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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투명한 Humanism에서, 흐릿한 Human’s ism으로 ―<우리집>론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투명한 Humanism에서, 흐릿한 Human’s ism으로 ―<우리집>론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10.3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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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휴머니즘이 아니다”

보통의 온정주의. 이것이 영화 속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이란 건 대체로 뻔하다. 작중인물들이 눅진한 고통과 번민의 바다에 잠시잠간 머무는 듯 묘사되곤 하지만, 머잖아 전도돼버린 상황 속에서 기약된 행복을 향하여 손쉽게 도약해버리고야 마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면, 꽤 적절한 예증이 될 성싶다. 단번에 움켜서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을만한 즐거움을 목도하진 못할지언정, 복잡한 현실 속에서 난데없는 희망의 조짐을 발견하곤, 그것을 곧장 도래할 미래를 밝힐 불씨로 무람없이 전유해버리곤 하는 상황 역시도, 빈번히 맞닥뜨릴 수 있을 것이다. 구태여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루하고 번거로운 일이 될 법한, 그 허다한 텍스트들 속에서 말이다.

뭉근한 감동을 안겨다준다는 게 뭐 그리 잘못된 일이겠는가. 표면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논쟁의 윗점은 전혀 다른 데에 놓인다. 일련의 전형적인 영화들이 진정으로 ‘위험한’ 까닭을 헤아리기 위해서라면, 조금은 더 섬세한 맥락의 이입이 요청될 듯하다. 핵심으로 직핍하자면 그건 관객의 ‘물화’와 관계된다. 간추리자면, 그/녀가 정서적인 안도와 심리적인 안주의 자세를 취하도록 만들어버린다는 것, 일방통행로를 따라 흘러가는 영화의 흐름을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휘몰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짙은 우려와 경계의 눈총에 담길 법한 메시지의 골자라고 하겠다. 감독이 사전에 치밀하게 설계해둔 이정표를 곧이곧대로 밟아나가면서 울고 또 웃고 하다보면, 어느덧 관객은 더 이상 관람성의 주체가 아닌 자리에까지 떠밀려 가닿게 된다. 시네마라는 경험의 장 속에서, 제 한 몸 건사할 곳을 잃고 아득한 변방으로 내몰리게 된 셈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무슨 케케묵은 논의냐는 힐난을 감수하고서 계속 말을 이어가보도록 하겠다. 통속예술을 구분하는 원칙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감각적-감상적 ‘쾌락’(만)을 최우선적 가치로 내세우고 있느냐의 여부라는 점은, 대략적으로 합의된 바다. 반면, 키치의 경우 그 규정의 핵심은 어찌됐건 ―그 어떤 형상화 및 표상화 방식을 경유하든― 예술텍스트의 내용과 형식이 끝내 ‘경험-사고의 전체성’을 종용하는 방향으로 귀착하게 되느냐/아니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뭔가 좀 생산적인 생각과 느낌을 가질 계기를, 그러니까 능동적인 발상을 통해 텍스트 해석에 주도적으로 개입해볼 기회를 도통 가질 수 없도록 몰아치는 경우들을 염두에 둔다면 썩 옳은 판단이랄 수 있겠다.

통속적이라든지, 혹 키치적이라든지. 둘 중 어느 하나의 속성을 어느 정도 머금고 있대도 그건 여전히 그럭저럭 봐줄 만한 작품이 되리란 점엔 큰 변화가 없다. 보다 엄밀하게 따져본다면, 전자는 ‘예술적 향유의 문제’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튼실한 구성의 문제’와 꽤 긴밀히 관계 맺고 있다는 점 또한, 좀처럼 부인하기 힘겨운 사실이니까 말이다. 허나 그 색감이 지나치게 도드라진다든지, 심지어 ‘통속적 키치’의 형태로까지 키메라적인 변형을 감행하게 돼버린 경우라면 곤란하다. ―지금 즈음이면 이미 대부분 눈치 챘겠지만― 상술한 보통의 휴머니즘 영화들을 주목해야 할 필요도, 바로 여기에 있고 말이다. 자칫 순진무구한 자세로 뛰어들다 보면 함정과 올무에 발 딛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니 말이다. 많은 경우 신파라는 언어로 손쉽게 번역되곤 하는 숫한 장해물들이 그 좋은 예다.

