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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윤희에게> 다시 가슴이 뛴다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윤희에게> 다시 가슴이 뛴다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19.11.11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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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는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김희애가 주연한 영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첫사랑의 흔적을 찾아 나선 ‘윤희’와 딸의 여행이야기라는 소식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작품이었다.

 

당신에게도 기억 저편에 고이 묻어둔 사랑의 기억이 있는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윤희(김희애)에게 편지 한 통이 온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잊은 줄 알았는데, 그 한마디에 다시 가슴이 뛴다. 비밀스러운 이 편지를 몰래 읽은 딸 새봄(김소혜)은 엄마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윤희는 첫사랑이 사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주는 묘한 설렘을 안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딸과 여행을 계획한다.

 

이혼 후 혼자 딸을 키우고 있는 윤희는 전 남편에게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고 견디며 살아가는 윤희는 쓸쓸하고 외로워 보인다. 윤희는 자신의 첫사랑을 놓아버린 후 현실에 순응하며 무기력하게 살아왔다. 첫사랑의 기억이 그녀 삶의 모든 생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첫사랑이 살고 있는 곳으로 떠나는 딸과의 여행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것을 떠나보낼 수 있는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 될 수 있을까.

 

계속해서 내리는 눈은 치워도 또 쌓이고 치워도 쌓이는 차가운 눈처럼, 현실의 삶도 끝도 없는 굴레의 실타래처럼 벗어나기 힘든 삶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속에 시간이 약이 되어 조금씩 옅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이 켜켜이 쌓이는 사랑을 가슴에 묻은 두 사람은 계속 내리는 눈처럼 그리움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따뜻한 딸의 시선, 새봄

언젠가 그 눈이 그치고 새날이 찾아올 거라는 희망은 새봄에게 있다. 가족의 강요에 결혼하긴 했지만,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던 윤희가 남편을 많이 외롭게 한 후 이혼을 했을 때, 딸은 더 외로워 보였던 엄마를 선택하는 따뜻한 아이였다.

엄마 윤희는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산 사람의 자기방어벽이 느껴지는 차가운 사람이다. 그런 엄마에게 먼저 여행을 제안한 것도 딸 새봄이었다. 딸 새봄은 자신에게 그리고 이혼한 아빠에게 찾아온 사랑처럼,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는 엄마 윤희에게도 사랑을 찾아주고 싶었다.

 

남자친구 경수(성유빈)까지 동반한 조금 철없어 보이는 이 여행은 결국 엄마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솔직한 새봄의 태도로 계속해서 내려 쌓이기만 하는 눈을 녹이는, 얼어붙은 관계를 녹이는 촉매가 된다. 그리고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간 그 길에서 새봄이는 여자로서의 엄마 윤희를 만나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모녀의 공감여행을 하게 된다.

 

차갑게 쌓인 눈이 따뜻한 담요처럼

새봄과 떠난 여행으로 결국 윤희와 쥰(나카무라 유코)은 재회를 하게 된다. 오랜 세월 너무나 많은 할 말을 가슴에 묻어둔 두 사람은 막상 재회를 하고나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저 편지와 눈 덮인 마을의 풍경으로 그 모든 것들을 덮어둔다. 구구절절한 과거의 사연보다 영화가 더 소중하게 다루는 건 두 사람의 지금 감정이다.

 

긴 세월 오랫동안 윤희에게 써온 편지를 부치지 못했던 쥰, 오랜 세월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해 무기력하게 대응하며 삶에 피로해진 윤희에게 이번 여행은 세상을 향해 좀 더 용기를 내서 살아가게 하는 계기가 된다. 두 사람 모두 과거를 되돌릴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윤희에게>는 현실의 제자리로 잘 찾아 돌아오게 하는 상실의 이별여행이자, 오랜 첫사랑의 상흔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의 이별여행이자, 차갑게 쌓인 눈이 온 마을을 덮어버렸지만 그 사이로 길을 내어 주는 세심한 배려가 담긴 따뜻한 이별여행 영화이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와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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