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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화려한 도시풍경의 틈새, 균열로부터의 자각, 자각으로서의 생성 ― 우리네 한국사회의 <이웃사람>론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화려한 도시풍경의 틈새, 균열로부터의 자각, 자각으로서의 생성 ― 우리네 한국사회의 <이웃사람>론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1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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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22일 개봉]

 

“환영 바깥의 세계, 또 반(半)도시적인 유보상태 공간”

그림자 없는 실체는 없다. 외견상 준수한 몸피 그리고 매력적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을 품은 아름드리나무라 해도, 마치 보잘 것 없는 형애마냥 지면 아래 늘비하게 얽힌 흉한 뿌리들과 한 몸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그 근사한 후광이란 발 디딘 어둠으로부터 끈덕지게 자양분을 길어 올린 끝에 마침내 피워낸 산물이라고 할 테다. 허나, 만일 시야에 포착된 도취적인 아름다움 속에 마냥 매몰돼 있다면 부단히 흘린 눈물과 땀방울 따위의 흔적들까지 발견해내기란 아무래도 힘겨운 일이 될 터이다. 그렇대도 실제 나무가 살아가는 방식과 원리를 깨치기 위해서라면 그저 포동하게 물이 오른 살점에만 주목해선 안 된다. 외려 가리어진 비가시적 측면들마저도 능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만 하겠다.

유사하게도 도시적인 삶의 실상은 눈부신 화려함과 감각을 마비시키는 환영적인 이미지들 속에선 온전히 파악되기 어렵다. 실제현실은 마약류의 경험이 공급해주는 지독한 착란이 어느 정도 제거된 현장 속에서야 한결 정직하게 이해될 수가 있다. 이미 도시의 문법에 동화돼 잔뜩 무뎌져버린 지각으론 그것이 존재자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조차 헤아리는 게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변두리’라는 말의 대상이 꽤나 특별한 성격을 갖는단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낼 수 있다. 그것은 본디 예고된 도시화의 물결이 잠시잠간 머물다 스쳐 빗겨 가버린 소외된 주변부 영역이자, 그럼에도 여전히 중심에 편입되고자 끈덕지게 내달리는 도상에 놓인, 이른바 반(半)도시적인 유보상태 공간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한편으론 도시에 귀속돼 있으면서도 ‘적어도 아직까진’ 그 휘하에 온전하게 잠식되거나 장악되지 못한 이 외각지대는, 이를테면 환영의 경계바깥에 위치한 공간이다. 그렇기에 이 변두리 속에서라면 미처 가려지지 않은 맨눈을 통해 도시적 삶의 이면을 비교적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가능해진다. 간단히 말해서 그 속에 아울러 엮인 인간들의 숫자만큼이나 온갖 종류의 이질적인 욕망들이, 때로는 비틀어진 욕구들이 부대끼며 들끓는 불온한 모습을 가감 없이 비추어볼 수 있게 된단 뜻이다.

 

“영화, 그리고 신도시라는 기묘한 풍경”

음습한 주변부 영역과 화려한 무대공간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불협화의 동거야말로 곧 신도시의 존재방식이다. 특별히 단 시간 내 급격한 변화를 겪어온 사회일수록 ―신도시라는― 이 기묘한 도시풍경을 도처에서 현격하게 현상해낸다. 우리네 한국사회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영화 <이웃사람>(2012)은 2010년대 초엽의 분당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물론, 개중에서도 윗점이 찍히는 장소는 변두리 공간이다. 전면(前面)에 가해진 화사하고 두터운 채색만으론 차마 그 그늘진 부분까지 다 가릴 수 없을 만큼 후미지고 어두운 곳이 영화가 무대로 삼는 세계다.

