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의 유력 일간지 <더 타임스>가 2024년 12월 16일 보도한, “한국인들은 계엄령의 이유로 대통령의 ‘레이디 맥베스’를 지목한다”는 제목의 기사는 놀랍도록 닮은 윤대통령 부부와 맥베스 부부의 공통점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12.3 계엄령 이후 올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선고되기까지 이어진 대한민국의 탄핵정국은 그야말로 <맥베스>의 ‘복붙’(복사와 붙여넣기)이었다. 보면 볼수록, 현실의 맥베스에 이입되는 이유는, 2025년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계엄령 선포 직후, 국민들은 군・경이 국회에 난입해 의원들을 진압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이후 두 시간여 만에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요구 결의안이 가결되는 광경과 법사위의 청문회 등 탄핵정국 속 쏟아지는 영상 이미지들을 TV와 유튜브를 통해 계속해서 지켜봤다.
전 세계가 계엄령 사태를 두 눈 뜨고 지켜본 가운데 버젓이 거짓 증언을 하는 친위 인사들의 재판 과정도 보았고 응원봉이나 태극기를 들고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모습도 보았다. 이것이 지난 20세기에 있었던 계엄령과 21세기의 계엄령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인류가 정보를 인식하고 체험하는 주된 창구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영상 이미지들이다. 인간의 뇌와 영상 문법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연극과 다른 영화의 ‘동일화 과정’ 때문에 사람들이 영화에 보다 더 이입된다고 말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아벨 강스의 말을 인용해 기술복제 시대에는 “셰익스피어, 램브란트, 베토벤은 영화화 될 것이다.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들이 영화화되어 부활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예언했다.
탄핵정국을 떠올리게 했던 <맥베스>
그렇다면 우리가 감정이입하며 머릿속에 ‘재연’하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보다 영화 <맥베스>에 가깝지 않을까. <맥베스>의 서사만이 아니라, 영화 <맥베스> 속 많은 이미지들이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과 맥락을 같이 한다. 문학이 원작인 작품을 영화로 옮겼을 때 중요한 것은 ‘원작과 어떻게 달라졌는가’이다. 문학을 영화로 전환하는 데는 반드시 간극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 간극을 영화는 어떻게 통과하는가.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버넘숲이 움직이는’ 장면이었다. 원작에는 “숲이 움직였습니다.”처럼 단 한두 줄로만 표현되어있을 뿐인데, 원작이 행간에 은근하게 감추어놓은 이미지를 영화는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영화는 오손 웰즈가 만든 <맥베스>(1948)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후, “던시네인 언덕으로 버넘숲이 올 때까진 죽음에도 파멸에도 나는 아니 두려우리.”라고 자신하던 맥베스는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오만함과 권력욕을 징벌하는 헤카테에 의해 파멸된다. “그러나 이제 행실을 고칠지니… 그자를 파멸로 이끌거야… 과신은 인류 최대의 적이니라.”
“제가 언덕 위에서 망을 보고 있으면서 버넘 쪽을 향했는데, 그 순간, 숲이 움직였습니다.”
시종이 고한 이후 원작에는 ‘움직이는 숲’에 대한 어떤 묘사도 나와 있지 않다. 극단적인 조명과 그림자의 강렬한 명암 대비(키아로스쿠로), 비현실적이고 뒤틀린 형태의 세트, 극단적인 딥포커스와 왜곡된 카메라 구도 등 표현주의적 미장센을 많이 활용한 오손 웰즈의 <맥베스>에서 버넘숲 장면은 소련의 저명한 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와 표현주의 양식이 부분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긴 십자가를 들고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축(y축)을 따라 움직이던 잉글랜드 군인들에게 맥더프가 “나뭇가지를 들라”라고 명령하자 십자기 대신 나뭇가지를 베어 치켜들고 진군한다. 이때 카메라는 방향을 바꿔 정면에서 찍었다. 화면의 안쪽에서 z축을 따라 관객 쪽으로 이동하는 움직임은 매우 정적이고 느리게 보인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버넘숲의 움직임을 점프컷으로 교차편집 했는데, 이에 따라 화면에는 코도성을 에워싸고 진압해 들어오는 병사들이 요새에 갇힌 맥베스를 아주 오랫동안 옥죄는 듯한 압박감이 감돈다.

