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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역사-네이션-시대정서’의 매듭
[양근애의 문화톡톡] ‘역사-네이션-시대정서’의 매듭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19.09.16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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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증 오류와 필요한 시대착오(anachronism)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역사극은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허구를 가미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보다 상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역사극이 극장에 걸릴 때마다 ‘역사 왜곡’이나 ‘고증 오류’의 시험대에 올라 검증 아닌 검증을 받고 나서야 대중들의 선택을 받는 것이 일종의 절차가 된 것처럼 보인다. 올해만 해도 <말모이>, <항거>, <자전차왕 엄복동>, <나랏말싸미>, <봉오동 전투> 등이 나란히 심판대에 올랐다. 이 중에서 3.1운동 100주년에 맞추어 역사의식을 고취시킨 <항거>와 최근 불거진 반일 감정에 기댈 수 있었던 <봉오동 전투>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비교적 후했지만, 다른 경우는 영화적 완성도나 재미에 대한 실망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 문제와 착종되면서 논란을 야기했다.

만들어진 창작물에 대해 고증 오류를 문제 삼는 것은 온당하지 않아 보이지만, 역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만큼 얼마간의 사실성을 담보하는 것이 역사극의 소임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를 대상화 한다는 근대적 인식은 고증을 통한 사실적 재현을 요구했고 일제 시기부터 고증을 통해 역사극을 만들고자 한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완전한 고증과 역사의 복원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고증이란 어디까지나 극의 의도에 맞는 범위 내에서 진행되기 마련이다.

소위 ‘역사 덕후’들이 역사물에서 가장 많이 지적해 온 고증 오류는 복식과 생활 도구, 전쟁 무기, 건축물 등 유형의 것들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기록된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 그러니까 사건의 선후 관계와 역사적 인물의 성격 묘사 등에도 고증 오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엄밀히 말해 고증 오류와 역사 왜곡은 다른 문제이지만, 역사 왜곡의 근거로 고증의 오류를 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유행처럼 번진 ‘팩트 체크’의 영향일까. ‘기록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논쟁의 입각점이 될 만큼 역사 기록의 진위 여부가 중요해졌다.

역사극은 태생적으로 시대착오(anachronism)를 필요로 한다. 역사의 재현 목적이 역사의 복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성을 통한 역사 해석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와 결합된 역사는 현재의 도덕적 결여를 투사한다는 점에서 과거로부터 미래를 전망하는 의식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최근에 벌어진 고증 오류와 역사 왜곡에 대한 대중정서는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되새기고자 하는 역사가 무엇인지 추적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지 않을까.

 

2. 애국심 마케팅의 (역)효과와 내셔널리즘

2017년에 개봉한 <군함도>는 여러 모로 문제적인 영화로 기억된다. 스크린 독과점을 비롯한 영화 외적 논란도 논란이었지만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군함도 탈출을 주요 플롯으로 삼고, ‘나쁜 조선인’과 ‘좋은 일본인’을 고루 보여주겠다고 한 의도가 ‘식민사관’과 일본 우익을 분노하게 한 ‘국뽕’ 영화라는 양립 불가능한 효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혹자는 <밀정>(2016) 이후 반일감정을 건드리면 영화가 잘 된다는 속설을 맹신했기 때문이라고 일갈하기도 하고, 지난 정부 때 블록버스터 역사영화를 통해 애국심 마케팅을 주도해 온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군함도에 갇혀 노동력을 착취당한 조선인의 비극을 재현한다는 것만으로도 일제 강점기에 대한 집단 기억을 건드리기에 충분했지만, <군함도>는 내부 식민지, 배신, 탈출 모티프 등을 액션과 자극적인 스펙터클로 버무리는 모험을 감행한다. 결과적으로 역사 왜곡 논란부터 신파적 감정 과잉까지 영화 안팎으로 소란스러운 논쟁이 지속됐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이에 더해 개연성 없는 스토리와 조악한 CG까지 더해지면서 <명량>과 <광해>, <국제시장>과 <인천상륙작전> 등 정치적 스탠스와 상관없이 흥행 몰이를 했던 영화들과 대조적인 반응이 나왔다.

