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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미술 이야기] '은유의 숲' 너머의 이데아를 향한 불일불이한 열망
[안치용의 미술 이야기] '은유의 숲' 너머의 이데아를 향한 불일불이한 열망
  • 안치용
  • 승인 2024.01.04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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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화가

메타포(metaphor)는 대개 은유로 번역하지만 파고들면 간단한 단어가 아니다. 수사법을 넘어 문학이나 예술의 표현방식을 뜻하는가 하면 관점에 따라서는 예술 그 자체일 수 있다. 메타포에 관한 설명을 보면 기법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 그리스어 metapherein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metapherein이라는 어원에 근거해 메타포가 전이(轉移)의 뜻 또한 함축한다고 전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metapherein‘meta’‘pherein’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meta’는 저 너머 혹은 그 이상을 뜻하는 접두어로 형이상학(metaphysics)의 용례가 대표적이다. 페이스북이 바꾼 회사명이 메타이기도 하다. ‘pherein’은 가져오다, 나르다 등의 뜻이며 고대 그리스어 φέρω(페로)에서 유래했다. 메타포를 수평적으로 이해하면 무엇에 대한 해석 또는 예술적 형상화가 되고 수직적으로 이해하면 수평적 해석을 포함한 가운데 그 이상의 세계를 향한 염원을 내포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은유의 숲 –망각', 61x91mm, OIl on Canvas, 2020

 

김은정 화가의 작품 <은유의 숲망각>은 아예 메타포를 전면에 내세운다. 메타포는 AB라는 두 가지 개념이나 이동이 가능하다고 믿는 두 개 세계를 전제한다. ‘은유의 숲은 논리상 =X’이거나 X’이다. ‘=X’는 일반적 은유의 형식이고 X’은 숲을 통해 무엇으로 이전하여 또는 전개하여 새로운 의미를 발굴한다. 후자에서 숲을 통한다는 것은 상승과 초월의 메타를 초대한다는 뜻이다. 전자의 숲이 주어에 해당한다면 후자의 숲은 괄호 쳐진 주어, 혹은 주체의 지위를 상실한 촉매로 전락한다. 버림으로써 얻는 구조이다.

<은유의 숲-망각>에서 숲은 다른 <은유의 숲> 그림들처럼 캔버스 전체를 지배한다. 숲은 상상할 수 있는 녹색 계열이나 어둡고 머줍다. 자세히 보면 원근감 속에 나무의 개별 형태가 긴가민가 드러나지만, 하나하나가 뚜렷하지 않고 전체로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하나의 생물 같은 느낌이다. 숲이 물결이나 흐름의 모양과 냄새를 방사한다. 얼핏 바다와 그 안의 해조류인가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캔버스 우하를 비롯해 그림의 주변에 해당하는 곳에 구름인 듯 노이즈인 듯 희멀건 흔적이 부유한다. 반면 숲의 가운데는 둔중하게 깊어지다가 숲과 구별되는 또 다른 형상 또는 그림자로 구체화하는데, 확신할 수 없으나 사람의 실루엣이다. 숲과 실루엣은 하나의 상(, phase) 안에서 불일불이(不一不異)한다. 숲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숲이 된다. 네스호에 산다고 알려진 네시처럼 실루엣은 실재와 부재를 넘나들면서 특정한 각인을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상전이(相轉移) 비스름한 것까지 모색한다. 그러나 상의 완전한 전이에는 이르지 못한다. 불일하지만 더불어 불이하기 때문이다.

망각(忘却)이 기억의 무화(無化)는 아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대체로 무화에는 이르지 못한다. 잊는 것은 없애는 것과 다르다. 없는 것으로 간주하다가 잊는 것의 정확한 의미다. 숲을 덮은 그림자처럼 기억을 덮는 게 망각이다. 캔버스 상의 숲과 실루엣은 기억과 망각의 본질을 흥미롭게 표현한다. 무화(無化)는 무화(霧化)로 우회하며 타협한다.

망각(忘却)의 각()은 물리치다, 피하다는 뜻이다. 어떤 기억의 흔적을 책상 서랍 깊은 곳이나 창고 같은 곳에 넣어두고 회피하는 행태를 연상할 수 있다. 태우거나 버리지 않고 묻어두게 되면 상전이(의 모색)에도 불구하고 망각에 기억의 실루엣이 잔존한다. 그런 잔존이 그림에 확연하다.

화가의 붓은 기억이란 산의 등고선을 망설이듯 또는 어쩌지 못해 오르내리다가 마침내 산 뒤편의 망실까지 화폭이란 하나의 상() 안에서 불일불이의 지평을 만들어낸다. 기억의 앞과 뒤가, 그럼으로써 망각의 앞과 뒤 또한 한 시선에 포착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만들어냄이 메타포이다.

