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호 구매하기
왜 지금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왜 지금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5.05.09 16: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20년 전, 미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한 좀바르트의 오류
펠리페 헤수스 콘살보스 - 「최면에 걸린 미국」, 1920~1960. 콘살보스는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시가 상자, 잡지, 광고지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미국 사회의 물질주의, 정치적 선전, 소비문화와 관련된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제작했다. 특히 그는 미국의 애국주의와 상업주의가 사람들에게 마치 최면을 건 것처럼 작동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날카로운 풍자와 유머로 표현했다.

“왕은 없다! 트럼프도 없다! 파시즘은 가라!”

2025년 4월,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이 함성은 단지 트럼프라는 한 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이후 미국 사회를 지탱해온 자유주의적 신화의 껍질을 벗기고, 그 껍질 아래 드러난 자본주의의 야수적 본질과 마주한 시민들의 총체적 분노이자 윤리적 각성이다. ‘50개 주에서 50건의 시위를, 하나의 연대로 묶겠다’는 상징적 숫자의 구성, 이른바 ‘50501 운동’은 이제 미국적 파시즘에 맞선 민주주의의 ‘재구성’ 실험장이 되고 있다. 뉴욕의 브라이언트 공원에서 센트럴파크까지의 행진은 그 자체로, 시민사회가 침묵의 시간을 넘어 정치적 주체로 귀환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샌더스의 민주사회주의, 거리에서 되살아나

이 시위의 이면에는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미국 버몬트주 출신 상원의원. 2016년, 2020년 미 대선 민주당 후보 경선에 참여. 의료보험 개혁·소득 불평등 해소·기후 위기 대응 등을 중심으로 극우 세력에 맞서고 있음)라는 이름의 유산이 깊숙이 자리한다. 2016년 대선 국면에서 그가 꺼내 든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더 이상 미국 사회에서 ‘금기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강고하게 유지되어온 자유주의 패권 담론의 금이 간 틈을 비집고 들어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청년들은 샌더스를 통해 배웠다. 그것은 의료는 권리이며, 교육은 사적 채무의 장이 아니라 공공의 기회여야 하며, ‘억만장자의 미국’이 아닌 ‘모두의 미국’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이번 시위의 주요 슬로건들, 즉 “건강보험은 인권이다”, “화석연료 개발을 멈춰라”, “공립학교를 지켜라” 등은 모두 그가 지난 십수 년간 일관되게 외쳐온 내용들이다. 그리고 지금, DSA(민주사회주의자연합), Sunrise Movement(기후청년운동), Forward Party 등은 그 정신을 계승하며 거리와 제도의 접합 면을 확장하고 있다.

 

히틀러와 KKK, 그리고 떠나는 자유의 여신상

시위의 상징적 장면들도 눈길을 끌고 있다. 트럼프를 히틀러에, 혹은 백인우월주의 테러단체 KKK에 빗댄 포스터는, 단지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의 변질과 전체주의적 전이 가능성에 대한 직관적 고발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를 떠나는 그림은 그 상징성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자유’라는 이름의 상징물조차 더 이상 이 땅에 머물 수 없다는 시민들의 도덕적 허망함이 투사된 이미지였다. 이것은 단지 트럼프 개인에 대한 풍자가 아니다. 이는 미국이 직면한 암담한 사회 구조와 문명, 퇴락한 국가 상징과 권력에 대한 철학적 전언(傳言)이다. 『사치와 자본주의』의 저자로 소비를 중시한 베른하르트 좀바르트는 1906년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다음과 같이 스스로 답변했다.