 

[중심과 주변 곧 불협화의 리듬으로 구성된 신도시라는 세계]

보통 도시화의 주된 메커니즘은 모든 것들의 동질화로 설명 가능하다. 더 정확하게는 모든 질적인 것들의 수량화란 말을 사용해보는 것 역시 가능할 터이다. 환언하자면 눈이 시리도록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모든 생생한 차이들을 하나의 양식과 스타일 하에 환원하고 가지런히 포섭해버리려는 시도가 주류세계의 문법이 기동시키는 상징화의 전략인 셈이다. 그 빛은 제 손아귀에 들어오는 모든 걸 삼키는 역능을 갖는다. 소소한 반동들은 머잖아 소멸 당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힘이 온전히 미치지 않는 뒤안길에선 여전히 ‘지극히 인간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음직한 면면들이 고스란히 관찰되고 있다. 이를테면 이질적 욕망들 간의 경합, 타자와의 지속적인 길항과 갈등, 더 나아가 유무형의 여러 수준으로부터 빚어지는 부대낌과 충돌 등속의 현상들은, 본디 쉽사리 갈무리되고 상징화될 수 없는 존재론적 야성의 표현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도시화라는 가상의 관념으로 두껍게 덧칠해 그 존재를 홀연히 은폐해버린다 해도 결코 실체마저 사라질 순 없는 것 말이다. 영화는 바로 그런 뒤안길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간다. 그 밖의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텍스트의 주제의식을 지나치게 가볍고 편리하게 취급하려는 부주의한 시도들은 지양돼야만 하겠다. 가령 ‘서스펜스 스릴러의 기술과 원리들을 동원해 이웃에 대한 관념을 재성찰해보겠다는’ 말 정도로 영화의 문제의식을 협소화해버리기란 좀 어렵단 뜻이다. 진실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혹 그 골자만을 먼저 간단히 일러둘진대 ―아무렴 이웃이라는 표면적인 소재를 제재로 그려내는 것 따위가 아니라― 한 차원 더 깊은 수준의 인간학적 탐문을 요청하고 있는 영화라는 점 정도는 확실하게 기억해두는 편이 좋을 성싶다.

그러면 제목에도 반영된 이웃이란 과연 뭘까. 분당 신도시의 어느 주변부 공간(강산맨션)이라는 영화의 제한된 장소적 특성에 부합하도록 인간형식의 유형을 적절하게 취한 것뿐이라고 말해본다면 아마도 적절한 해명이 될 테다. 물론 겉으로 현상된 영역의 이면을 들여다본다면 실상 이웃의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가 있겠지만 말이다. 더불어 썩 괜찮은 스릴러 영화라는 손쉬운 장르 진단이 다분히 문제적이라는 사실 역시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텍스트 곳곳에서 장르적 구성 그 자체를 내파시키는 요인들을 ―거침없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외설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치 다분히 직접적으로 뱉어내고 있다는 지점을 고려해볼 때, 그런 건 좀처럼 받아들이기 까다로운 주장이 된다. 본고의 기술방향은 상술한 문제적 지점들을 세심히 되짚어보는 쪽이 될 것이다. 불투명한 껍질들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과정을 경유하는 동안에 무엇이라며 말을 걸어오는 영화의 목소리에 좀 더 분명히 다가설 수 있게 될 터이다.

 

“구성과 과잉, 산출되는 의미효과에 관하여”

텍스트 속에 이물감을 촉발시키는 이질적 작인들이 간여하고 있다고 해서 본디의 구성자체가 부실하단 말은 아니다. 때때로 상관관계가 성립하는 경우는 있겠으나 반드시 필연적 인과관계로 이어지진 않는다. 적어도 곧바로 등치시킬 순 없단 뜻이다. 되레 기본에 충실할 때에, 그 틀을 능가하는 요인들의 출몰과 개입이 보다 더 고차적인 수준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도록 보조해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텍스트 지형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재-매개하는 역능을 발휘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구태여 뒤로 걸음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 영화의 골격이 튼실한지를 검증하는 데에 깊이 천착해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낱낱의 부분들을 일일이 다 따지기에는 지면상의 한계도 있겠거니와,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한 분석으로부터 이야기를 출발하는 것이 영화의 문제의식에 가닿는 최적의 길을 제시한다고 말하기도 좀 어렵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논의의 퇴행을 불러오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국면들에서 장르적 구성에 균열이 일어나며 그것에서부터 독특한 의미효과들이 발생하게 되는지를 살펴보는 우회적인 접근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엔 충분하리라 본다. 따라서 관습들이 이지러지고 다시금 교직하는 자리로 나아가보고자 한다. 중앙집권적인 음성을 비집고 들려오는 각양 소음들이 속삭임, 구심력적인 운동을 지연시키고 느슨하게 만드는 원심력의 파문들이 빚어내는 자취를 감각적 인식 내지는 체험적 논리를 통해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는 자리들로 말이다. 보다 효과적인 논의를 위해 ‘장치 및 기법적인 측면’과 ‘인물형상화 방식’의 문제로 대별하여 살펴보는 편이 아무래도 적절한 접근이 될 성싶다.

