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국제영화비평가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8월 26일 이명희 영화평론가(피프레시 전 회장)가 트란 안 홍 감독의 <프렌치 수프>(2023)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여섯 번째 줌 세미나에는 2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는 1994년 창립됐다.
이하는 이명희 영화평론가의 발제문
“향기와 소리와 색채가 서로 화답한다” “Les parfums, les couleurs et les sons se répondent.”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 Correspondances 에서)
보들레르의 이 유명한 시 구절이 가장 어울리는 영화를 꼽는다면 아마 <프렌치 수프>일 것입니다. 19세기말 두 요리사, 도댕과 외제니의 로맨틱한 사랑이야기인 <프렌치 수프>는 프랑스 미식에 바치는 찬사이며, 미각을 비롯한 오감을 섬세하게 강조하는 음향, 색채. 빛의 향연을 선사합니다. 영화대사와 소품, 의상, 배경의 연출(미장센)을 통한 충실한 고증과 함께 19세기 프랑스 미식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보기는 문화읽기가 됩니다.
1962년 베트남에서 출생하여 12세에 프랑스로 이주한 트란 안 훙(Trần Anh Hùng) 감독은 1993년 데뷔작 <그린파파야 향기(L’odeur la papaye verte)>나 1995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씨클로(Cyclo)>에서 감각의 예술적 효과를 발휘하는 연출력으로 이미 인정받았습니다.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그린파파야 향기>는 오스카 외국영화상 후보로 오른 첫 번째의 그리고 여전히 유일한 베트남영화입니다. 그리고 30년후 2023년 일곱 번째 장편으로 다시 깐느영화제에 돌아와 감독상을 수상한 <프렌치 수프>도 이번에는 프랑스영화를 대표하여 오스카 외국영화상 후보에 지명되기도 했습니다.(쥐스띤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를 제치고 <프렌치 수프>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로 선정되자 프랑스에서는 큰 논란이 일었다. <프렌치 수프>가 그만큼 ‘프랑스적’인 영화라는 의미도 있다.)
영화화된 감각
2010년 음식 테마로는 세계최초로 유네스코 무형문화자산으로 지정된 프랑스 미식(gastronomie)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넘어, 식자재를 고르고 요리하는 방식,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방식을 포함합니다. 특히 “요리의 향을 통한 후각, 테이블 장식과 요리 모양을 통한 시각, 시식을 통한 미각, 식기와 요리가 빚어내는 청각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라는 설명에서 보듯, 오감을 만족시키는 식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프랑스관광청에 등록된 프랑스의 미식의 내용을 보면, “프랑스 미식은 다음의 세부사항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신선하고 질 좋은 재료 구입, 현지 특산품 선호, 조화를 이루는 맛, 신중한 요리의 선택, 프랑스 지방의 다양한 재료; 요리와 와인의 조화; 테이블의 미학; 대화” “어떠한 경우에도 프랑스 미식은 음식과 분위기, 인간 중심적인 식사를 기반으로 한 전반적인 조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략...) 미식은 단순히 먹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테이블 매너 또한 매우 중요하다. 프랑스 미식은 요리의 향을 통한 후각, 테이블 장식과 요리 모양을 통한 시각, 시식을 통한 미각, 식기와 요리가 빚어내는 청각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출처: https://www.france.fr/fr/article/repas-gastronomique-francais/#du-choix-des-produits-a-la-degustation-4)
요리의 오감은 공감각적 힘을 발휘하여, 정신, 관념의 세계로 이어줍니다. ‘그린 파파야 냄새’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할 데뷔작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파파야의 풋내는 1950년대 베트남의 기억으로 순수하고 변함없는 가치의 세계를 결정화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와 마들렌 과자의 맛과 향기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현 듯 불러오듯이. ‘비자발적 기억’이라 프루스트 자신이 명명하고 ‘프루스트 효과’라 널리 알려진 현상입니다. 냄새, 맛 같은 감각이 뜻하지 않게 과거의 시간을 다시 살게 하는데, <프렌치 수프>에서도 외제니의 죽음후 슬픔과 실의에 빠져 두문불출하는 도댕이 그녀가 만들었던 아침식사의 냄새를 맡고 그녀가 부활한 듯 이름을 부르며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각은 물론, 후각, 시각,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는 정의가 더욱 돋보이는 영화 <프렌치 수프> 초반 약 30분, 즉 영화의 4분의 1은 한 끼 요리와 식사에 할애되는 긴 시퀀스입니다. 불빛이나 촛불, 창이나 문으로 스며드는 햇빛의 자연 채광 장면을 아름답게 배치하였고, 부드럽고 따뜻한 빛과 색채의 화면구성에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전기가 아직 쓰이지 않는 시절입니다.
