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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강요된 긍정 – '명랑 하라!'는 명령의 시대상
[이주라의 문화톡톡] 강요된 긍정 – '명랑 하라!'는 명령의 시대상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19.09.09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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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요.

마약 문제로 구속되었던 연예인들은 많다. 그들은 대부분 수사가 시작되는 단계에서부터 자중한다. 언론에 노출되어 여론의 질타를 받는 것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 스캔들을 확산시키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유천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박유천은 마약 투약 혐의를 받고 수사 선상에 오르자마자 기자회견을 열어 투약 사실을 부인하였다. 이후 수사 진행 과정에서도 탈색에 제모까지 강행하며 끝까지 강경하게 부인하였다. 안타깝게도 다리털에서 필로폰 양성 반응이 나왔고, 박유천의 거짓말은 들통 났다. 예전 성추문 사건부터 마약 사건 그리고 거짓말까지 박유천의 이미지는 완전히 추락한 듯 하였다. 팬과 대중들을 향한 너무나 태연한 거짓말로 인해 대중들의 신뢰는 무너졌다.

 

smile! by seanbjack https://www.flickr.com/photos/sean-b/245744537
smile! by seanbjack https://www.flickr.com/photos/sean-b/245744537

 

그러나 박유천의 멘탈은 무너지지 않은 듯하다. 그는 2019년 7월 2일 집행유예로 출소한 후, 단 4일 만에 개인 SNS 계정을 개설했다. 거기에 올라온 사진은 팬들로부터 받은 격려(?) 카드와 선물에 둘러싸인 박유천의 모습이었다. 이건 뭐지?

형사 사건에 연루되었던 연예인들이 대부분 '자숙'한다는 선례에 비추어서도, 집행유예이긴 하지만 마약 투약 사실을 '반성'해야 하는 범죄자의 입장에서도, 주변의 신뢰를 저버리며 자신의 커리어를 망쳤다는 '자괴감'에 빠진 개인의 입장에서도, 밝은 분위기의 사진은 뭔가 어색하다. 일단 사진 자체를 올리지도 않을 테지만, 올린다 하더라도 고개 숙인 모습, 눈물 흘리는 모습 등을 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런데 박유천의 사진은 밝다. 팬들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왜 박유천은 괜찮은 걸까? 팬들에게 언제나 좋은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계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일까? 한국 아이돌은 스스로 자신이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생존 경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힘들더라도 항상 웃어야 한다. 계속 울면 비호감이다. 그들의 고통과 불안과 그래서 터져 나오는 울음은 궁극에는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작용할 때 인정받는다. 어떤 어려움도 밝은 성품으로 극복하고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줘야만 호감형 캐릭터로 거듭 난다.

항상 밝음의 세계만 존재해야 하는 곳에서 성장해 온 하나의 주체는 자신의 삶 속에 존재하는 고통, 슬픔, 비루함 등의 감정을 제거한다. 겉으로 보이기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모습만 추구한다. 어떤 시련을 겪어도 곧바로 극복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렇게 아이돌은 밝고 맑은 심성으로 성공을 이루어내는, 대중의 롤모델, 대리만족의 대상이 된다.

이는 다만 아이돌이라는 직업군만이 가진 특징일까?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가 강화되기 시작한 21세기 초부터, 한국 사회 속에는 긍정의 태도와 낙관주의에 대한 요구가 일반화되었다. 십 년 전에 '행복전도사' 최윤희의 강연은 지상파 아침 프로그램을 휩쓸었고, <개그콘서트>의 캐릭터 '행복전도사'는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잖아요'를 외쳤다. 다만 그 행복은 '다들 10억쯤은 있으니' 행복할 수 있는 거였고, 행복전도사 최윤희는 병마로 인한 고통을 감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남편과 동반자살 하였다.

이후에도 지금까지 행복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웃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엔도르핀이 돌아 행복해 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싼 자기계발서들은 언제나 웃으라고 명령한다.