이제 그림에 새로운 차원이 부가된다. 이물감을 자아내는 괘종시계가 실루엣과 겹쳐진다. 숲과는 다른 색감ㆍ질감인 괘종시계가 숲에 포함되는지, 숲 위에 떠 있는지 모호하다. 적어도 숲과 실루엣이 불일불이한 반면 괘종시계와 숲/실루엣은 불일(不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괘종시계가 이 그림의 공식적 술어이다. 시곗바늘이 빠진, 시침ㆍ분침ㆍ초침이 모두 사라진 시계판. 그곳에 숫자가 선명하되 특정한 숫자들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기억은 시공으로 완성되는데, 시계를 드러내어 시간의 개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지만 기억을 완성할 구체적 시간은 빠진 채여서 기억이 망각으로 예인된다.

괘종시계의 창백한 니힐리즘은 서랍을 투기함으로써, 서랍이 투기됨으로써, 망각의 절대온도를 짐작게 하고, 서랍이 빠진 빈 공간에서 봉인된 기억이 태초의 별들인 양 반짝거린다. 화폭 하단의 미확인비행물체(UFO)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려는지, UFO가 아니라 웜홀인지 아니면 그저 돌인지, 홀로 초연하여 괘종시계의 니힐리즘을 힐난한다.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억 년 비정의 함묵(緘默)/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유치환) 그저 숲 위를 날아다니는 바위가 시든 망각을 재차 힐난한다.

이 그림의 핵심은 숲에 어린 어떤 존재의 그림자이다. 그림자가 있으면 본체가 있고, 본체에 비추어 그림자를 있게 한 빛이 있다. 이데아로도 불린 이 본체는 캔버스의 그림자를 통해서만 인식된다. 수용자는 그림을 보며 이제 캔버스 뒤편에서 앞쪽을 투시하여야 한다. 망각은 기억의 이데아를 향한 열망이었음이 밝혀지지만, 철학이 말하였듯 그 열망은 절대 실현되지 않는다. 실현되지 않을 열망을 열망하고, 그 열망과 열망의 좌초를 형상화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다. 김 작가는 이 본질에 탐닉한다.

'은유의 숲–스완', 73x91mm, Oil & Acrylic on Canvas, 2019

 

다른 그림 <은유의 숲스완>에서 파스텔톤 한가운데 숨겨진 스완은 은닉으로 인해 더 뚜렷하다. 가깝고 동시에 먼 오브제의 용융이 캔버스에 친화의 감성을 산출한다. 숲과 스완은 마찬가지로 불일불이이다. 스완 아래에 보일 듯 말 듯 한 호수가 숲과 공존한다. 그 공존은 은폐된다. 숲이 스완이 떠나온 곳인지 스완이 떠나갈 곳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숲과 스완의 연관은 우호적으로 그려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숲에 죽은 나무가 제법 있다. 죽었지만 온전한 생선 가시처럼 비장한 나무의 기억이 그 부재의 현존으로 숲을 더 포근하게 느껴지게 한다.

<은유의 숲스완>은 간명한 메타포를 선택했다. 친숙한 생명인 스완과 숲이 문학적 은유로 역동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캔버스에서 정적인 회화적 은유로 다른 차원의 서정과 의미를 전한다. 흐리지만 사실적인 스완과 아우라에 집중한 숲 사이의 비대칭성이 조화롭다. 메타포의 힘일까.

 

은유의 숲을 외국어로 표기할 때 김 작가는 ‘metaphorêt’라는 자신의 조어를 쓴다. ‘metaphorêt’‘metaphor+forêt’forêt는 프랑스어로 숲이란 뜻이다. 김 작가의 은유의 숲연작은 숲의 메타포이기도 하고 메타포하는 숲이기도 하다.

비슷한 구도를 고집하면서 숲의 메타포메타포하는 숲을 붓 끝에 표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상상력과 집중력이 동시에 필요하며, 동시에 삶의 성찰이 익숙한 문법을 파괴하는 발칙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숲 너머에 어떤 예술적 성취가 가능할지, 가지 않은 길을 가는 화가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2
‘은유의 숲–유니콘’, 91x117mm, Oil & Oil pastel on Canvas, 2018
4
‘은유의 숲–콘솔’, 73x91mm, Oil on Canvas, 2019
5
‘은유의 숲–달’, 65x91mm, Oil on Canvas, 2017
‘은유의 숲-은빛 소나타’, 73x91mm, Oil on Canvas, 2018
‘은유의 숲–토끼’, 65x91mm, Oil on Canvas, 2018
8
‘은유의 숲–오래오래’, 45x60mm, Oil on Canvas, 2017

 

·안치용

 

인문학자 겸 평론가로 영화·미술·문학·정치·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크리티크M 발행인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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