식자재를 다듬고 자르는 소리,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조리도구가 내는 소리, 음식이 만들어지는 소리, 식재료가 달군 팬의 버터에 닿아 지글거리는 소리... 대사를 덮어버릴 정도로 음향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대사는 거의 없습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인물들은 부단하게 움직이며 놀라운 요리 퍼포먼스를 선사합니다.
이들의 동선과 배경의 다른 움직임을 끊지 않고 유연하게 따라가며 담는 카메라의 길게 찍기(롱테이크) 혹은 페이크 롱테이크 덕분에 요리를 예술로 거듭나게 하는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에 경탄하게 됩니다. 카메라도 움직이고 배우도 움직이는 난이도 높은 롱테이크 촬영이 역동적인 현실감을 강조합니다. 트란 안 훙 감독 연출의 특징입니다. 한편 배우들의 클로즈업 대신 조리도구, 요리하는 손과 음식의 잦은 클로즈업은 <프렌치 수프>의 서사에서 요리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보여줍니다. 연기를 내며 담아지는 음식은 식감과 냄새와 맛을 불러일으키는 착각을 줄 만큼 섬세한 시각적 작품과 같습니다.
이 긴 시퀀스는 영화에서는 점심부터 해가 지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되는 미식가들을 위한 식사에 해당합니다. 시퀀스가 보여주는 공감각적 연출은 다른 음식 영화들과 비교하면 더 두드러집니다. ‘food porn'이라 불리는 요즘 흔한 ‘먹방’ 장면들과 가장 극단적인 대조가 될 것입니다. <프렌치 수프>에서는 조리 장면과 요리에 관한 대화 장면은 많은 반면, ‘힘차게 먹는’ 장면을 생략하고, 미식영화답게 음식을 맛보는 장면만 보여줍니다.
단, 너무나 맛있게 먹는 듯 보이는 오르똘랑(ortolan, 멧새의 일종인 오르톨랑을 아르마냑 증류주에 담근 다음 오븐에 구운 요리인데 ‘너무 맛있어서 신이 모르게 몰래 먹었다’는 요리로 유명하다. 작은 새가 노래를 못하도록 어두운 상자에 가두고 기장을 먹여 살찌운 다음 증류주에 담그는 요리법이 잔인하고, 하도 잡아먹은 나머지 멸종위기에 속해 현재는 금지되어 있지만, 아직도 허가해 달라는 시위를 할 정도로 유명한 프랑스의 별미요리다) 시식 장면은 미식가들이 흰 천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먹기 때문에 관객은 볼 수 없습니다. 마치 종교 의식처럼 신기한 장면입니다. 그 음식은 하도 맛있어서 ‘신도 모르게’ 먹었다고 하는 음식이니까요.
