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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분노엔 ‘조직’이 필요하다
열정과 분노엔 ‘조직’이 필요하다
  • 프랑수아 뤼팽
  • 승인 2010.12.0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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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écial] 연대의 재발견

수백만의 프랑스인이 연금법 개정에 반대해 시위를 벌였다. 공장 노동자, 교사, 철도·운송·병원 노동자, 고등학생들이 파업과 시위, 점거에 나섰다. 그러나 각각의 투쟁은 쉽게 연대하지 못했다. 충분한 대항세력을 형성해 정부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열정만으로는 안 된다. 열정은 조직을 대신할 수 없다.

 “가자, 노동자 총회로! 로터리로 모이자.” 지난 10월 12일 화요일 새벽 4시, 아미앵 산업단지는 노동자들에게 점거됐다. 발레오, 굿이어, 던롭, 프록터 앤 갬블 등 다국적기업이 입주한 산업단지는 ‘프랑스 최초의 노동자 도시’이자 아미앵의 ‘경제적 중심지’에 해당한다(<르피가로> 2008년 6월 24일자). 달빛 사이로 공장 굴뚝과 고속도로, 철망이 보이고 길에 쌓아놓은 타이어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헬리콥터 한 대가 노동자들 머리 위 상공을 맴돌았다. 늦은 오후부터 대오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멈출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파업하다 “축구 본 뒤 다시 합시다”

굿이어 프랑스노동총연맹(CGT) 소속 미카엘 바망은 “투쟁은 시작부터 끝까지 강력하게 전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에 스무 명 정도만 남아서 개처럼 끌려가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다른 한 명은 “스무 명으로도 버틸 수 있다!”고 맞받아친다. 바망은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아는가? 노동자들은 없고 노조 간부들뿐이다. 무슨 노조 간부 파업도 아니고!”라고 소리친다. “게다가 오늘 저녁에는 축구시합이 있다. 그 녀석들 전부 TV 앞에 앉아 있을 거야!”

지역 노조 지부장 크리스토프 플레는 결국 솔로몬의 판결을 내린다. “밤 10시에 여기 다시 집결하는 걸로 합시다. 사람들 모이는 것 봐서 그다음 일정을 생각해봅시다.”

그러나 밤 10시에 사람들은 모이지 않았다. 철도 노동자들이 올지 모른다고 했지만 그것도 두고 볼 일이었다. 헬멧을 쓰고 플래시볼(고무총)로 무장한 경찰들만 속속 도착했다. 경찰 수가 노동자 수보다 훨씬 많았다. 결국 노동자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24시간도 안 되어 공장 점거가 무너졌다. 스스로 무너진 것이지 운이 나빠서 무너진 게 아니었다.

▲ <무제>, 2002-크리스 조한슨
이번 ‘행동’은 CGT 아미앵 산업단지 지부에서 바로 전날 결정한 것이다. 노조원들은 유인물을 만들 틈도, 동료들에게 파업 참가를 독려할 틈도 없었다. 어떤 신문이나 블로그도 공장 점거 소식을 다른 쪽 사람들(교사, 철도 노동자, 학생)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평소 교류가 적은 각 부문 간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아미앵 중심가에서 1만 명 가까운 인원이 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나 CGT 지부는 시위 내내 공장 점거 계획을 선전하지 않았다. 유인물이 배포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불과 6km 떨어진 두 곳은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한 노동자의 비꼬는 듯한 말투를 빌리면, 공장의 ‘강경파’와 ‘시내에서 산책을 즐기는 부르주아’ 사이에 연대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지난 10월, 아미앵 거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고등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와 거리를 활보하고, 실업자들은 프랑스 전경련(Medef) 건물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창문이 깨지고 교사들은 역 앞 도로를 점거했다. 흥분한 철도 노동자들이 우회도로를 막고 차량 통행을 방해했다. 톨게이트가 뚫리고 화물차에 실린 자갈이 길 위로 쏟아졌다. 각각의 시위대가 우연히 만나 더 큰 수로 불어나기도 했다.

마치 시위대 전체가 한 몸이 되어 에너지를 발산하는 듯했다. 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발로 땅을 굴렀다. 팔다리가 펄펄 살아 움직였다. 그러나 그 팔다리의 움직임을 조정할 머리가 없었다. 각각의 부문이 연대하지 않고 따로 움직였다. 산업단지에서 열린 총회에 학생 ‘대표’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모여 토론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함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다른 부문 사람들을 투쟁에 끌어들일 수 있을까? 가스, 전기, 시청 공무원…, 어느 쪽이 가장 큰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아미앵에서 자본 쪽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아미앵에서 정권과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의심이 든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이길 수 있을까?’ 대열 앞에는 자본이 버티고 서 있었다. 훨씬 오래전부터 자본은 ‘개혁’ 일정을 짜고 지구적 차원에서 스스로를 조직해왔다. 반면 시위대는 조그만 도시 안에서조차 자신을 조직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지난 30년간 노동자 ‘조직’이 와해된 결과를 보고 있다. 힘(혹은 희망)을 잃으면서 예전 ‘습관’도 사라졌다. 유인물을 만들어서 회사 정문 앞에서 나눠준다든지, 동료들을 차례로 만나 설득한다든지, 집회 발언자를 뽑거나 공동 회합을 준비한다든지…. 이런 활동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게 되었다.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자발성’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마치 시위대가 추켜올린 주먹이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였다. ‘총파업을 벌이자’는 구호가 울려퍼지고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면 된다는 식이었다. 참을성 있게 무기를 점검하며 일을 도모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보 공유, 힘센 노조 선별, 투쟁 범위 규정, 일정 수립, 정세 예측 같은 건 없었다.

