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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러나 혹은 그래도 계속되는 삶-<기생충>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러나 혹은 그래도 계속되는 삶-<기생충>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19.08.26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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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서 기택은 근세가 거주하던 지하공간으로 들어간다. 저택의 어두컴컴한 지하 방. 반지하방에 살던 기택은 그곳에서 근세의 삶을 되풀이한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결코 도착하지 않을 신호를 보내고, 기택은 근세가 남긴 책과 낙서와 신호 시스템을 답습한다. 기택의 삶의 변화는 공간의 이동으로 나타난다. 궁핍하지만 가족애만큼은 넉넉한 반지하의 삶, 저택의 봄꿈 같기도 하고 소꿉놀이 같은 삶, 밀폐된 지하의 삶의 순서로 변했으니, 그의 사회적 위상이 하강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때의 하강을 추락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기택의 행적은 순환 고리로 해석 가능하다. 박 사장의 거처였던 저택에 독일인들이 입주하듯이, 근세의 거처였던 지하공간에 기택이 들어와서 빈자리를 채운다. 그러니까 저택의 거실은 거실대로, 지하실은 지하실대로, 그 나름의 이유와 방법으로 순환의 고리가 이어진다. 기택이 저택의 거실을 잠시 빌려 쓴 것을 제외하면, 이 구도는 변하지 않는다. 아들 기우가 돈을 벌어서 박 사장의 저택을 구입하겠노라고 다짐하지만, 그 다짐이 현실화될지는 알 수 없다. 이때 봉준호의 시선은 냉정하다. 그는 관객들에게 헛된 희망을 제시하지도, 섣부른 절망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기생충>에서는 인물의 내면이 변하고, 상황이 변하고, 누구는 갑작스럽게 죽음의 영토로 떠나갔지만, 그래서 참 많은 것이 변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변하지 않은 채 계속된다. 아니다. 기택의 내면 세계가 변했으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졌으니, 이보다 더 큰 변화가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이중성은 봉준호 영화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 현실과 이상처럼 서로 이질적이거나 상반된 요소들이 혼재돼 있는 결말은 그의 영화 세계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리고 인물의 행적 혹은 순환의 서사구조는 이러한 특징을 떠받치는 기둥이 된다.

<기생충>에 나타난 순환의 고리는 사실 낯설지 않다. 봉준호 영화 전반에 나타나는 구조적 특징이다. <옥자>, <설국열차>, <괴물> 등 그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그 작품들이 대부분 순환 구조로 돼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순환의 연결 고리는 영화의 주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각 영화에서 진행돼 온 인물의 행적과 사건들이, 사회 시스템이, 이 세계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이다.

<옥자>의 이야기 구조는 <기생충>과 유사하다. <옥자>의 기본 서사는 ‘①미란도 그룹의 직원들이 옥자를 데려간다, ②미자가 옥자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③미자가 ALF(동물해방전선) 단원들을 만난다, ④미자가 옥자를 찾아 뉴욕으로 떠난다, ⑤옥자가 뉴욕에서 수난을 당하고, 미자는 루시의 계략에 빠진다, ⑥미자가 황금 돼지를 주고 옥자를 산다, ⑦할아버지가 미란도 그룹과의 계약 내용을 숨긴다./ALF 단원 중 한 명이 거짓으로 통역한다, ⑧미자와 옥자가 산골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옥자>에서 미자와 옥자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다. 옥자를 만들고, 납치하고, 돈벌이용으로 활용하려고 했던 글로벌그룹 미란도의 CEO 루시를 파멸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미란도 그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루시의 자리는 쌍둥이 낸시가 대신 차지한다. 즉 인물은 바뀌어도 시스템은 변하지 않는다. 이때 변한 것은 산골로 돌아온 미자와 옥자의 내면이다. 그들은 예전의 평화를 되찾은 동시에 엄청난 모험을 거치면서 내면의 성장을 이룬다. <기생충>에서 기택의 변화와 비슷한 맥락이다. IT기업 CEO인 박 사장/루시, 독일인/낸시, 미자(옥자)/기택은 유비 관계에 있는 인물 유형이다.