음식영화, 미식 VS 식탐
대체로 음식영화는 음식과 행복을 연결합니다. 요리로 격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달콤쌉싸름한 초콜릿(Como Agua para Chocolate)>(감독 알폰소 아라우, 1992) 같은 영화도 있고, <바베트의 만찬(Babettes Gaestebud)>(감독 가브리엘 악셀, 1987)은 질시와 의심에 찬 마을사람들이 평생 처음 맛보는 프랑스 고급요리로 반목을 멈추고 행복과 신의 은총까지 느끼게 되는 미각의 초월적 힘을 보여줍니다. 19세기 후반 파리의 ‘카페 앙글레’에서 여성 셰프였다는 여주인공, 겸손하고 헌신적인 바베트에게, ‘요리의 예술가’라고 일컬어지는 외제니의 캐릭터가 겹쳐집니다.
맛과 감각을 음미하고 탐구하는 미식이 아니라 추한 식욕을 보여주는 정반대의 예도 영화에는 많습니다. 잉여와 굶주림 사이에서 음식은 일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건강을 보장하는 필수적인 물질이면서도 쾌락을 악덕의 일부로 보고 파괴적인 탐욕의 은유가 됩니다. 종교는 음식에 관해 규칙과 금지 사항을 강요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식탐의 전복적 은유를 통해 부르주아 계급의 탐욕을 비판하는 <그랑 부프(La grande bouffe)>(감독 마르코 페레리, 1973)는 가장 충격적인 예입니다. <톰 존스의 화려한 모험>(감독 토니 리차드슨, 1963)의 먹는 장면을 패러디한 듯 보이는 <가여운 것들>(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2023)이나, <슬픔의 삼각형>(감독 루벤 외스트룬트, 2022)의 장면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파멸적 식탐을 묘사합니다. 음식을 먹는 행위의 묘사는 성적인 비유와도 가깝습니다.
미식(gastronomie) 단어는 1801년에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하는데, 프랑스 요리의 세련화와 더불어 자유주의와 쾌락주의의 부상과 함께 요리를 즐김과 탐구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경향입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전담 요리사를 고용한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프랑스 고급요리(오뜨 뀌진 haute cuisine)가 질적으로 발전하는 한편,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식당이 증가하여 시민계급이 고급요리를 접하기 쉬워졌습니다. 레스토랑 가이드가 등장하고 요리책이 쏟아져 나왔으며, 프랑스요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미식의 황금기입니다. 사람들은 요리법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고, 미식저널과 미식비평이 활발했으며, 작가들은 미식문학을 꽃피웠습니다.
그러나 노동의 성차별적 분업으로 귀족계급이나 부르주아 계급 요리사들은 남성요리사였고, 중산층 이하나 노동시장은 여성요리사를 고용하였습니다. 부르주아 가정의 요리사들은 숙련된 장인 예술가임이 분명했지만, 여성요리사들은 서민 가정의 푹푹 끓이는 음식처럼 단순하고 전통적인 시골요리를 지키는 ‘부엌의 어머니’로 경시되기도 하고 옹호되기도 했습니다.
유라시아 왕자에게 대접하기로 계획되었다가 외제니의 죽음으로 도댕이 거듭 실패하는 가장 프랑스적인 음식 ‘뽀또푀(pot-au-feu)’가 바로 그런 요리입니다. <프렌치 수프>에서 외제니의 아버지는 이름난 요리사였지만, 정작 그녀는 가정을 지키던 어머니에게 요리를 배웠다는 대사가 당시 여성요리사의 현실을 증언하는 셈입니다. 교육이나 직업학교도 부재하여 어린 뽈린느는 개인 견습생으로 들어와 도댕과 외제니에게 배우고 요리의 경험을 쌓게 됩니다.