높은 임금과 물질적 풍요, 계층 상승의 서사로서의 ‘아메리칸 드림’, 실용주의로 환원된 노동운동, 분열된 이민자 공동체, 그리고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개인주의, 경제적 풍요와 노동자 계층의 만족 등, 당시 미국은 유럽보다 훨씬 더 높은 임금과 노동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노동계급의 급진적 정치의식을 약화시켰고, 사회주의적 불만 대신 개인 소비와 계층 상승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노동자들이 사회 체제를 전복하려 하기보다는, 그 체제 속에서 언젠가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 또한 유럽의 계급사회와 달리, 미국 사회는 고정된 신분 구조가 없고,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미국 노동자들은 자신을 ‘억압받는 계급’이 아니라, ‘미래의 부르주아’로 인식했다. 이 점에서 계급 연대보다는 개인의 성공 신화가 강력한 사회적 동기였으며, 이는 결국 사회주의 운동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미국 노동조합은 또한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과 달리, 정치적 이념보다는 실질적 개선(임금 인상, 근무 조건 개선 등)에 집중했다. AFL(American Federation of Labor) 같은 주요 조직은 사회주의와 거리를 둔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다. 또한 미국 노동계급은 다양한 민족, 언어, 문화 배경을 가진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단일한 정치 운동으로 결집하기 어려웠다. 이민자들 사이의 문화적·언어적 분열은 사회주의적 연대 형성을 방해했다. 마지막으로 미국 문화의 핵심 가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로, 집단적 이상보다는 자기 책임, 자율, 성공 신화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사회주의의 집단주의적 이상과 근본적으로 충돌했다. 좀바르트가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결론지은 것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욕망(풍요, 상승, 자유)을 잘 충족시키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상대적 만족 상태에 있었던 미국 노동자들에게는 사회주의라는 ‘불만의 이념’이 뿌리내릴 구조적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좀바르트의 이러한 진단은 당대 현실에 대한 정교한 묘사였으나, 그 이후 미국 사회에 전개된 미국의 불평등 구조 심화, 사회적 이동의 둔화, 그리고 버니 샌더스가 주도한 민주사회주의 운동의 부활 등은 그가 한 세기 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결정적 변수들이다. 또한 그는 미국 내 제도적 억압, 반공주의, 사회주의 탄압의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좀바르트가 던진 그 질문을 정반대로 뒤집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왜 지금,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가 간과했던 것은 바로,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지금의 현실이다. 자유주의가 생산해 낸 불평등, 시장 만능주의가 방기한 공공의 붕괴,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테크노크라시의 결합이 초래한 정치의 탐욕적인 사유화. 시민 공동체 정신의 실종은 좀바르트의 진단을 부정하는 집단적 실험실이 되고 있다.

 

‘디커플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제국주의

한편,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다시 꺼내든 ‘디커플링’(decoupling) 담론은 더 이상 중국 견제의 전략 차원을 넘어서, 동맹을 수단화하고 배제하는 신자유주의 제국의 통치기술로 기능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본질—독점화된 기술·금융 자본의 이해를 지구적 차원에서 관철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이 디커플링 전략은 ‘공정한 무역질서’나 ‘국가 안보’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자국 내 초거대 자본과 정치권력의 공고한 동맹 구조를 국제 시스템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디커플링은 표면적으로는 세계화를 역류시키는 흐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흐름은 새로운 방식의 ‘독점 세계화’로 귀결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반도체, 배터리, AI, 양자 기술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의 공급망을 중국과 ‘분리’(decouple) 하자고 주장하며, 동맹국들에도 동참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디커플링은 기술 안보나 민주주의 가치 수호를 위한 조치라기보다, TSMC, 인텔, 엔비디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미국의 독점기업이 자국 시장과 기술표준을 중심으로 ‘폐쇄형 블록’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인 셈이다. 말하자면, 디커플링은 미국의 초거대 독점자본이 세계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자유무역의 탈을 쓴 통제’를 강화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이미 20세기 중반 이후, ‘자유경쟁’의 이름으로 포장된 독점적 자본주의 체제로 이미 전환되었다. 폴 바란과 폴 스위지(Paul Baran & Paul Sweezy)는 『독점자본(Monopoly Capital, 1966)』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과잉 축적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전쟁·군비 경쟁·식민지적 구조조정·해외시장 확대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트럼프의 디커플링은 이 고전적 진단을 거의 그대로 되살린다. 그는 중국의 부상을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면서, 동맹국들에게는 충성을, 자국 기업에게는 보호를, 그리고 세계시장에는 미국 중심의 질서 복원을 강요한다. 이는 명백히, 과잉자본과 기술독점에 기반한 미국 자본주의가 봉착한 구조적 위기를 대외 팽창과 기술 블록화로 봉합하려는 시도다. 디커플링은 기술 영역에서 특히 위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반도체 생산의 ‘탈중국화’는 몇몇 기업에 집중된 위계적 글로벌 체인을 더욱 고착화하며, 신흥국이나 중소기업의 진입 가능성을 더욱 낮춘다.