두 영화의 인물의 성격이 약간 다른 점은, <기생충>의 서사의 깊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옥자>에서는 선악의 갈등 구도가 명확하다. 유전자 변형 실험에 의해 탄생한 <옥자>의 옥자는 하마와 돼지의 얼굴이 합성된 상상 동물이다. 옥자는 외형상 괴물이지만, 그 내면은 순진무구한 원시의 동물이다. 오히려 뉴욕의 최첨단 건물에서 일하는 루시는 외형상 화려하고 세련돼 보이지만, 그의 실체는 타락한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괴물’이다. <기생충>의 박 사장도 루시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의 최상류층이다. 하지만 박 사장과 그의 아내는 부도덕한 인물(괴물)은 아니다. <기생충>이 단조로운 선악 대결 구도로 일관한 <옥자>와 다른 점이다.

봉준호 영화에 나타난 서사의 순환 고리는 <설국열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설국열차>에서 표면적인 순환 구조는 열차의 운행 궤도다. <설국열차>의 열차는 고정된 두 지점을 왕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표면에 깔린 철로를 따라 운행한다. 즉 열차는 직선으로 질주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원형의 순환 궤도 안에서 움직인다. <설국열차>에서 열차는 앞으로 질주하고 커티스도 앞 칸으로 전진한다. 그런데 이 직선의 움직임은 원형 궤도에 수렴된다. 열차는 원형의 순환 궤도를 질주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순환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열차가 원형의 순환 궤도를 주기적으로 반복 운행하면서 탑승객들은 매년 예카테리나 다리에서 새해를 맞는다. <설국열차>에는 또한 ‘빙하기 이전-열차에서 보낸 빙하기 17년-빙하기 이후’가 모두 담겨 있다. 빙하기 이전과 이후의 시간은 프롤로그와 결말을 통해서 제시된다. 프롤로그는 빙하기가 시작된 원인을 알려준다. 인류가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CW-7을 대량 살포함으로써 혹독한 재앙이 닥쳐왔고, 모든 생명체가 멸종됐다고 밝히고 있다. 결말은 빙하기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암시한다. 빙하기가 아닌 시대가 빙하기를 앞뒤에서 에워싸고 있는 구조다. 그래서 열차의 파괴는 빙하기에서 빙하기가 아닌 시대로의 회귀, 나아가 새로운 시대의 전망을 암시한다.

<기생충>과 <설국열차>의 인물 구도 역시 유사한 점이 많다. 기택/커티스, 박 사장/윌포드는 느슨한 형태이지만 일종의 짝이 될 수 있다. 그들은 각자의 세계의 정점에 있는 인물들이다. 자본주의 시스템과 계급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유사성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설국열차>의 창조주 윌포드는 완벽한 파멸에 이르고, <기생충>의 박 사장은 그렇지 않다. 이는 기택이 박 사장의 집에 입주하는 과정이나 그들의 관계가 <설국열차>와 달랐기 때문이다. 인물의 이러한 특징은 <기생충>의 특장이 되며, 봉준호의 순환 고리가 유연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렇다면 <기생충>은 <옥자>와 <설국열차>의 순환 구조를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전작들에서 다소 거칠게 드러났던 인물의 성격, 서사 구조, 사건 전개를 훨씬 더 섬세하게 세공한 작품이 된다. <옥자>와 <설국열차>에서 증발됐던 웃음을 회복한 것도 <기생충>의 특징이다.

 

봉준호 영화에서는 순환의 플롯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인물들은 떠났던 곳으로 혹은 그와 유사한 곳으로 돌아오고, 수많은 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누군가의 빈자리가 생기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인물도, 사건도, 삶도 순환한다. <괴물>에서 박강두는 딸 현서를 납치한 돌연변이 괴물을 물리친 후 원래의 자리인 한강 둔치 매점으로 돌아온다. 밥상 앞에는 현서를 대신해 고아소년이 앉아 있다. 이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 반복이 아니다. 박강두는 이제 예전의 박강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생충>의 기택도 예전의 기택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는 것도 아니다. 봉준호 영화는 이 변화와 불변의 장벽 사이를 오가면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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