셰프(chef), 요리책, 음식의 이름
<프렌치 수프>에서는 조리장 두 명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프랑스 요리를 확립하고 당시 ‘셰프들의 왕이며 왕들의 셰프’ 라는 별명으로 칭해진 앙또냉 까렘 (Antonin Carême, 1783 - 1833)과 현대 레스토랑의 창시자인 에스코피에 (Auguste Escoffier, 1846 - 1935)입니다. 까렘은 처음으로 조리장 혹은 주방장을 가리키는 ‘셰프 chef’ 라는 명칭을 씁니다. ‘셰프’는 어원이 ‘머리’를 뜻하거나, ‘무리의 우두머리’를 가리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요리, 볼로방을 만든 요리사가 까렘이며 조리장 모자도 까렘이 만들었다는 것을 영화는 역사교과서처럼 설명합니다. ‘38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기업형 레스토랑을 준비하고 있는 에스코피에가 기대되는 미래의 요리사’라는 대사에서 영화의 배경이 1884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이 두 요리사는 요리책도 많이 출판하여 요리법을 알렸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엘리제궁의 요리사(Haute cuisine)>(감독 크리스티앙 뱅상, 2012)는 시각적 만족을 주는 데 멈춘 평작이지만, 프랑스 요리책의 특별한 위치를 알려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조리장 에두아르 니뇽(Édouard Nignon 1865-1934)의 『프랑스요리에 바치는 찬사 Éloges de la cuisine française』는 600개의 레시피가 실린 요리책인데, 위대한 사샤 기트리 Sacha Guitry 의 서문과 함께 1933년 출판됩니다.
사샤 기트리도 히치콕 감독처럼 식도락가였는지 ‘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진실한 사랑은 없다’고 했습니다. 영화역사상 100대 영화에 꼽힐 만큼, 오손 웰즈나 트뤼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샤 기트리 감독의 걸작 <사기꾼 이야기(Roman d’un tricheur)>(1936)에 음식이야기나 카페 레스토랑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관계입니다.
영화 <엘리제궁의 요리사>에서 프랑수아 미떼랑 대통령은 사샤 기트리의 서문이 실린 바로 이 요리책을 즐겨 읽습니다. 영화감독, 극작가, 연극연출가, 배우인 사샤 기트리(Sacha Guitry)가 요리책의 서문을 썼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프랑스 대통령 역을 실제 프랑스학술원 (아카데미 프랑세스)의 수장이며 작가이자 학자였던 장 도르메송이 연기했습니다.
외교와 법과 정치 전문가인 대통령은 지극히 프랑스적인 음식을 사랑하는 미식가이며, 레시피 묘사, '아름다운 오로르의 베개' 같은 음식 이름의 문학적 가치에 감탄하는 독서가로 소개됩니다.(“'엘리제궁의 요리사' 눈이 즐겁고 행복한 맛의 향연”, 2015.3.18. 노컷뉴스에 실린 필자의 리뷰 링크: https://www.nocutnews.co.kr/news/4384354)
<프렌치 수프>도 요리의 문학적이고 독특한 이름(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기호로서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분석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과 발명과정에 주목합니다. 문자 그대로 ‘바람에 날기’란 뜻의 ‘볼로방(vol-au-vent: 가벼운 퍼프 페이스트리의 가운데를 파내어서 고기, 해산물, 또는 야채 등을 소스와 함께 채운 후 뚜껑을 덮은 요리)’을 까렘이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 불타는 아이스크림 디저트인 ‘노르웨이 오믈렛’(오믈렛뜨 노르베지엔, omelette norvégienne: 스펀지케이크 시트에 아이스크림을 얹고 머랭으로 덮어 오븐에 살짝 구운 디저트. 오믈렛도 아니고 노르웨이와도 관계없는 이 아이스크림 디저트는 1867년 프랑스 요리사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영화에 설명된다. 당시 노르웨이 이름이 유럽 문화에 나타나는 현상이 흥미로우며, 19세기말 ‘노르웨이 숲’은 하이네나 보들레르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시적인 고장이다)이 어떤 과학적인 발명품인지 미식가들의 대화에서 설명됩니다.