미국의 기술독점 기업들은 국가 안보 프레임 속에서 규제와 지원을 동시에 받고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적 통제를 회피하면서 독점 지대를 넓히는 결과를 낳는다. 기술 블록화는 단지 공급망 재편이 아니라, 표준과 특허, 자금, 규제 권력의 집중 현상이며, 이는 결국 “탈세계화된 세계화”, 즉 폐쇄적 독점체계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트럼프는 자국 노동자와 중산층을 보호하기 위한 경제민족주의자처럼 자신을 포장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의 감세 정책, 규제 완화, 무역 관세 부과는 소수 대기업의 수익성 강화를 겨냥한 것이었고, 해외 생산기지를 철수한 뒤에도 노동자에게 돌아간 몫은 거의 없었다. 트럼프의 ‘자국 우선주의’는 결국 ‘대자본의 지대 수탈(地代收奪, 초국적 대자본의 이익을 위해, 생산과 무관한 자산·지위·권력의 독점 구조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국내외 노동계급으로부터 이윤을 추출하는 체계적 착취 방식)을 위한 내셔널리즘’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한국과 같은 미국 동맹국이다. 한국은 디커플링 전략의 주요 협력국이자, 동시에 그 전략의 희생자다. 반도체, 배터리, AI 기술 등 전략산업에서 미국의 공급망 안보 전략에 협조하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낙인찍히는 한편, 협조한다고 해서 독점적 이익이나 기술 주권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일방적인 동맹 구조 속에서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동맹 복종’이 아니라, 산업 주권과 경제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다극적 외교 전략과 기술연대의 틀을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중국이 아니라, ‘자유’를 말하면서 독점을 실현하는 미국의 기만적 자본주의다.

 

한국 극우의 미국 숭배, 이식된 혐오의 정치

오늘날 한국 극우가 숭배하는 것은 실재의 미국이 아니라, 신화로 각색된 허상이다. 그들은 복지를 나태의 보상이라 비난하고, 이민자를 사회적 위협으로, 노동조합을 체제 파괴자로 몰아 세운다. 이 모든 문법은 미국 우파 정치의 잔재를 좀비처럼 되살려 복제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이 모방하는 트럼프는 이미 미국 내에서 ‘공공의 적’으로 자리 잡았고, 그들이 부정하는 샌더스의 철학과 사유는 정치의 미래로 떠오르고 있다. “무엇이 수입되고, 무엇이 거부되는가?” 이것이 오늘 한국 사회에 던지는 가장 아이러니한 질문이다. 그 기준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로지 시민의 삶이어야 하지 않는가? 거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사회주의, 그것은 프로퍼간다가 아니라 현실이고, 증거다. 버니 샌더스가 외쳤던 말, “억만장자들은 두려워하라. 우리는 수백만이다.”라는 문구는 더 이상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거리화, 민주주의의 재현,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구체화되고 있다. 사회주의는 죽은 이념이 아니라, 공공의료와 기후 정의, 플랫폼 자본에 맞선 노동의 재구성, 그리고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려는 시민 윤리의 회복이라는 ‘살아 있는 정치’의 또 다른 이름이다. 120여년 전, 좀바르트가묻던 질문은 다시 던져진다. 그러나 이번엔, 전혀 다른 어조로 말이다.

‘왜 지금은, 사회주의가 아니고는 안되는가?’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