간단히 일러두자면, 지금부터 함께 읽어 나갈 <우리집>은 적어도 그런 ‘것’들과 동류인 ―좀 과감히 말해본다면― 속류주의 성격의 영화는 아니다. 알고 보면 접근하기가 무척 괴까다롭다. 허니 가급적이면 실다운 텍스트 해석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서고자, 다른 무엇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편이 어떨까 싶다. “만일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이 주어져 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사건의 종말을 거의 확실히 감지하고 예측해볼만한 상황 속에서 영화의 남은 이야기들이 흘러가고 있다면, 그 중간과정을 애써 들여다본단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달리 번역해보자면, 결말을 미리 짐작하고서 영화를 본다는 것, 그건 확실히 키치와 구별되는 일이라고 주저함 없이 말해볼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당초 이 글이 성립되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았을 테다― 여기서 차이의 중핵은 처음부터 ‘다소 이완된 긴장’에서 출발한다는 게, 감상자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하는 조건으로 능히 복무할 수 있으리란 점이다. 긴박한 추론의 의무에서 해방돼 여유로워진 관객들은, 영화의 낱낱 장면들에서 펼쳐지는 상황들을 한결 예민하게 벼려진 시선으로 독해하고, 스스로 의미를 반추해보며, 임의로 그 가치를 매겨보는 작업에 임할 수 있다. 키치가 공급하는 편안이 사고의 개입이 차단당한 데에서 오는 ‘불편한 안정감’이라면, 이 경우는 역으로 주어진 편안함이 역동적인 자율성을 담보해주는 셈이라고 정돈해볼 수 있겠다. 구태여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이자면, 이 자율성은 마치 같은 영화를 두세 번 반복해서 감상할 때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효과와도 일정부분 유사한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단순한 답습보다는 짐작을 통한 접근이야말로 훨씬 더 풍성한 영화적 체험을 누리도록 허용해주리란 점에서, 현격한 질적 변별성을 확보하게 될 테지만 말이다.

 

“절망의 뫼비우스”

암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스크린을 그득 잠식한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음성들만이 귓전을 따갑게 파고든다. 무어라고 말을 걸어오는 걸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음에, 당면한 문제 상황 또한 좀처럼 해결할 수 없으리라고 상상해봄직한, 그런 불화의 국면이랄까. 불과 2초 남짓이나 될는지. 하지만 이 찰나의 순간은 필시 영화적 진실을 압축적으로 현상하는 마스터쇼트를 훌륭히 갈음하고도 남을 것이다. 확실히, 그리 말해본대도 전혀 무리가 없을 성싶다.

명전. 불안과 긴장, 그리고 두렴에 질린 소녀의 얼굴을 비춤으로써 영화는 본격적인 시작을 고한다. 외화면 영역으로부터 들려오는 ―여전히 날카로운― 분쟁소리가 그 원인이 되었음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아울러 마치 그 소리에 공명이라도 하듯, 드문드문 돌출하는 거친 몸짓들이 정면에 노출된 하나의 얼굴을 흐릿하게 가렸다 다시 드러내길 거듭해서 반복한다. 매번 카메라의 시선이 새롭게 그녀의 눈동자며 피부에 가닿을 때면, 거기 스민 어지러움의 주파수가 가파르게 증폭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낼 수 있다. 아무리 무표정에 가까운 모습으로 일관한다 한들 표피조직 너머로 슬금슬금 뿜어져 나오는 파장마저 감출 순 없는 법이니 말이다. ―실은 (그녀를 바라보는 자의) 덩달아 올라가는 심박부터가 살아있는 증서가 되어줄 터이니― 굳이 다른 증거를 더 제시할 필요 따윈 없을 게다.

 

<불안, 긴장, 그리고 두려움-처음부터>

 

<불안, 긴장, 그리고 두려움-끝까지>

 

이처럼 원체 강렬한 체험을 동반하다 보니, 텍스트의 말미에 이르러 자연스레 기시감을 환기하게 되는 ―환기 ‘당한다는’ 표현이 더 온당할지도 모르겠지만― 것 또한 무리는 아니다. 수미상관이라는 문예적 기법을 억지로 떠올릴 필요조차도 없다.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은 떨림을 억지로 붙들어 매고서, 좌우로 시선을 드리워 제 가족을 훑어보며, 우선 식사부터 들라고 종용하는 하나의 얼굴은 정확히 영화의 도입부분에서 조우했던 바로 그 얼굴과 전연 차이가 없다. 심지어는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가까스로 자아낸 그 미소까지도 말이다-.