 

“장치적인 일그러짐의 양상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논의해봄직한 요소가 하나 있다. 그건 마스터 쇼트에서부터 맺음부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출몰하면서 영화의 긴박감을 저해시키고 자연스러운 서사적 흐름에 장애를 일으키는 요소다. 요컨대, 까치의 존재 말이다. 한갓 짐승 따위가 진지한 당혹감을 환기하는 원인은 그 등장에서 쉬이 개연성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이야기의 중요한 변곡점에 들어설 때마다 출현의 근거를 정당화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의 돌연한 개입이 그간 애써 공을 들여 점점이 쌓아가던 긴장의 탑을 보란 듯 허물어지게 만든다. 다시 쌓으면 어느 순간 찾아와 이내 그것을 뒤흔들어버린다. 일견 장르 문법에 대한 배신이라 불릴만하다.

물론 후반부에 이르면 까치의 반복적인 등장이유가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건 까치가 ―블랙아웃의 방아쇠가 당겨지기까지― 나뭇가지들을 부단히 물어날아야 했던 이유일 뿐, 구태여 이 말 못할 짐승에게 카메라의 눈길이 끈덕지게 머물러야만 했던 당위를, 특별히 중요한 국면마다 계속 등장하면서 지속적으로 긴박감을 와해시키고 무너트리도록 허용해야만 했던 당위를 제공하진 않는다. 그 밖의 어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대도 결론은 같다.

 

[상황의 연결접속 단위마다 출몰해 긴장을 누그러트리는 까치]

다소 놀랍게도 도플갱어를 영화세계 속으로 호명해 들이는 일 역시 집중도를 저하시키는 효력을 발생시킨다. 확실히 그건 통념적으로 예견되는 기대효과와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이 장치가 사용되고 있는 독특한 영화적 방식 때문이라고 본다면 옳을 터이다. 대개 장막 뒤편에 은밀히 몸을 숨기고 있다가 한껏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며 등장함으로써 전체호흡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쁘게 만들어버리는 게 도플갱어의 일반적인 접근법이라고 하겠다.

반면에 본 영화 텍스트 속에서 도플갱어는 숨을 쉬듯 자연스런 환경 속에 배치된다. 본시 “친숙한 낯섦”이 기본적인 도플갱어의 메커니즘일진대, 이로 인해 낯섦의 요소가 대부분 거세돼버린 장치의 활용은 되레 텐션을 늦추고 서스펜스를 감쇄시키는 방식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 경우 설령 작중인물이 놀라게 된다고 한들 관객은 특별히 고조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를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을 구태여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흥분을 가라앉히는 일은 없다.

 

[일상적 삶의 무대 속에서 딸의 도플갱어를 조우하다]

아울러 난데없이 도입된 심령술적인 측면 역시도 문제적이다. 기본적으로 영화의 기획과 설정에서 구태여 이(異)세계의 존재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점이 고려되어야만 할 테다. 영화적 흐름의 견인자로 복무하는 건 한 명의 싸이코패스/소시오패스다. 다시 말해 그가 이끌어가는 영화의 세계는 죄의식을 동반한 기본적이고 자연스런 감정마저 메말라버린 너무나 비현실적인 세계다. 이처럼 지극히 건조한 세계 속에 판타지적인 요소들이 관계할 여지란 없다. 비현실성이 극도로 도드라지는 통에 다른 종류의 비현실성을 용인할 넉넉함이 부재한다고나 할까.