표현주의적 미장센과 ‘리듬 몽타주’ 편집양식의 결합
이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면의 하단 절반을 검게 채운 지평선과 그 위에 극단적으로 밝은 빛(key-light)이 화면의 안쪽에서 비추며 생성하는 명암 대비 즉,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이다. 이 때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힌 나무들이 역광을 받아 실루엣만 검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 장면은 숲 너머에서 여명이 밝아오는 아침으로 보인다.
이후 버넘숲의 미장센은 연속해서 점프컷 되면서 점점 나무의 크기는 커지고 빛의 조도가 낮아진다. 아주 느리게, 마치 진짜 나무처럼 거의 미동하지 않는 듯한 속도로 아침부터 밤까지 진군하는 군대의 모습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편집한 장면이다. 그리고 마침내 코도성에 다다랐을 때 병사들은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횃불을 치켜들며 성안으로 올라간다. 지평선의 정적인 구도의 느린 쇼트가 수직 상승의 이미지로 전환되며 역동적이고 빠르게 움직인다.
웰즈가 연출한 <맥베스>는 전체적으로 할리우드의 연속 편집에 기반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에이젠슈테인이 고안한 ‘리듬 몽타주’의 편집양식을 사용했다. ‘버넘숲’ 장면에서의 표현주의적 미장센과 소비에트 편집 양식의 결합은 원작이 지닌 심리적 불안감과 운명적 비극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치가 된다.
맥더프의 칼에 떨어진 맥베스, 탄핵 응원봉의 힘에 파면된 윤석열
횃불을 치켜든 병사들의 수직 이미지는 영화의 결말, 맥베스가 ‘효수’되는 장면에까지 이어진다. 맥더프는 맥베스와의 결투에서 맥베스의 머리를 칼로 베어 창끝에 꽂는다. 이때 십자가-나뭇가지-횃불-칼-창으로 이어지는 수직 이미지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올라 권력을 전복시키는 민중의 힘을 나타낸다. 맥베스의 머리가 바닥에 나둥그러지는 수직 하강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권력의 허망함을 표현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영화는 횃불을 든 수많은 병사가 승리의 궐기를 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횃불은 언제 켜지는가. 응원봉의 전신인 촛불은 낮이 아니라 밤에 켜진다. 권력 쟁탈과 부정한 국가통치로 어두워진 세상을 다시 불 밝히기 위하여. 윤석열 김건희 부부를 최초로 맥베스에 빗대어 언급한 사람은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다. 그는 지난해 6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맥베스가 “결국 맬컴과 손을 잡은 맥더프에 의해 효수된다”고 적었다. 그가 굳이 ‘효수’라는 험악한 단어를 쓴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단두대가 민주주의의 시작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횃불과 응원봉, 효수의 상승 운동은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우는 역동적 힘, 승리의 이미지가 된다.
순리에 어긋난 맥베스, 세계를 혼란에 빠뜨려
숲이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기적이다. “그런 일은 없으리라. 누가 숲을 징발하고 나무에게 뿌리를 뽑고 움직이라고 명령할 수 있지? 달콤한 예언이다.” 나무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런 나무가 모여 거대한 숲을 이루는 순간, 그 숲은 왕을 처단할 수 있을 정도의 초월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군인에게 진압당하는 시민 한사람, 한사람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일지라도 그들이 광장에 모여 숲처럼 거대한 연대를 이뤘을 때는 제왕적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기적을 발휘한다. 광장에서 그저 평화로이 응원봉을 들고 있던 시민들은 그 안에 칼과 창보다 역동적인 상승 운동의 이미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맥베스는 예언 속 운명을 따른 것이 아니라 거스른 것일지도 모른다. “운이 닿아 왕이 될 것이라면 애쓰지 않아도 왕관은 내 것이 될런지도 모른다.” 더 빨리, 더 확실하게 권력을 차지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맥베스는 반역이라는 악행을 저질러 자연의 법칙 속에 놓여있던 운명을 거스른 것이다.
“순리에 어긋나오. 저질러진 그 일처럼.” 안온하게 흐르던 자연의 질서는 깨지고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균열이 난 세계는 그 평화로운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가공할 힘을 발휘했다. 평화로운 질서를 되찾고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시민들의 지극히 소박한 바람이 그랬듯이.
글·이승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예술전문사 졸업. 2024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으며, 현재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