 

“너무나 강박적인”

바닥에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져 자기존재를 지탱하는 골격(틀)마저 깨어지고 부수어져버린 ‘가족’ 사진이 클로즈업 된다. 물론 오브제를 동원한 초보적 암시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그이들을 반길 운명의 낯짝이 어떠할 것임을 헤아려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네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미 가정 내에 편만하다 못해 찌들어버린 숙환이 좀체 낫지 않으리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몰랐던, 어쩌면 ―알면서도― 믿지 않길 택하거나 철저히 거부했던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소녀, 하나가 놀라운 점이란, 그저 외면의 자세를 취한 것만 아니라, 자신의 확신을 끈덕지게 밀고 나갔다는 사실에 있다. 시종일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실상 강박적이란 말을 덧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할 만한 모습으로. 그 흔적들은 텍스트 도처에 널려 있다.

 

<사실상 이미 선취된 결말>

 

<거의 강박적이라 할 법한 끈덕짐>

 

고사리 손으로 레시피북을 만들고 밑반찬을 채워놓는 작업이 그저 방학숙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엄마의 노트북 위로 쏟아져 내린 우유에 울상을 지은 것도 다만 혼나기 싫어서만은 아닐 테고 말이다. 무어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까. 가족 구성원 서로 간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악화되는 걸 어떻게든 막아내고, 마침내 가족여행(가정 내에 궁극적 화해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적 믿음의 대상)을 성사시키는 데에까지 가닿기 위한, 지독한 열심의 표현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게다. 그 과정에서 뒤따르는 모든 부담을 제가 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할 목표를 위한 절절한 갈증. 희생을 끌어안길 기꺼워한다는 점에서 강박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 갈증은 ―사람이냐 혹 공간이냐는 맥락을 떼어내고 보면 일단 ‘우리집’을 지켜야한다는 입장에서만큼은 사뭇― 비슷한 욕망을 가진 유진·유미 자매와 엮어지면서 한결 구체적인 양상으로 현출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정점으로 현시되는 게 바로 ‘박스로 집 만들기’ 놀이다.

 

<마치 틀어막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감출 수 없는 진실의 흔적들>

 

하나의 박스, 그러니까 작은 개미 하나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이나 단단히 테이프로 밀봉했던 그 상자 속에 그녀가 담아놓은/숨겨놓은 건 엄마의 여권과 아빠의 핸드폰이었다. 당사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그리하면 혹 해외주재원으로 떠나버리고자 하는 엄마를 또 오래 묵은 방황의 끝에서 외도에 성큼 가까이 가버리게 된 아빠를, 아니 이미 뜯어져버린 둘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든 틀어막고 봉합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주술적(강박적)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서야, 하나가 벌여놓은 이토록 가량없고 어처구니없는 기행을 무엇이라고 달리 근거를 들어 해명해내긴 어려울 성싶다.

 

<환상을 쌓아가다>

 

<스스로 무너트리다>

 