어떻게든 변호의 여지를 찾아본다면 기껏해야 죄책감의 투사 이미지로 치부해버리는 일 정도가 될 테다. 그들의 존재가능성을 순수 심리 차원의 문제로 단순하게 환원해버리려는 시도 말이다. 허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작중의 심령술적 존재들은 의식현상 내부의 착란에 불과하다는 가벼운 말 속에 포획해 가두어버리는 일이 좀체 불가능할 정도로, 꽤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들은 작중인물들의 정신과정에 매여 속박되지 않는다. 실체로서 자립하기라도 하듯 능히 인물들의 시야 바깥으로 뛰쳐나가 일정한 공간을 거닐며 소요하는 물리적 속성을 담보한다. 대화를 시도한다거나 더러는 작중인물들을 자극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신체접촉을 감행한다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사건진행에 개입하여 그 궤적을 비트는 일을 수행하기까지 한다. 마치 본격적인 심령물이나 공상영화 속에서처럼 말이다.

 

[직접적으로 물질세계에 간섭하는 심령술적인 존재]

이처럼 판타지적 인자들의 난입은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과 서스펜스로 그득한 영화적 흐름을 주도하고자 애쓰는 견인자로서의 문제적 인물에게 시선을 오롯이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건 마치 관객의 의식과정에 요철을 매설해두는 형국과 같다. 요철을 밟을 때마다 차체의 속력이 감쇄하는 것처럼, 의식의 여정이 지연될수록 영화의 리듬과 템포 역시 느슨해진다.

그러나 혹 그에게 시선을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해도 능사는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관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요컨대 거의 처음부터 이 견인자의 존재가 ‘노출된’ 상태라는 점 역시 장르문법을 훼방하는 강력한 부정의 작인이 된다. 이를 정당화를 위해서라면 적어도 어떤 종류의 반전이 요청되어야 할 터인데, 그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숨겨진 비밀을 풀이한다거나, 그의 행동에 예상치 못했던 당위를 부여해주는 특별한 이유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보아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예상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순조로운 항해는 마땅히 누려야 할 감정의 박동들을 앗아가 버린다. 확실히, 상술한 일련의 요소들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서스펜스/스릴러라는 장르구성의 법식을 이질화시킨다.

이로써 많은 것들이 힘을 잃는다. 오브제를 매개로 활용해 사건의 전개와 흐름에 입체감을 더한다든지(안경이나 시계 등속의 것들을 통해) 혹 그것들을 기억의 매체로 동원함으로써 선형적 시공간 개념의 왜곡과 지연 없이도 많은 정보를 전달하며 아울러 긴박감을 붙들어 매는(머리띠와 깨어진 유리 따윌 경유해서) 전략, 또 폭력의 찰나를 일부러 외화면 처리해 순간적인 상상력을 극대화한다거나, 사운드 몽타주를 활용해 감각적 인상을 고조하려는 전략 따위는 장르문법을 내부에서부터 파열시키는 장치들에 의해 상당부분 그 효력을 망실해버리게 된다. 이러한 의도적 지연은 아마도 균열 진 틈새에 매설됐음직한 의미에 대한 열망을 고조시킨다.

 

“기형적인 인상을 가진 존재들”

비단 장치적인 측면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의 독특한 인물형상화 역시 도식적인 장르구성의 기획 원리를 크게 벗어나고 있다. 보통의 경우였더라면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이(들)와 그 대척점에 존재하며 연대하는 자들 사이의 대립국면이 보다 명확하게 현상되었어야 할 테다. 마치 준거가 되는 실선을 기점으로 양편이 서로 간에 대비되는 데칼코마니 같이 말이다.