‘총파업’이라는 유령이 시위 행렬 사이를 떠돌았다. 총파업에 대한 주장은 시위대 속 토론에서 제기되기도 하고, 벽의 낙서나 행렬 뒤편의 외침 소리로 표출되기도 했다. ‘정세 역전’을 위해서는 노총 지도부가 총파업을 선언하는 일만 남은 듯했다. 그러나 솜에서 열린 노동자 총회에서 교사들은 통일노조연맹(FSU)과 연대노총(Solidaires), CGT, 교원노조의 동의 아래 ‘시한부 파업’에 찬성표를 던졌다. 고등학교에서 파업에 참가한 교사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산업단지에서의 공장 점거도 생산에 차질을 줄 정도는 아니었고, 종업원의 파업으로 문을 닫은 시내 상점도 없었다. 이런데도 프랑스 전국이 ‘총파업 일보 직전’이었고, 베르나르 티보 CGT 위원장이 총파업을 선언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노조의 힘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팔다리는 펄펄 뛰는데 머리가 없다

프랑스에서 가장 최근의 ‘총파업’은 2년 전 과들루프(중미의 프랑스령 군도)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과들루프 총파업을 자연발생적 동요였다고 묘사했다. 이런 관점은 지난 몇 년간, 아니 수십 년간 노조 건설과 조직화, 대항언론 구축을 위해 활동해온 과들루프 노동자총연맹(UGTG)의 노력을 제대로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UGTG는 노사위원회에서 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고, ‘대중활동과 계급투쟁’ 기치 아래 노조 간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정당과 단체까지 세력을 확대해 LKP(Lyannaj Kont Pwofitasyon·과도한 착취에 반대하는 사람들)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들은 기반을 마련했다고 해서 손 놓고 기다리지 않았다. 에디 다마스가 증언한다. “그런 중대한 결정은 위에서 선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12월 16일부터 1월 20일까지 우리는 여기저기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 자전거 경주장에도 가고, 시장에도 갔다. 심지어 공동묘지 입구에 서서 유인물을 나눠줬다. 현장에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우리는 그들이 총파업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과일이 익어 땅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1)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하면 익은 과일은 땅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아미앵이 그랬고, 푸앙타피트르가 그랬다. 아미앵 산업단지 노조 지부는 10월 16일(토요일)에 미리 파업 일정을 결정했다. 그들은 10월 20일(수요일)에 파업하기로 했다. 노조 연대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현실을 자각한 일부 노조원들이 발벗고 나섰다. 수첩을 들고 이런저런 조직들을 찾아다니며 이메일 주소를 적었다. 인터넷 게시판에 파업 계획을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학생부터 연대노총 조합원까지, 회합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파업 소식을 알렸다. 특히 화요일 집회에서는 ‘모두 산업단지로!’라는 제목의 유인물 8천 장을 뿌렸다. 시위가 끝나고 임시회의가 열렸다. 비공식적으로 지명된 노조원들이 짝지어 돌아다니며 자원자 수를 파악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음날, 미카엘 바망은 감탄했다. “산업단지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건 처음 본다. 전례 없는 규모다! 금요일 저녁까지 버틸 수 있겠다. 본때를 보여주자!” 고립을 넘어서 연대한 결과였다. 아미앵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잡은 산업단지는 새벽부터 황혼까지 만남의 공간으로 변했다. 네거리에서는 저녁 공연이 펼쳐졌다. 지방의회 의원들까지 왕림해 시위대에게 소시지를 제공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CGT 지부 위원장이 시위대의 물결에 합류해 파업 지지를 선언했다. 모든 게 성공적이었다. 시내의 프티 부르주아지와 산업단지의 노동자 간에 연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것도 지속적인 방식으로.

파업 이틀째, 트럭 수십 대가 갓길에 서 있고 물건을 실으러 왔던 트럭들은 그대로 길을 돌아 나갔다. 발레오, 프록터 앤 갬블, 던롭 등의 공장에서는 생산 라인이 속도를 늦추거나 멈췄다. 파업 참가자들이 뒤로 물러서지 않자 경찰은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흘 조직활동, 투쟁이 달라졌다

목요일 밤 11시 엉클샘 로터리에는 300~400명이 운집해 있었다. 노동자뿐 아니라 학생, 교사, 보조교사, 지방의원들도 보였다. 경찰 대열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지치거나 지루한 기색은커녕 즐거워 보였다. 이번에도 ‘질서는 다시 복구되겠지만’ 지난번처럼 대오가 스스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경찰 곤봉과 최루가스, 헬리콥터 등이 이들을 진압했다. 한밤의 불꽃놀이를 보는 듯했다.

작가로 활동했던 피에르 랑드 신부는 1927년에 쓴 글에서 “파리라는 도시가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물결과 선술집에서 정치를 논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보면서, 그들이 사회혁명을 일으켜 우리의 삶, 기념물과 도서관을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사회적 균형이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다. 랑드 신부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잊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를 이용해 경찰의 감시가 닿지 않는 소굴에 모여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미 모든 전략적 수단을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2)

글•프랑수아 뤼팽 François Ruffin
아미앵 지역독립신문 <파키르>(Fakir) 발행인.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프랑수아 뤼팽, ‘식민지 과들루프 군도, 끈질긴 항전의 열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09년 11월호. 파브리스 도리악, ‘프랑스 해외 영토 과들루프의 반란’, 2009년 5월호 참조.
(2) Pierre Lhande, <방리유의 그리스도>(Plon·파리·2010년 6월 23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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