 

2. '명랑', 강요된 웃음의 코드

웃으라는 명령, 그것이 현재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한국의 역사적 시기를 돌아보면 웃음에 대한 강요는 주요 시기마다,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나타났다. 한국의 역사 속에서 웃음, 긍정, 낙관의 정서를 전달하던 단어는 '명랑'이었다. 현재에는 자주 쓰이지 않는 단어이다. '명랑 운동회'처럼, 복고풍의 느낌을 내기 위해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렇게 '명랑'이라는 단어는 왠지 옛날 느낌을 준다.

'명랑'이 자주 쓰였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그리고 1960년대에서 1970년대이다. 두 시기 모두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했던 때다. 일제 말기 식민지 통치 질서가 강화되었던 시기와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가 강화되던 시기다. 이 두 시기 모두 명랑이라는 단어는 밝은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긍정하고 미래를 낙관하는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실 1930년대 이전까지, 명랑이라는 단어는 원래 기후나 날씨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많이 쓰였다. '일기가 명랑'이라는 표현은 '날씨가 맑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명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변화하였다.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전쟁 수행 중 후방의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일제는 국가적 시책과 명령을 잘 따르는 '건전한 국민'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의 미나미 총독은 "반도 청년의 지도에 관해서 일언일행일치의 명랑한 인격을 양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아일보, 1967년 4월 3일, 4면.
동아일보, 1967년 4월 3일, 4면.

 

일제시기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개념으로 활용되었던 명랑이라는 단어는 1960년대 다시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관 주도로 국민의 생활 개선을 강제하여 건전사회를 이룩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명랑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군부독재 하에 생겨나는 국민의 불만을 억제하며 경제개발 계획을 단기간에 이루어내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60년대 국민들은 잘 살아보세의 희망찬 태도로, 모든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명랑한 시민이 되어야 했다.

그 때문일까? 1980년대 말 이후로 '명랑'이라는 단어는 일상의 용법에서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국가에 의해서 강요된 '명랑'이라는 단어는 어느덧 촌스러운 옛날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명랑하라!'는 긍정과 낙관에 대한 요구 또한 사라졌을까?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생존 경쟁이 강화되면서 역설적으로 낙관주의에 대한 찬양은 더욱 늘어났다. 간절히 바라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긍정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것이다.

 

3. 실패마저 긍정하며 우리가 향하는 곳?

최근 우리는 '파이팅!', '힘 내!', '웃어!'라는 말보다는, '괜찮아'를 더욱 자주 듣는다. 바야흐로 힐링의 시대다. 이제 노골적으로 웃으며, 긍정하고, 낙관하라는 강요는 사라졌다. 울고 싶을 때 울라고, 아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위로한다. 그 위로는 항상 긍정적인 모습만을 드러내고 살아야 된다는 강요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듯하다. 나의 부정적 모습과 감정까지도 모두 나의 것으로 인정할 수 있게 만드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위로가 진정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발언 아래에 깔린 '성공'에 대한 전제를 지워내야 한다. 우리는 실패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결국은 몇 번의 실패를 겪은 후에 결국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목표를 이미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에 대한 실패가 나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 아니라 나를 극복하고 성장하여 궁극의 성공을 이루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할 때, 괜찮다는 위로는 성공에 대한 압박으로 다시 전환된다. 성공에 대한 강요는 언제나 괜찮은 삶, 보이기에 좋은 삶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긍정의 강요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내 삶과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한다.

정권의 강요 속에 국가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던 명랑에 대한 명령은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파이팅을 외치고, 잠깐의 실패는 괜찮다고 다독이며, 나 자신의 부정적인 면모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내 삶의 부정적인 측면을 외면하고자 할 때, 우리는 병마의 고통 앞에 쉽게 삶을 놓아버리는 허무함과 범죄를 저지르고도 웃을 수 있는 기괴함을 만나게 될 것이다.

 

글: 이주라(문화평론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한국 근대 대중문학 및 문화 연구.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적 흐름과 감성적 특징에 관심. 명랑을 키워드로 긍정과 낙관의 태도가 한국 문화에 미친 영향과 역사성을 탐구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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