놀이에 참여하고자 제 스스로 그 봉인을 해금해버린 건 ―소망의 포기라기보다는― 더 나은 방식으로 환상을 쌓아나가기 위함이었다. 만일 ‘집짓기’로 귀착될 박스놀이의 양분으로 삼기 위함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끝까지 박스 겉면에 둘러친 결계를 해제하는 일 따윈 없었으리라. 그렇게 공을 들여 만든 아름다운 집(한편으론 이상적인 가족관계를 다른 한편으론 영원히 정주할 안식처를 상징함)을 후일 해변에서 스스로 짓밟아 없애버리는, 가히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확실히 모순적이기까지 한 아이들의 행동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그건 ―오래도록 묵힌 아픔과 슬픔의 정서가 의식의 표면을 비집고 일시에 해방됐단 사실에서 그 표면적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음은 물론이겠거니와― 반복된 실패경험 및 곧이어 다가올 또 다른/더 큰 실패의 징조 앞에서 맞닥뜨리게 된 좀처럼 제어되지 않은 두려움이, 날것의 형태로 표출돼 거칠게 덩어리진 결과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단지 여행의 피로로 누적된 불쾌감정의 발효 때문만은 아니란 뜻이다. 유미와 하나 사이에 발생한 갈등국면의 정점에서 두 사람의 입을 통해 토해져 나오던 것이 결코 서로를 향한 사사로운 불만이 아니란 점, 되레 자신의 가족이 맞이하게 된 처지에 대한 애끓는 염려와 한탄에 더 가깝단 점은, 가시적 사태를 에워싼 진실이 무엇인지를 한결 더 밝히 조명하고 현시해준다. 그것이 명확해진 이상 결국 다시 집으로 되돌아올 수밖엔 다른 수단이 없음은 물론이다. 설령 종전의 기대감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불가능해 보일정도로 잔뜩 퇴락해버린 어렴풋한 소망의 흔적만 덩그러니 남았다 한들, 혹여나 이뤄질까 목매는/목메는 일말의 간절함마저 끝내 방기해버릴 순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극도로 사나웠던 그 밤’, 열린 문틈으로 ―중첩된 프레임의 틈새공간구조로부터 몰입도 있게 쏟아져― 들이쳐 와 가슴팍에 또박또박 새겨졌던 상처 위에 아직 딱지조차 내려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그 자리로 꾸역꾸역 나아갈 따름이다.

 

<그 서늘했던 밤의 상처>

 

<다시금 그 자리를 향해서>

 

“난제에 부대끼다”

허면 작은 소녀가 이다지도 힘겨워야 할 까닭이란 건 ‘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자칫하면 우리를 해석의 통로에 매설된 은밀한 덫에 걸려 넘어지도록 충동할 수가 있다. 허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혹자는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른다.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하나의 소우주 내지는 사회의 작은 모형으로 간주돼왔던 가족집단의 안정과 화합을 다시 한 번 이상적 가치로 긍정하고 신화하려는 시도, 내지는 고전적 가치규범을 보편적 정언명제로 절대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인 셈속이, 텍스트의 근저에 흐르는 동력장치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바로 그런 셈속이야말로 영화의 배면에 도사리고 있는 기만적 의도가 틀림없단 주장이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라면 이미 서두를 통해 개략적으로 언급해둔 바 있다. 소위 속류적인 휴머니즘을 염두에 둔 영화였더라면,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제 자신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한 ―그것도 어린― 존재의 모습’을 관객의 눈앞에 가감 없이 들이미는 정말이지 부담스러운 작업을 감행할 리 없다. 부담스러움 혹은 이물감의 자각이야말로 능동적-반성적 사유에 불을 붙일 도화선으로 복무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그렇담 대관절 이렇게까지 가족관계의 문제에 매달려야 할 이유가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풀이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해질 때면, 때때로 사유의 기원으로 되돌아와 찬찬히 생각을 정비하며 사고의 맥과 흐름을 되짚어보는 편이, 종종 미더운 통찰을 안겨다 주기도 하는 법이다. 여기서 제안하는 건 이야기의 매개자 내지는 영화의 화자로서의 하나에게로 오롯이 시선을 되돌리자는 것이다. 이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통찰할 때, 보다 더 거창하게 말해서 그녀의 존재양식이 가진 특징을 세심히 들여다 볼 때, 비로소 감춰진 실마리가 눈에 들어올 터이다.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기”

