이 대단히 좋을 때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행운이다.

 

깊고 아름다운 선율을 닮은 첼리스트의 삶과 소망

이정란과 <NARA> 취재팀은 프라움 레스토랑 뒤뜰의 잔디밭을 잠시 걷다가 자리를 옮겨 악기박물관 2층의 빈 공연장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창문 너머의 북한강에선 은빛 햇살이 반사되었고, 창문의 작은 틈으로는 맑은 공기가 스며들었다. 첼리스트는 케이스에서 첼로를 꺼내 자세를 잡고, 튜닝을 한 뒤 활을 높이 치켜들었다. 굵고 부드러운 음색의 선율로 시작된 음악은 달콤하고 정열적인 울림으로 이어졌다. 연주하기 전의 음색 고르기 작업인 듯싶었다.

와인과 함께 듣기 좋은 음악이 있다면, 그 연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딱 있어요.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19. 이 음악을 들으시면 아마 첼로의 깊은 음색과 와인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와인의 맛이 한층 더 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거예요.”

첼리스트는 악보 없이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몇 개 더 연주한 뒤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음악을 잘 아시는 분이 건물을 설계한 것 같아요. 연주장의 규모는 작지만 소리가 잘 울려 퍼지고, 첼로 연주가 더 청아하게 들리는 것 같아요.”

어떻게 첼로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3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을 접했어요. 첼로는 6살부터 시작했는데, 첼로광이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딸을 낳으면 첼리스트로 키워야지’ 하는 바람을 갖고 계셨대요. 그래서 건반악기인 피아노에서 어느 정도 노트 읽기를 마친 뒤 자연스럽게 첼로로 옮겨간 거죠. 뭐랄까... 첼로는 피아노에 비해 아주 기본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더군요. 현악기가 가지는 특성상 제 몸을 잘 이해하고 근육을 써야 되고 해서, 처음에는 피아노보다 첼로가 더 어렵게 느껴졌어요. 지금은 첼로 연주가 훨씬 익숙하고 편하지만요.”

첼로의 매력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모든 음악은 지친 영혼에 위안을 줘요. 그중에서도 첼로의 선율은 사람 마음을 더욱 푸근하게 해주는 거 같아요. 엄마 품 안에 포근하게 안긴 듯한 기분이 들도록 말이에요. 첼로를 연주하거나, 그걸 듣고 있자면 평온하고 따뜻한 곳에 푹 파묻힌 듯한 느낌이 들어요.”

조금 전 잠시나마 이정란 님의 첼로 연주를 들으니 내면의 깊은 곳에서 은은하게 전해지는 어떤 영혼의 울림, 떨림, 이런 게 느껴졌어요.

“그게 제가 제일 신경 쓰는 포인트이기도 해요. 소리를 낼 때면 누군가한테 어떻게 각인이 되는 게 의미있을까? 항상 생각해요. 따뜻한 소리, 그러니까 아주 잠시 듣더라도 어떤 감동의 울림을 주는 소리를 내고 싶어요.”

그간 수많은 연주를 해 오신 만큼, ‘최애’ 연주곡도 있겠죠?

“아, 이거 진짜 어려운 질문이에요. 가장 좋아하는 곡은 사실 ‘제가 지금 연주하는 바로 그 곡’이에요. 그래서 연주할 때마다 최애가 바뀌어요. 그런데 만약, 앞으로 평생 죽을 때까지 딱 한 가지만 연주하라고 한다면, 바흐의 ‘첼로 솔로를 위한 무반주 모음곡’을 선택하고 싶어요. 바흐는 평생 총 여섯 개의 모음곡을 썼는데, 그중에서도 이 작품은 첼리스트들에게 바이블 같은 음악이에요. 그래서 파고파고 또 파도 새로운 게 또 나오고요.”

2년 전에 첫 솔로가 나왔는데, 팬들을 위한 추가적인 앨범 계획이 있으신가요?

“아 추가로..., 머릿속에 있기는 한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요. 다만 추가 앨범을 낸다면 제가 방금 추천해드린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19번’을 꼭 담아보고 싶어요. 아직까지 솔로 음반을 사람들이 찾아주시고, 주위 분들이 간혹 라디오를 듣다가도 ‘어, 이거 네가 연주한 것 같은데’라며 반겨주실 때가 있어요. 많은 분들이 제 연주를 좋아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연주가이십니다. 이정란님에게 가장 인상 깊은 공연이 있을까요?

“음.... 한때 연주를 그만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 힘든 시기가 찾아온 적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아마 태어나서 가장 힘든 일을 겪었을 때예요. 당시 제가 몸담은 트리오 실내악 그룹 ‘제이드’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열리는 국제 콩쿠르 ‘슈베르트와 모던 음악 2015’을 목표로 하고 있었어요. 운동선수들이 전지훈련하는 듯이 저희도 콩쿠르를 위해 치열하게 연습했는데요. 저는 너무나 낙담해서 출발하기로 한 날까지도 짐을 전혀 안 싸고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고맙게도 저희 멤버들이 저를 설득하고, 기어이 일으켜서 오스트리아로 데려갔어요. 결국 그 무대 위에 서서 연주를 하는데.... (잠시 목이 메이며) 슈베르트 음악이 참 슬퍼요. 너무 슬픈데, 그만큼 너무나 아름다워요. 뭔지 아세요?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것. 저의 힙겹고 슬픈 마음이 동해서 눈물까지 흘리며 몰입했어요. 지금도 음악적 감성이 필요할 때면 그때를 떠올려요.”

첼리스트는 슈베르트의 아름답고 슬픈 선율이 떠오르는듯,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슈베르트가 남긴 말이 떠오르네요. “가장 힘든 상황에서 쓰인 예술이 가장 큰 감동을 남긴다”고 했죠. 감동이 전해져서 결국 좋은 성적을 거두셨을 것 같아요.

“네. 다행스럽게도 저희 팀이 입상을 했어요. 아마도 슈베르트의 영혼이 저희를 위로한 것 같았어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소망이 있다면요?

“음악을 사랑하거나 잘 모르는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는 연주를 아주 오래도록 하고 싶어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요."

 

인터뷰어/글 성일권

사진 생동 스튜디오 @saengdong.studio

* 해당 기사는 나라 셀라의 협찬으로 편집ㆍ제작되는 와인 매거진 6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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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권 기자 sungilkwon@naver.com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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