19세기 프랑스의 미식문학
브리야 사바랭의 책에 영향을 받아 알렉상드르 뒤마는 『요리대사전』(1873년 사후출판)을 쓰기도 했습니다. 미식의 유행과 브리야 사바랭의 천재적인 문학성의 영향인 듯,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끄도 당시 섭식의 풍속도를 소설에 많이 그려냅니다. 당시 많은 소설가들이 미식가들의 화법을 차용했을 정도로 19세기에 프랑스 미식은 문학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맛있는 음식의 발견은 새로운 별의 발견보다 인류에 더 유익하다.” <프렌치 수프>에서 도댕이 인용하는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 법관이었으며 미식가, 미식문학 작가.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해다오. 그럼 나는 그대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Dis-moi ce que tu manges : je te dirai ce que tu es.”라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의 아주 맛좋은 치즈에 그의 이름을 붙여 헌정한 ‘브리야 사바랭 치즈’가 있다)의 말입니다.
대표적인 미식문학 작가인 브리야 사바랭이 쓴 『미식예찬』(원제는 『맛의 생리학 La Physiologie du goût』, 1825)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발자끄는 자신의 서문과 함께 브리야 사바랭의 책 『맛의 생리학 La Physiologie du goût』을 1838년 출판하여 대성공을 거두기도 한 출판인쇄업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합리적인 지식’이라 부른 ‘미식(gastronomie)’이 내포하는 탐구정신은 비유적으로도 사용됩니다. 발자끄는 ‘산책(flanerie)은 과학이며’ ‘눈을 위한 미식’(‘gastronomie de l'oeil')이라 표현했습니다.
아직도 프랑스 미식의 경전이라 알려진 브리야 사바랭의 책과 함께 미식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마르셀 루프(Marcel Rouff)의 소설 『식도락가 도댕 부팡의 삶과 열정 La vie et la passion de Dodin Bouffant gourmet』 (1924)이 영화 <프렌치 수프>의 원작입니다. 영화의 원제는 <도댕 부팡의 열정 La Passion de Dodin Bouffant>으로 원작과는 다르게 각색되었다고 합니다. 영어제목은 <Taste of Things>, 독어제목은 <Geliebte Köchin>입니다. ‘사랑받는 요리사’입니다.
제목만 보자면, 도댕 부팡의 이름에서 ‘잘 먹는 자 bouffant’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캐릭터입니다. ‘부팡 bouffant’이란 단어는 불룩하게 입에 음식을 가득 넣은 모양을 연상케 합니다. 원작 제목에서 ‘구르메 gourmet’는 미식가, 식도락가, 술과 맛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식품에 관련된 상표나 상호에서 ‘고메’라는 명칭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이 단어에서 왔습니다.
로맨틱한 사랑이야기의 틈 : 언어와 공간
도댕과 외제니, 두 인물의 공통된 열정인 요리가 영화의 중심이면서도 그들의 로맨틱한 사랑이 영화의 서사를 구성합니다. 도댕(Dodin)은 ‘요리예술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울 정도로 국제적으로 이름난 요리사이며, 시골 성에서 살고 있는 부유층 미식가입니다. 요리예술가로 일컬어지는 외제니(Eugénie)는 같은 건물에 거주하며 일상을 함께 하는 연인입니다. 영화의 전반부의 무게중심은 도댕보다는 외제니에 쏠려있습니다. 요리를 연구하고 읽고 쓰는 도댕의 옆에서 외제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마법사입니다.
말없이 손발이 맞고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생각에 동조하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장면은 극히 아름답게 촬영되었습니다. 일상과 일을 함께 하는 조화롭고 이상적인 동반자의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예술가로 인정받을지라도 외제니는 도댕에게 고용된 요리사입니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이면서도 청혼을 거부하고 독립적인 외제니의 캐릭터에서 전통적인 여성, 현대적인 여성, 두 여성의 면모가 보이면서, 도댕과 외제니 두 인물의 모호한 틈이 엿보입니다.