그러나 텍스트 속엔 다수 존재자들의 응집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단서조항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개개의 인물들은 지극히 개성적이고 주관적인 방식대로 운신하며 삶을 이행해 나아갈 따름이다. 차라리 저마다의 기호/취향을 따른다는 표현이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쉽게 말해 처음부터 그들을 하나로 묶어놓을 공통감각 같은 건 없다. 정의감이라든지 선악 관념과 같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운 말들은 그들에겐 처음부터 부재한다. 하물며 이웃이라는 추상적 어휘를 통해 이들을 군집으로 묶으려는 시도 같은 건 좀처럼 성립될 수 없을 터이다.

문제적 상황이 해소되어가는 과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러한 점은 조금 더 명확해진다. 그 어떤 인물도 통일된 목적의식 따위에 예속된 채 움직이진 않는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설령 같은 시각 같은 공간 속에 서 있다고 해도 그들의 속아지에 담긴 내용은 모두 다 다르다. 애당초 낱낱의 인물들이 움직이도록 추동하는 근본적인 원인부터가 서로 달랐다고 진술하는 편이 좀 더 옳을 것이다.

혁모가 승혁의 집을 급습한 건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그의 계획을 알고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 밖의 특별한 이유란 건 없다. 종록의 경우는 언제나 친딸처럼 자신을 환대해주었던 수연에 대한 부채의식이 그 기원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테다. 직장동료인 황씨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고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사실을 묻어버리려 했던 그에게서 달리 보편적 인류애와 같이 거창한 걸 찾아낼 순 없을 터이니 말이다. 반면 상윤의 시선을 승혁에게로 잡아 끈 동력은 감추어진 진실의 매듭을 어떻게든 풀어버리길 갈구하는 짙은 호기심이다. 제 이름을 버젓이 내걸고 미스터리 카페를 운영할 만큼의 왕성한 갈증이 아니었더라면, 애당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슬아슬한 살얼음판 위로 몸을 내던지게 되는 일 따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연을 무사히 구해낸 경희 역시 죽은 여선과 꼭 닮은 그녀에 대한 끌림이 없었더라면 구태여 위기를 무릅쓰려고 시도하진 않았을 터이다.

상술한 장치의 문제와 매한가지로, 분명 이러한 동기의 극단적 이질성 내지는 독특한 인물형상화 방식은 통상적인 장르의 원리 하에선 간단히 해명될 수 없는 독특함이라고 하겠다. 그렇담 이처럼 굽어지고 꺾어진 구성의 틈새영역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음직한 숨은 의미란 건 과연 무엇이겠는가?

 

“존재, 도시, 그리고 윤리의 문제”

따지고 보면 개중의 어느 누구 하나도 윤리적인 선택을 감행했노라고 말하긴 어렵다. 모두가 철저히 자기목적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으되, 다만 그 끝이 범죄자의 구속과 피해자의 구출이라는 도덕적으로 썩 나쁘지 않은 결말에 가닿게 되었을 따름인 것이다. 처음부터 타자들과 공동체는 선택사항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니 이 결말은 사실상의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보는 편이 차라리 더 옳을 터이다. 물론, 여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내어딛을 필요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제 속에 품은 내밀한 갈증과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게 비단 그들만은 아니라는 확신에까지 무리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실은 텍스트 속에 등장하는 대다수 인물들의 삶의 방식이 그러하다 본대도 큰 무린 없다. 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부녀회장인 영남의 조끼나 맨션입구의 현수막에 들러붙은 표어들은 신도시의 주변부 영역을 살아가는 존재자들의 들끓는 욕망을 여실하게 현상해낸다. 어떻게든 중심부로 편입하려는 눅진한 갈망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견인하고 추동하는 동력이란 뜻이다. 주민들 중 많은 이가 혁모를 백안으로 바라본 건, 어쩌면 그로 인해 자신들의 바람이 현실화되는 과정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까 염려한 탓일 게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보도록 하자. 정녕 이처럼 순전히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간다는 게 비단 주변부에 속한 존재들만의 문제요, 오로지 그들만이 전유(專有)하는 삶의 태도인 걸까?