그저 천진난만하다고 말해두어도 되는 걸까. 문제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해 보이는 건 물론이거니와 적절히 상황을 감지해낼 안목 또한 부재하다시피 하다. 순간순간 발휘하는 기지에 비추어 볼 때 본 바탕이 상당히 명민한 아이라는 점에 착안해본다면, 특유의 어리숙함을 단지 어리단 말로 갈음해버리기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럼 어째서? 혹, 이렇게 정리해본다면 또 어떨까. 일부러,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인간답지 않은’ 모습을 텍스트 면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노라고 말이다. 오빠 찬이 드러내는 ‘인간적인 그럴듯함’과 구별되는 구도에서 말이다. 계속되는 부정적 상황 속에서 내면화돼버린 냉소라든지 이따금 겉으로 표출되곤 하는 분노는, 지극히 인간다운 면모 그대로를 여실히 투영하는 장치라고 말해볼 수 있다. 그와 대비해서 살펴보건대, 하나의 모습은 마치 ‘정서구조 자체가 탈각돼버린’ 일종의 ‘중립화된 마네킹처럼’ 현상된다. 더불어 여기에다 ―아직 세태에 물들지 않았단 이유로― 흔히 어린 아이가 갖고 있다고 상정되는 ‘허구화된 객관이미지’를 덧입혀보기까지 한다면, 아마도 영화는 매개자이자 관찰자이기도 한 그녀의 시선을 또 한 대의 ‘내재적인 카메라’로 삼고자 했으리란 결론을 그럭저럭 도출해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이리저리 사고실험을 거듭해보면, 그게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니란 게 분명해진다. 감정표현을 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억제한 그녀의 표정 아래에 굉장한 부피와 밀도의 비애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어떻게 그런 그녀를 두고 중립적 카메라라는 말을 언감생심 떠올릴 수 있겠는가. 부정감정은 그저 눌러둔대서 사그라지지 않는다. 은밀히 감춰둔다고 경감될 고통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면, 아빠의 전화를 대리 수신하는 장면 그리고 여권이 담긴 엄마의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고 넘어가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무미건조함의 혐의마저도 제기해볼 수가 있게 된다. 전후 맥락을 전혀 모르는 자가 본다면 상당히 무관심하게/무신경하게 느껴진다고 말할 만큼이나 꽤나 밋밋한 수준의 표정변화 아래에서, 실제 아이의 내면이 어느 정도로 짓이겨졌을는지 상상해본다면 말이다. 그래도 감독이 이 지점을 계산에 넣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고 본다. 허면, 달리 그 의도를 추적해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요컨대 ‘문제적인 현실을 전혀 문제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우리 세태 일반’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해본다면 혹 어떨까. 그렇기에 ―부담을 끌어안고서라도― 일부러 소녀의 ‘반투명한’ 시선을 통해 들여다본 것이라고 말이다. 결코 투명하다고도, 그렇다 해서 불투명하다고도 단정할 수 없으니, 이러한 잠정적 표현을 제안해보는 것도 썩 나쁘진 않을 터이다.

반투명 렌즈가 제공해주는 적당한 비동일시의 거리감각은 허술한 전통적 가치(집단주의)를 전적으로 물신화해버리는 일을 막는 것은 물론, 상이한 욕망들로 들끓는 개인성에 무조건적인 찬동의 표를 던지는 일 또한 어렵게 만든다. 반투명한 시선이 제공해주는 예민한 현실진단은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은 과정적인 그리고 구성적인 윤리의 필요성을 호명해준다. 가족은 개인적인 가치와 집단적인 가치가 격렬히 맞부딪는 실험장, 그것도 ―세상에 제 홀로 태어난 자는 없으므로― 어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이 딜레마에 속해있다는 점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실험장에 해당한다. 굳이 처음과 끝, 사실상 그 시작과 결말이 정해졌다시피 한 영화의 중간마디를 그토록 집요하게 들고판 건, 바로 그 장소, 아니 실험장이, 다른 어디보다도 반투명한 눈을 필요로 하는 영역인 까닭이다. 어느 한 가족의 문제로 변주된 이 좁다란 영역이 실은 우리네 현실세계를 압축적으로 자아내는/지시하는 수사적인 방편(synecdoche)이라는 점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성싶다. 특유의 혼잡성은 ―특히나 지난 70~80년대의 어둔 현실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은― 전체성에 대한 과잉집착과 ―90년대 이래로 급격하게 창궐한― 개별성에 대한 강조가 마구 뒤엉켜 착종된 작금의 우리현실에 대한 훌륭한 유비로 작용한다. 되도록이면 관객들로 하여금 사이의 감각, 인/간다움(human’s ism)의 감각을 생생하게 추체험하길 유도하는 텍스트의 배려란 미덥다. 과정적이고 대화적인 윤리는 바로 그 깨침에서, 반투명한 안목을 견지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될 터이니 말이다-.

 

 

글·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동물인 늑대의 이미지로부터 착안해낸 이름이다. 이 짐승은 홀로 쏘다니며 늘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이란 사실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 있을 게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에 대한 성찰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독특한 쓰기/읽기 형식으로서의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그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터이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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