언어로 본 관계
영원한 연인인 듯 서로 열정적인 두 주인공이 언어관계에서는 지나치게 예의바릅니다. 보조요리사 비올레뜨와 견습생인 어린 뽈린은 외제니와 서로 반말을 씁니다. 이는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비올레뜨와 뽈린은 도댕에게 존댓말을 쓰고 도댕은 이들에게 반말을 씁니다. 계급관계입니다. 도댕과 미식가 친구들은 존댓말을 씁니다. 존중관계지만 거리감이 있습니다. 외제니와 도댕은 프랑스어 관습으로 볼 때 서로 반말을 쓰는 게 더 자연스러운 내밀한 관계이지만, 존댓말을 사용함으로써 두 인물 사이에 어떤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제니가 예술가로 칭송받는 요리사라서 존경 혹은 예의바른 관계로서의 거리감일까요? 존중하는 관계의 아름다움이 보이지만 고답적인 느낌도 피할 수 없습니다.
공간으로 본 관계
일견 평등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영화에서 이들의 사회적인 계층 차이를 깨닫게 하는 것은 공간입니다. 비올레뜨와 외제니의 침실 위치를 보면 다락방처럼 지붕과 가까운 층의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녀의 방(chambre de bonne)’이라 불리는, 같은 건물이지만 하인들이 주인과 같은 공간에서 거주하지 않고 분리된 공간에 거주하도록 조성된 방으로, 본계단이 아니라 별도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용된 하인과 주인을 계층적으로 분리하는 주거형태는 프랑스에서는 산업혁명 이후에 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계급적 공간은 문화에 따라 다르게 영화에 표현됩니다. 거주공간은 근대건축과 빈부격차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빈부격차의 공간은 지하 혹은 반지하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조셉 로지 감독의 <하인>에서 하인은 2층에, 주인은 1층에 거주합니다. 두 영화 모두 공교롭게도 냄새 혹은 향기로 사회계층의 차이를 표현하는데 이것도 문화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인>에서는 하인이 누리면 안되는 고급향수 냄새가 나서 주인을 분노케 하고, <기생충>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부유한 주인공이 싫어합니다. 계급이 더 낮은 계층이 더 높은 곳에 거주하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힘들게 계단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프렌치 수프>에서도 외제니는 기다림의 순간을 계단으로 표현합니다. 도댕이 별도의 서비스 계단을 올라 외제니의 방으로 가는 데서 그 두 사람의 사회적 계층이 다름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외제니는 장차 남편의 방인 더 안락하고 고급스러운 도댕의 침실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소박한 침실을 고집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존중과 독립의 관계인 이들에게 부엌은 활기차고 따뜻한 곳, 권력관계나 계층적 관계가 부재하는 이상적인 공간입니다. 도댕과 외제니가 함께 식사를 하고 요리를 하고 대화하는 곳입니다. <게임의 규칙>(1939, 장 르누아르 감독)의 부엌과 <프렌치 수프>의 부엌은 대조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도댕과 그의 미식가 친구들이 주인의 식당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 외제니와 뽈린은 부엌에서 식사를 하는, 즉 고용된 요리사들의 성차별적 관습을 보여줍니다. 외제니는 함께 식사하자는 미식가들에게 자신은 ‘음식을 통해 대화한다’고 말할 때 요리사의 관습적 위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병이 난 외제니는 드디어 주인의 공간에서 도댕에게 음식 대접을 받습니다. 도댕은 요리의 마법사가 되고 외제니는 미식가처럼 식사합니다. 도댕은 요리로 구애합니다. 모양이 성적인 비유인 서양배 디저트 요리로 청혼하고(꽃과 반지로 장식된 푸아르 포셰(poire pochée, 서양배의 껍질을 벗겨 와인에 졸여 만든 디저트)의 장면), 이어지는 여주인공 누드의 뒷모습이 상당히 선정적인 매치 컷인데 보는 이에 따라 이 아름다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름답지 못한 편집이라고 평가할수도 있겠습니다.