 

[사실은 누구나 자기욕망의 우선법칙을 삶과 세계인식의 동력으로 삼는다]

물론 그렇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자신을 둘러싼 구조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 역시 부재한다고 가정해야만 할 테다. 강한 빛도 능히 투과시켜버리는 투명한 인간이란 확실한 허구의 관념이며, 어떠한 종류의 접촉이 되었든 인간을 에워싼 환경의 압력은 그/녀의 내밀한 존재영역에 모종의 흔적을 새겨 넣고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마땅히 그 영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시야는 시나브로 가려져만 갈 것이다. 이것이 도시의 전략이다.

간단히 말해서 대도시적 화려함에 도취된 동안엔 무엇이 자신을 이끌어 가는지를 선명하게 인지할 수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의 욕망충족을 최우선 요인으로 간주하며 살아가지만, 다시 말해 타자의 삶에 대해선 특별한 관심을 배제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심지어는 도시의 문법에 따라 그들을 단순한 소비와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며 적대하기까지 있지만, 지나치게 밝은 빛에 눈이 먼 채로는 좀체 진실을 헤아릴 수가 없을 따름이다. 그저 다만 오늘도 세련된 도시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불투명한 믿음 속에서 이리저리 허우적댈 뿐이면서도 말이다.

 

“영화의 세례, 변두리 풍경의 잠재력을 길어 올리다”

다소간 역설적으로 들릴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존재자들을 수렁 속에서 건져낼 계기가 여전히 변두리의 세계 속에 남아 있다는 말이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은 분명하다. 허구적 환영에 아직까지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은 공간 속에서만이 존재자들의 들끓는 욕망이 왜곡되지 않고 가감 없이 현상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혀 어렵게 생각할 건 아니다. 문제의 해결은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인지로부터 비로소 출발하게 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말이다. 감각이 혼연히 마비된 상태에서는 문제해결은 물론이거니와 그 증상을 지각하는 것마저 용이치 않다는 점을 기억해두어야 하겠다.

도시 변두리의 풍경이 그 중심부의 화려함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주장해볼 수 있다면 그건 필시 이러한 이유 때문일 터이다. 만일 혹 누군가가 주변부적 삶의 실제현실을 보고 거북함을 느낀다면, 되레 자신이 얼마나 기만된 환상에 도취되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분당 신도시 외각의 음침한 풍경을 그려낸 이 텍스트는 ―가벼운 스릴러가 아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단지 이웃에 관한 영화가 아니며, 차라리 인간존재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이란 말을 큰 어려움 없이 덧붙일 수 있으리라 본다. 본래 있던 것을 은폐된 장막 저편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영화란 말 또한 옳을 테다.

물론 이 텍스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praxis)하라는 행동강령 따윌 일러주진 않는다. 어떻게 하면 저마다의 들끓는 욕망들이 서로 부대끼는 장소로부터 이탈해 ‘윤리의 공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타자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긍정하며 그/녀의 가치를 재인식하는 새로운 ‘관계성의 자리’로 이행할 수 있는지 별개의 처방을 제시해주진 않는다. 문제될 건 없다. 그런 건 예술로서의 영화가 담당해야할 의무는 아닐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론 윤리적인 지평이란 게 처음부터 기계적인 정답을 산출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관계는 언제나 생생한 삶의 현장 속에서 형성되고 재구성된다. 그렇다면 영화 <이웃사람>의 역능은 예술적 추체험을 통해 우리의 눈에 드리운 백태를 걷어냄으로써, 발 딛고 있는 공간을 문제적 현장으로 지각하고 재인식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해주는 데 놓인다고 할 테다. 개안을 통해 새로운 변화의 획을 써내려갈 가능조건을 능히 거머쥘 수 있도록 말이다. 특별히, 어둔 뒤안길은 고사하고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휘황한 도시의 탄생을 기념하기에만 급급한/급급할 우리네의 삭막하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모쪼록 영화의 세례를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란 꽤나 시급해 보인다. 무람없는 표현일는지 모르나 거반 사울을 바울로 일깨울 만큼의 변화가 요청될 것도 같으니 말이다-.

 

 

 

 

글·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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