 

<자전차왕 엄복동>

반공, 반일 등 애국심을 강조하는 내셔널리즘 영화에 대한 관객의 피로감을 방증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평범하게 살아가던 무지한 조선인이 어떤 계기로 반일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몰랐던 사실에 눈을 뜨고 각성하며 그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애국심까지 고취시킨다는 역사영화의 구조적 상동성과 그로 인한 식상함이 더 문제이다. 그러한 의도를 밀어붙이기 위해 역사적 사실은 왜곡되고 과장되며 굴절된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주인공 엄복동이 자전거 대회에 나가 일본인을 제치고 우승을 한 것은 맞지만, 실제로 여러 차례 자전거를 훔친 도둑이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야기되었다. 실존 인물 엄복동의 여러 모습을 조명했더라면 오히려 더 좋았을 것이라는 평이 나올 만큼 영화는 반일이라는 목적을 향해 개연성 없는 길을 걸어간다. 흥행 참패의 결과는 ‘엄복동 지수’(UBD=17만)와 ‘X복동’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등 조롱거리가 되었다.

 

<나랏말싸미>

<나랏말싸미>를 둘러싼 논쟁은 역사극의 ‘역사-효과’에 대한 우려가 임계치를 넘은 사례이다. 실존했던 인물인 신미 스님을 내세워 기록된 역사의 공백으로 존재하는 한글 창제의 과정을 그려내겠다는 영화의 야심찬 의도가 대중들에게 반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든 감독은 결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했지만, 세종의 한글 창제설에 흠집을 내고 세종을 나약한 군주로 그려냈다는 점은 관객들이 극장 앞에서 발길을 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영화의 내용이 교육적이지 않다는 점과 외국인들이 보고 오해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들어 우려를 나타내는 대중들이 많았다. 정작 역사학자들은 고증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영화에 허용될 수 있는 상상력의 범위가 크다는 점을 인식했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파급력과 역사영화의 교훈성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는 역사학자들의 인식을 상회한 것이다.

 

3. 스펙터클의 외삽과 민중주의의 강박

역사영화가 “‘화면 위의 역사(history on film), 시각 매체에 의한 역사(history in the visual media)’라는 점에서 과거에 대한 학계의 생각에 어마어마한 인지적 개념적 변화를 초래한다.”(로버트 로젠스톤: 17) 라는 사실을 외면하기는 힘들다. 역사를 다루는 다른 매체에 비해 영화의 매체 파급력이 크고, 이미지를 통해 역사를 시각화 하여 또 다른 집단 기억을 만들어낸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렵다. 역사극이 스펙터클을 중시하는 이유도 단순히 흥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규모 전투 장면이나 집단 학살 장면, 거리에 몰려나온 민중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 등은 윤리적 재현의 여부를 넘어 관객의 뇌리에 역사의 한 장면으로 각인된다. 비극적 역사를 재현할수록 스펙터클은 상상보다 더한 실재로 관객의 감성을 건드리고 시대의 정동을 이끌어낸다.

최근 한국 역사영화 생산의 추이만 살펴보더라도 어떤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재현하느냐의 문제가 현실 정치의 프리즘을 통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역사영화의 유사한 구조에서 평범한 인물이 우여곡절 끝에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는 한국 역사극의 오래된 문법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이름 없는 민중들이 희생되고, 남아 있는 수많은 민중들을 거리로 광장으로 역사 속으로 걸어 나가게 만드는 것이 역사극 생산의 동력이었다. 이것을 민중주의에 대한 강박이라고 부르면 과한 것일까. “역사는 민족주의를 부채질한다. 역사는 집단 기억을 형성함으로써 민족의 생성에 일조한다. 민족의 위대한 업적을 함께 찬양하고 패배를 함께 슬퍼함으로써 민족을 지탱하고 육성한다.”(마거릿 맥밀런: 121)

한국 역사극은 말하자면, 역사-네이션-시대정서가 보로메오의 매듭(Borromean Knot)으로 단단히 얽어매져 있는 형국이다. 역사와 네이션과 시대정서는 상호 의존적이고 어느 한쪽이 깨어지면 전체가 무너질 것 같은 상태에 놓여 있다. 현실에서는 단일해보이지 않는 인자들이, 더 이상 유효해보이지 않는 이상이, 그 실체를 규정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정동이 역사극과 그 향유를 둘러싼 현상들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 참고문헌

로버트 A. 로젠스톤(Robert A. Rosenstone) 엮음, 김지혜 옮김, 영화, 역사-영화와 새로운 과거의 만남(Revisioning History), 소나무, 2002.

마거릿 맥밀런(Margaret MacMillan), 권민 옮김, 역사 사용설명서(The Use and Abuse of History), 공존, 2009.

 

글: 양근애(문화평론가)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연극평론가. 드라마터그. 2016년 방송평론상 수상. 역사, 기억,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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