미식, 원숙한 사랑과 인생의 은유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표현하며 부엌을 한바퀴 패닝한 카메라가 영원한 시공간의 장소인 기억속에 위치한 듯 두 인물의 대화로 돌아와 이들의 관계를 정의합니다. 자연의 순환이 미식을 위해 향유되듯이, 사랑과 인생을 사계절의 성실한 순환에 비유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외제니는 죽어서 덧없지만 기억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사랑처럼 애잔한 여운을 남깁니다.
두 인물의 대화가 답이 모호한 변증법적 질문이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은 더 여운을 남깁니다. 외제니에 대한 도댕의 한결같은 성실함,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외제니는 질문합니다. 요리사로서 언제나 함께 했지만, 소유되지 않음으로써 욕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외제니와 결혼이 불가능했던 도댕은 행복했을까요, 불행했을까요?
영화를 보기에는 의미없는 질문이지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데 행복이 있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에 관한 철학을 도댕이 말하기 때문에 복잡한 질문입니다. 도댕에게 외제니는 요리사였을까 아내였을까 질문에 요리사라고 대답하는 도댕은 행복을 고백한 것 같습니다. 역시 행복을 고백하듯 감사하다는 외제니의 대사와 함께 '타이스의 명상곡'(쥘 마스네의 오페라 <타이스> 2막)이 영화를 끝냅니다. 영화에서 유일한 음악입니다.
그리고 바로 나오는 헌정 자막 ‘옌 케 에게’. 옌 케는 감독의 첫 영화부터 함께 해 온 배우이며 아내입니다. 일과 사랑을 함께 한 아내에게 트란 안 훙 감독의 헌정으로 영화는 자전적 요소의 반영처럼 보입니다. 옌 케는 <프렌치 수프>를 위해 디자인, 의상을 함께 했습니다.
‘디저트부터 시작하는 만찬’이 될 수 있는 결혼이나, 소유함으로써 욕망이 사라지는 관계를 거부하고 독립을 유지하는 현대적인 여성 외제니와 도댕의 관계가 그럼에도 고답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권력관계의 긴장도 감정적 갈등도 부재하는 두 인물의 사랑, 평온하고 절제되고 한결같은 이상적인 사랑이 영화적이 아니라 대사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열정은 언제나 요리를 중심으로 표현됨으로써, 이 로맨틱 드라마는 사랑보다 요리에 더 많은 자리를 내주고 맙니다.
성숙한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경험과 연륜이 필요한 미식가의 요리예술을 통해 강조합니다. 일과 사랑이 조화로운 일상을 함께 하며 결혼이 필요없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두 인물의 평온한 행복을 이상화함으로써 권력관계는 무의미해집니다. 사실주의의 결핍으로 거북함이 희미하게 느껴지지만, <프렌치 수프>가 추구하는 이상주의는 사실주의의 필요성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미식가, 비평가의 은유
“먹고 소화시키지 못하거나 마시고 취하는 자들은 마실 줄도 먹을 줄도 모르는 자들이다(Ceux qui s'indigèrent ou qui s'enivrent ne savent ni boire ni manger).”
브리야 사바랭의 이 문장은 미식과 음식먹기의 차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브리야 사바랭의 책은 현대에 이르러 1975년 롤랑 바르트의 해석을 첨부하여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책읽기와 쓰기처럼 비평은 욕망과 쾌락을 동반한 미식과 유사한 행위라는 걸 기호학자이며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가 확신하기 때문 아닐까요. 미식과 비평의 유사성은 롤랑 바르트의 책 『기호의 제국 L'empire des signes』 (1970)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맛과 지식의 기쁨, 그리고 ‘음식수사학’은 <프렌치 수프>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동원된 모든 감각’의 공감각적 경험은 식탁에 모인 미식가들의 문학적 대사로 표현됩니다. 그들은 먹는 자들이 아니라 쾌락과 지식을 옹호하는 비평가들입니다. 영화의 인물들은 맛을 보고 감탄하고 행복을 느끼고 표현합니다.
