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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위계의 언어, 위계의 사랑 ―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위계의 언어, 위계의 사랑 ―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 정동섭(영화평론가)
  • 승인 2019.04.08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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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라틴아메리카라는 환상성

갑자기 멕시코 영화에 풍년이 찾아온 걸까?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멕시코 영화계는 또다시 주목할 만한 작품 하나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멕시코 영화계를 대표하는 세 친구들(알폰소 쿠아론과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이 아니다. 그래서 더 반갑다. <은밀한 계절, 봄 Las oscuras primaveras>(2014) 이후 또다시 사회, 문화 또는 제도가 허용하지 않는 사랑과 그 간극을 이야기한 에르네스토 콘트레라스(Ernesto Contreras) 감독의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Sueño en otro idioma>(2017). 2017년 선댄스 영화제(The Sundance Film Festival)에서 월드시네마 부문 관객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로마>보다 먼저 제작됐지만 우리에겐 뒤늦게 도착했다.

 

신비로운 고대문명과 유럽의 근대문명이 조우하는 지점이어서인지, 라틴아메리카 문학 또는 영화는 색다른 또는 새로운 이야기를 해왔다. 그리고 서구의 이성과 논리를 거부하며 뒤트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담론을 형성하며 진보했다.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역시 마술적 사실주의의 토대에 선 작품이다. 콘트레라스 감독은 ‘시크릴어(語)’라는 가상의 언어를 창조했고, 거기에 문화적 함의를 덧붙였다. 그것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에게나 허용되지는 않는 언어. 생명과 자연의 언어였다. 시크릴어를 사용하는 세 명의 생존자 중 하나인 하신타는 그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태초에 여자는 새였어. 땅을 걷는 최초의 남자를 그 새는 사랑하게 됐지. 남자도 새를 사랑했어.

하지만 쓰는 언어가 다르다 보니 맺어지기가 어려웠지.

그래서 새는 남자에게 밀림 속 만물의 공용어인 우리의 시크릴어를 가르쳐 주기로 했어. 둘의 결합으로 태어난 게 인간이야.

그때부터 세상에 번성한 인간과 동물은 모두 시크릴어를 쓰게 됐지.

결국 시크릴어는 바벨 이전의 언어였다. 성경의 아담과 하와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과 소통했다면 그건 아마도 시크릴어를 통해서였으리라. 이렇게 시크릴어는 신화적 환상성과 연결되고, 밀림의 언어가 되면서 마술적 사실주의에 소속한다.

 

 

2. 위계의 언어, 그리고 사랑

시크릴어는 원래 새의 언어 또는 인간을 제외한 만물의 언어였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새(여자)는 남자에게 그 언어를 가르쳤고, 이후의 모든 인간과 만물은 시크릴어를 쓰게 됐다. 그리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의 토대 위에 선 밀림은 평화로웠을 터였다.

그러나 구대륙에서 사악한 인간들이 침입했다. 그들은 그 훨씬 이전에 타락했고 신은 각종 언어를 구별해 그들의 소통을 어렵게 했다. 이제 언어에 위계가 생겼다. 차별과 전쟁, 이성에 뿌리를 둔 정복자들의 언어는 감성과 본능, 평등과 평화의 태초 언어를 말살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마르틴이 수행하는 기록과 유산의 의미 이외의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 이전 정복자들의 언어인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마르틴은 시크릴어를 채집하고, 그를 사랑하는 유비아(Lluvia)는 새로운 정복자들의 언어인 영어를 동경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틴이 이사우로를 통해 시크릴어를 기록하는 장면에 유비아의 영어수업 사운드를 입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과거의 언어가 목소리를 잃고, 미래의 언어가 지배하는 밀림의 현실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유비아는 밀림을 쉽게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비(雨)를 뜻하는 유비아는 비가 자주 내리는 밀림, 그 근원적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인데, 이는 그녀의 영어가 어설픈 까닭이기도 하다.

 

이사우로는 고립을 자초했다. 그의 언어는 문명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근대사회에 적합하지 않았다. 문명은 경쟁과 우열의 기반 위에 존재했고, 시크릴어를 사용하는 동족들은 생존을 위해 정복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런 의미에서 에바리스토의 의자는 문명의 기표가 되어 그의 전향 또는 동화(同化)를 상징한다. 그리하여 고립된 언어로 인한 이사우로의 삶은 더 고독해졌다. 언어는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지만, 집단의 크기에 따라 소통의 범위가 결정된다.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이사우로는 한때 정복자들의 언어를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가 스페인어를 배울 때 그의 배움을 방해한 것은 언제나 에바리스토였다. 어쩌면 이사우로는 언어를 통해 세상에 나가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전부를 건 사랑이었다. 그래서 에바리스토는 이사우로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창(窓) 이어야 했다. 그런데 에바리스토는 이사우로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만을 사용하는 마리아를 선택하며, 그를 떠났다. 배신당한 이사우로는 사랑을 위해 고독한 삶을 택한 남자 혹은 삶이 고독해진 여자였다.

 

시크릴 문화의 사랑에는 금기가 없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사람과 동물의 결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동등(同等)의 문화. 그러나 시크릴 문화는 질서와 차등의 기독교 문화에 정복됐고, 이제 사랑에도 금지와 위계가 생겼다. 그렇게 이사우로의 사랑은 에바리스토에게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사랑이 됐다. 그것은 죄였다. 그래서 정복자들의 무기를 지닌 에바리스토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사우로를 위협했고, 마을에서 쫓아냈다. 추방된 이사우로는 외로이 남겨져, 사랑이라는 ‘다른 언어’로 꿈꾸는 자가 됐다.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는 라틴아메리카 정복사의 그늘이 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낙원이 파괴되면서 언어가 사멸되고 사랑이 버려졌다. 이 작품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허술함이 없지 않다. 개연성의 부족이나 감정의 과잉도 눈에 띈다. 그러나 환상적이고 마술적인 내용이기에 잠시 논리적 재단을 뒤로하고, 그것마저도 비밀스레 접어두는 것이 평론의 미덕이나 역할 아니겠는가. 인생 혹은 세상 그 자체가 미스터리하니까 말이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 『영화로 보는 라틴아메리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전2권)』,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 『스페인 문학의 사회사 (전5권)』 등의 번역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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