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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약속, 곤 사토시의 <천년여우>
[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약속, 곤 사토시의 <천년여우>
  • 손시내(영화평론가)
  • 승인 2019.10.2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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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접어들고 벌써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영화를 둘러싼 담론 또한 그에 발맞추어 변화하는데, 한편으로는 미래를 바라보고 또 한편으로는 과거의 시간을 정리하는 흐름이 최근에는 더욱 강해지고 있는 것 같다. 기술의 발전과 영화를 둘러싼 조건들의 변화가 영화의 다양한 모습을 꿈꾸게 한다면,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의 과거와 역사 또한 끊임없이 호출된다. 위대하고 진정한 영화는 과거에 있었다는 식의 노스탤지어에서부터 영화사를 다시 쓰려는 움직임까지. 어쨌든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 느끼는 불안정한 현재와 미래로 열린 다양한 문은 과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항상 함께 생각되는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곤 사토시의 <천년여우>(2001)를 떠올렸다. 곤 사토시는 <퍼펙트 블루>(1997),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2003), <파프리카>(2006) 등을 만들고, 2010년에 차기작을 작업하다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며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영화에 그려내고,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

 

2001년에 제작되어 국내에서도 2004년에 개봉된 바 있는 <천년여우>의 원제는 ‘千年女優’, 영문 제목은 ‘Millennium Actress’로 천년의 삶 속에 이어지는, 천년의 삶을 연기하는 여배우의 모습을 담고 있는 정도의 제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는 이러한 설정 덕분에 영화 속엔 과거 전국 시대와 에도 시대부터 우주로 나아가는 미래까지 다양한 시대가 모두 담긴다. 영화의 주인공은 후지와라 치요코, 70년간 영광의 시대를 누린 영화사 ‘은영’의 간판스타였고 지금은 30년째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배우다. 70주년을 기념하며 오래된 촬영장을 철거하고 개축을 앞두고 있는 영화사로부터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받은 다치바나 겐야가 그런 치요코를 찾아가 그녀의 삶과 영화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 영화 <천년여우>의 큰 뼈대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다. 전쟁의 와중에 태어났던 후지와라 치요코는 모두가 전쟁에 몰두하던 시절 첫사랑을 만난다. 일본 반란군인 그는 만주에서 싸우는 동지들에게 가던 도중 상처를 입고 치요코를 만났는데, 치요코가 그를 숨겨주며 그들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를 남긴 채 관군에 쫓기며 자취를 감추고, 배우로서의 치요코의 인생 또한 이 사건과 함께 시작된다. 치요코는 그를 찾아 만주에서 제작되는 영화에 참여하는가 하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배우로 활동하며 계속 그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이러한 사연을 보여주는 영화의 방식이 사뭇 흥미롭다. 첫사랑을 찾아 헤매는 현실의 치요코의 삶이 배우로서 수많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 치요코의 삶과 온통 뒤섞여있는 것이다. 그녀가 연기한 인물들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항상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향하려는 간절한 몸짓을 통해 연결되고, 여기에 끈질기게 얽힌 악연과 노파의 저주 등이 가세하며 배우로서의 치요코의 삶 전체가 내적 통일성을 지닌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더불어 겐야와 카메라를 든 그의 조수가 그 안에 함께 섞여 들어가 상황을 목격하고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한편으로 파운드 푸티지나 컴필레이션 영화, 비디오 에세이를 떠올리게 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각 필름 조각 속, 각각의 영상 속 이미지들은 개별 영화의 맥락을 벗어나 새로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형상이 되고, 사랑하는 이에게로 달려가는 천년의 몸짓이 그렇게 되살아난다. 물론 <천년여우>의 경우에는 애초부터 그렇게 각각의 영화를 넘어 연결되는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치요코의 사랑과 삶이었음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충동과 열정은 과연 무엇일까. 지나간 영화의 영광을 가능하게 했고 그것에 다시금 생명을 부여하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그러한 열정 말이다. 물론 그것을 ‘그’를 향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치요코가 반복해서 되뇌는 ‘약속’이라는 단어에 또한 귀를 기울이고 싶어진다. 14일째의 달, 이제 보름달이 될 내일을, 희망의 미래를 기다리게 하는 달을 바라보며 그들은 다시 만날 약속을 했다. 그것이 실제의 삶 어디에서 일어난 일이건 영화 속에서 일어난 일이건, 약속은 치요코를 움직이게 한다. 그러니 다소 감상적이더라도, 다시 만날 약속이 영화의 시간을 지탱하고 영화를 지속하게 만든다고 말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치요코의 오랜 팬이기도 한 겐야의 행보 또한 새삼 뭉클하게 다가오는데, 이는 2000년대를 막 맞이하며 이 영화가 상상했던 관객의 자리이기도 한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마지막은 치요코의 고백이다. 그를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를 쫓아가는 자신이 좋다는 그녀의 움직임이 멈출 리는 없어 보인다. 영화에는 끊임없이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약속과 몸짓에 더없는 희망을 겹쳐보았던 당시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이제 우리에게 그러한 약속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글·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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