포도주맛을 보고 그들은 맛이 좋다고 하는 대신 “완벽한 표현 expression parfaite"이라 말합니다. 음식을 맛보며 “대지의 고결함을 노래하는 땅과 바다의 아름다운 만남”이라 평하기도 합니다. 미식가가 좋아하지 않는 과한 식사는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먹는다는 일은 시련, 인내를 요하는 고통이며 과잉입니다. 그런 음식의 순서는 ‘무질서한 행진’이라 평해집니다.
도댕은 ‘뽀또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포타쥬는 복잡해요. 옛스러운 부분이 있죠. 독특한 풍미를 지니되 풍미 각각의 부분이 자기만의 자연적인 맛을 간직하고 있어요. 그 전체적인 외양은 소나타의 진행과 같아요. 힘과 조화가 한 데 어우러진 가운데 각각의 테마가 고유의 생명과 풍미를 가져요(Ce potage, très complexe est d’un charme parfois un peu vieillot. Il doit avoir un goût unique, mais chaque partie de ce goût conserve son goût personnel et naturel. Son allure générale doit rappeler le développement d’une sonate où chaque thème garde sa vie et sa saveur propres dans la puissance et l’harmonie fondues de l’ensemble).”
도댕이 외제니를 이어 고용할 요리사에게 준 레시피는 이것 뿐입니다만, 예술성을 부여하는 공감각적 표현입니다.
<프렌치 수프>에서 요리사는 예술적 창조자이며, 미식가는 먹는 자가 아니라, 음미하고 탐구하는 자입니다. <그린파파야 향기>에서 음악과 음식, <씨클로>에서 시와 음악을 강조한 트란 안 훙 감독의 예술과 감각에 대한 애착을 보았는데, <프렌치 수프>도 서사를 넘어 예술적 은유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예술가(요리사)는 창조하고 비평가(미식가)는 쌓은 식견과 경험을 바탕으로 ‘즐겁게’ 가치를 발견하며 기쁨을 느낍니다. 영화감독과 평론가의 관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결론 : 아카데미즘과 낭만의 불균형이 교육적 목적성을 부각시킨다.
골동품처럼 고증되어 갖추어진 부엌, 조리도구, 집기와 더불어 <프렌치 수프>는 프랑스 요리에 관한 우리의 문화적 호기심을 충족시키지만, 요리역사의 집착적 설명과 진기한 요리의 나열, 미식으로만 연결된 사랑의 대사 등은 학교에서 반복적인 교육을 받는 순간들과도 같습니다. 요리예술에 대한 절제되지 않은 열정으로 영화가 이루어진 반면, 로맨스의 서사는 절제되어 있습니다. 아카데미즘과 낭만의 불균형은 교육적 목적성마저 엿보게 합니다. 아마 프랑스인에게는 역사시간의 복습이고, 외국인에게는 흥미있는 문화교육의 영화같습니다.
오래되고 깊은 프랑스(la France profonde, la vieille France), 프랑스 미식에 관한 영화로는 빼어난 영화로 남을 것입니다. 쾌락만 남기고 소모되는 음식은 아름답고 맛있어도 덧없는 물질입니다. 인간의 순간적인 삶을 뛰어넘어 영원의 가치를 부여하는 예술이란 칭호를 그동안 요리에 붙이기 어려웠던 이유겠지만, <프렌치 수프>는 요리가 예술임을 감독의 미학적인 연출로 증명해 보이는 데 성공합니다.
이명희 영화평론가는,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12대 회장이다. 성균관대학교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에서 프랑스어문학, 과학기술사, 영화, 비교문화를 공부했다. 국내, 국제 매체에 기고했으며, 성균관대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부산영화제에서 1997년부터 2019년까지 모더레이터와 통역으로 활동했다. 깐느영화제 (1998), 안시애니메이션영화제(2000), 베를린영화제(2001), 부산영화제(2009)에서 피프레시(FIPRESCI 국제영화비평가연맹), 베를린영화제 넷팩(1999)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스위스 프리부르 영화제 심사위원장(1997)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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